자연과사람

한사정덕수 2015. 2. 6. 20:52

다시 마지막엔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받아 펌프 옆에 두어 새로운 마중물의 역할을…



마중물이란 말이 있다. 요즘은 사용하지 않게 된 말인데 예전 상수도가 가정집마다 설치되기 전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사용할 때 쓰던 말이다. 전기장치로 물을 끌어올리는 모터가 달린 펌프가 아니라, 손으로 지레대질을 하듯 움직여 물을 끌어올리던 수동식의 펌프는 곧잘 물이 빠졌다. 물론 전기식 펌프도 마중물은 있어야하지만, 그건 펌프장치 속에 늘 채워져 있기 때문에 매일 직접 마중물을 채울 필요는 없다.

 


영어 사전을 검색하니 이런 말이 있다. ‘priming water’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하는 예로 <fetch[prime] the pump : 펌프에 마중물을 붓다>라 해 놓았다.

펌프 옆엔 항상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이 있었다. 이 물은 먼지가 앉기도 하지만 상관없다. 얼마간의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오래지 않아 묽고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진다. 쓰임을 다한 물은 그대로 흘려보내 땅을 적시고 다시 맑은 물로 돌아가 개여울로 합류한다. 제 쓰임을 다했으니 귀하게 여겨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스스로 마중물의 역할을 해 새로운 물을 끌어올린 것으로 만족한다.

펌프를 다 사용하면 다시 마지막엔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받아 펌프 옆에 두어 새로운 마중물의 역할을 맡긴다.

 


이 마중물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기 위해 썼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나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꺼이 마중물의 역할을 해 주셨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저작권이 일부라도 돌아오기까지 박순백 박사님께서 그런 역할을 해주셨다. 아직 제대로 고맙습니다란 인사도 못 챙겼다.

그 외에도 수많은 분들이 힘이 되어 주셨음을 잘 안다.

최근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좀 더 오랜 연륜이 쌓인 뒤 부를 생각이었다며 그러나 이번 126일 방송에서 제가 한계령을 부를 생각입니다라 이야기를 하고 약속한 그날 실천한 가수가 있다.

울산에서 시노래 가수로 활동하는 박경하 씨가 바로 그다. 이곳 오색에 왔을 때 그녀에겐 오로지 130일로 확정된 시린(詩隣) 울산 콘서트에 몰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입장 같은 걸 헤아릴 처지가 아니었다. 말을 꺼냈다 하더라도 그 말을 약속으로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누군들 그에 대해 타박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26일 울산 KBS 라디오 FM 101.9 MHz 노래하는 오후4시 가요앨범의 초대가수로 출연해 불렀다.

무언가를 해주길 바란 건 아니란 걸 안다. 반대로 그의 노래에 대해 글을 쓴 것도 순전히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촬영한 사진들을 묵혀두기 아까웠고, 제법 오랜 시간 글을 쓰지 않았던 습관에서 벗어날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박경하 씨에게 그렇게 한 일들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 확인할 생각도 없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기에 그에게 이 자체가 마중물이 되었다면 쓰임은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한계령을 연습할 시간도 그에겐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방송에서 부른 한계령은 이 노래를 불렀던 다른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다. 한계령(오색령)을 와 본 적도, 이 노래가 된 시를 쓴 사람의 당시 생각도 엿본 적 없는 가수와는 다르게 그녀는 나흘이란 기간을 동행하며 질문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름 노래가 지닌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자 했다.

성악가를 비롯해 참으로 많은 이들이 한계령을 불렀다. 그런 노래들을 대부분 들어 본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눈 이들이 불러준 한계령은 의미가 또 다르다.

 


이 노래를 지난 2014103일 오색에서 박강수 씨가 불렀다. 산악영화제에 초대가수로 온 박강수 씨는 직접 낸 음반도 6장이나 된다. 그런 그가 한계령을 부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건 당연하다. 두 곡의 노래가 끝날 때 찾아 온 이와 함께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도로로 나와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로 한계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박강수란 가수는 올림필공원에서 박순백 박사님의 소개로 2001년 처음 만났고, 그 다음해에도 같은 시기에 만났다. 그러나 이번엔 자소가 바뀌어 오색에서 개최되는 산악영화제에 초대되었기에 한계령을 불렀으리라.

