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

오솔 2011. 8. 8. 10:13

 

봉일암(鳳逸庵) 마루 끄트머리에 종이 매달려 있었다. 예불시간 때면 스님이, 때론 처사가 옆에 놓인 나무 방망이로 종을 치는데 툭툭 마루를 두어번 울린 다음 댕댕댕 조용하게 치기 시작하다 소리를 죽이고 또 다시 조금 더 크게 치다가 이렇게 서너번 되풀이 한 다음 드디어 힘차게 종을 쳤다. 산사 숲속의 새들은 잠을 깼고 내 방 바로 앞에 종이 있었으므로 나도 새벽 잠을 깼다. (오른쪽 마루 끝에 종이 보인다.)

 

1970年 1月18日(12.11) 日  晴

연일 매섭던 바람이 누구러졌다. 점심 후 일심(一心) 처사와 산등성이를 타고 방죽을 지나 추동(秋洞)에서 쌀을 지고 오는데 같이 갔다. 추동 술도가에서 막걸리 한 사발씩 마셨다. 서울 막걸리보다 순하고 취기도 오래간다.

 

1970年 1月20日(12.13) 火  晴

백암,월봉,종학군과 암자 뒤 방장산(方丈山)을 올랐다. 꿩이 푸드득거리는 오솔길을 지나 산에 오르니 땀이 난다. 가까이 남해 바다가 섬들과 더불어 뿌연 안개 속에 앉아있고 동쪽으로 멀리 진주 시내가 어슴프레 보였다. 어제 혜담 주지스님한테 불명(佛名)을 부탁드렸는데 오늘 '천천당'이라는 불명을 받았다. 우러러볼 천자에 샘천. 장차 우르러보는 인물이 되라는 뜻이란다.

달이 둥글어 온다. 옹달샘에 내려가 달빛에 이를 닦고 발을 씻었다. 오늘 저녁에는 내 방에 군불을 많이 넣은 모양이다. 누워있을 맛이 난다. 처사님이 내 방에서 같이 자겠단다. 밤참으로 토란국을 끓여주겠다며 처사는 토란을 깎고있다.

 

1970年 1月26日(12.19) 月  晴

법당 신중단(神衆檀) 밑에 넣어둔 곳감을 꺼내먹었다. 백암과 현국이 장난기가 있어 셋이 모의를 하게 되었다. 먼저 합장을 하며 백암이 부처님께 빌었다. "중생들이 곳감이 하두 먹고싶어서 그러니 용서하시고 미리 신고를 부처님께 하오니 결코 도둑질은 이니고... " 운운. 하여튼 절에서 만든 곳감이라 별미였다. 

 

1969年 1月29日(12.12) 水  雪後曇

내일이면 하산이다. 조반 후 하영철형,진하군,광호군과 서봉암(棲鳳庵)과 미륵암(彌勒庵)엘 갔다. 밤새 내린 눈으로 소나무는 햐얗고 산길을 걷는 소리가 뽀드득거