그의 노래가 끝나고 스피커를 통해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박강수 씨의 무대도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사회자의 말은 전혀 예상을 빗겨났다.

이곳에 바로 지금 박강수 씨가 부른 한계령의 원작자가 계시다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계시면 잠시 무대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200여 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무대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그날 박강수 씨의 무대가 끝나고 함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나 자신의 고향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가난한 시절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놓고 흐뭇한 표정을 짓던 이들처럼. 고향이나 가난한 이들이 높게 쌓아올린 장작가리나 그 속엔 뜨뜻함에 대한 동질성이 있다.

따뜻한 온기를 더 많이 느끼기 위해 톱날을 나무를 자르기 좋게 손질하고 도끼를 잘 들도록 벼린다. 노래를 부르는 이가 더 많은 감동을 듣는 이에게 안기고자 함도 자신에게 돌아올 성원이 그에 비례함을 알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며,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도 더 오래 고향이 지닌 푸근함을 가슴에 간직하고자 함이다. 숲에 빛이 고루 비추어지게 만들려고 나무를 솎아내는 나무꾼은 없었다. 가족들과 따뜻한 온기를 나눠야하기 때문에 나무를 베고, 돈이 되기에 나무를 잘라 낼 뿐 숲을 위한 행동은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모두 목적에 충실하다. 숲을 가꾸는 이가 땔감을 위해 나무를 자르는 이들을 보면 속이 바짝 탈 노릇이겠으나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절엔 구역을 정해주고, 땔감으로 자를 수 있는 나무의 크기와 조건 등을 지정하는 방법 외엔 도리가 없었다. 노래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에서 만들어지고 불린다. 숲을 가꾸기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계몽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고 부르라면 열정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비극적인 일도 시간이 흐른 뒤 이야기를 하면 많이 완화되고 희석되어 있다.

한계령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가장 아팠던 때로부터 40년이란 시간이 이미 흘렀다. 지금 당시를 회상하라면 담담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당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더냐는 문제는 이젠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지지 않았겠느냐 하는 말로 돌려진다.

얼마 전 신동아에 글을 기고한다며 대학교수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의 질문을 받았을 때도 담담하게 한계령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을 본 순간 사람에 대한 실망감까지 느꼈다.

이는 정덕수라는 한 개인에 한정된 게 아니라 자곡을 한 하덕규 선생이나 1984년 노래를 부른 양희은 씨도 마찬가지로 불쾌할 내용이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다분히 누군가 자신을 엄청나게 유명한 인사로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명예욕에 사로잡힌, 많이 부족한 아직은 지망생 수준의 글이다.

여기 그가 정덕수란 인간과 한계령에 얽힌 사연을 어떤 방식으로 꾸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는지 부분 옮겨 본다.

 

원래 이 노래는 보컬 그룹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불렀다. 노래의 탄생도 드라마틱하다. 깊은 감수성의, 웬만한 서정시를 뺨치는 노랫말은 무명 시인 정덕수(51)의 작품이다. 놀라운 건 마치 생을 달관한 듯한 몰아일체감의 이 시를 정 시인이 10대에 지었다는 사실이다.

 

1981년 정 시인이 고작 열여덟 나이에 고향 외설악 산행을 하다 연필로 끼적거린 시가 한계령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면 입이 딱 벌어진다. 시인 정덕수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다. 설악산 오색약수터 입구 오색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한줄기 구름처럼 떠돌았다.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집을 나갔다. 어린 나이에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다가 젖은 눈으로 바라본 건너편 산마루가 한계령이다.

 

곤고했던 그 시대가 그랬듯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봉제공장, 철공소에서 막일을 하며 고달픈 생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가난한 청년의 꿈은 시인. 그래서 1980년대 서울시내 문인들이 다니는 술집과 다방을 꿰뚫고 다녔다. 황금찬 시인이 단골이던 을지로 입구의 보리수다방, 지금은 없어진 계림극장 옆 청자다방, 동대문야구장(지금의 동대문디자인 프라자) 맞은 편 산장다방이 그가 순례하던 곳들이다. 객지를 떠돌다가 열여덟 살 때 고향에 잠깐 들르는 길에 한계령이란 시를 지었고, 그는 이 시를 들고 음악다방 DJ에게 노래를 신청할 때마다 낭독을 부탁했다. 우연히 이 시를 접한 하덕규가 곡을 붙여 노래가 탄생하게 된다. 오랜 세월 저작권 문제로 하덕규와 다툼을 벌였으며 지금은 가사 저작권의 절반을 자신이 받게 됐다고 정덕수는 설명한다. 이렇듯 비감한 노랫말의 원작자가 정덕수로 밝혀지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탄생의 세속적인 우여곡절과는 달리 노래 한계령은 초탈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어떤 이는 이 노래를 들으면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지나치게 비장한 노래라는 비판도 있다. ‘자살 권유가라는 좋지 않은 별명도 따라 다닌다. 실제로 정 시인이 서울 생활에 고달픈 나머지 고향을 찾아 자살을 시도하려다 쓴 유서라는 소문도 있지만 작자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김동률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신동아 20151월호>

 

문제가 되는 부분은 (*1)“1980년대 서울시내 문인들이 다니는 술집과 다방을 꿰뚫고 다녔다는 내용과, (*2)“음악다방 DJ에게 노래를 신청할 때마다 낭독을 부탁했다를 비롯해 (*3)“저작권 문제로 하덕규와 다툼을 벌였으며가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1)부분은 쓸 필요도 없는 내용일뿐더러 술집을 꿰고 다닌 사실도 없고, (*2)DJ에게 낭송을 부탁한 게 아니라 음악다방에서 낭송을 했다고 써야 맞다. 그리고 (*3)하덕규 선생이 세월이 흐른 뒤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했다정도로 헸으면 문제 될 일이 없다. 또 하나, “어린 나이에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다가 젖은 눈으로 바라본 건너편 산마루가 한계령어린 나이에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다가 젖은 눈으로 바라본 어머니가 넘으셨을 한계령으로 썼어야 맞다. 당시 살던 위치에서 건너편 산마루는 대청봉이지 한계령이 아니다.

하기야 양양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와 도로를 등지고 촬영된 사진에 “5 이미 만인의 클래식이 된 노래 한계령의 작사자인 정덕수 시인. 뒤편 멀리 한계령 고갯길과 점등산이 보인다.”로 전혀 다른 설명을 달았음에야 무얼 더 바라겠는가.

 

사소한 실수는 용서 될 수 있다. 누구나 얼마쯤 실수를 한다. 하지만 충분히 검토하고 바로 잡았어야 할 사실들을 이렇게 다분히 의도적으로 밖엔 볼 수 없게 만들면 그건 실수랄 수 없다.

곡을 쓴 하덕규 선생이나, 양희은 씨에겐 지금까지 어떤 문제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한계령이란 노래는 원 제목이 오색령에서였던 한계령에서가 원형이다란 정도만 밝혔고, 30년도 넘게 많은 곳에서 낭송을 해왔다.

 


많은 이들이 아끼고 애창한 노래 한계령을 박강수 씨와 박경하 씨 두 분이 불러주었으니 이 두 분에 대한 내 관심이 어찌 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또 다른 노래가 세상에 내놓여질 때도 이 두 분의 노래였으면 싶다. 며칠 전 인사를 나누었던 이가 10년도 훌쩍 넘어 기억 저 멀리 가뭇하게 되더라도 그건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만 아니라면

꼭 그 자리에 어울리는 노래로, 그리고 없는 시간을 나누어 악보를 익히고 노래를 불러 방송으로 들려준 정성을 어찌 잊으랴. 박경하 씨가 방송에서 들려준 이야기와 노래 전체를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녹음실에서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불르고야 다시 편집과정을 거쳐 방송용으로 만들어지는 노래가 아닌, 방송국에서 기타반주 하나만으로 직접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깊이 이해를 하려 노력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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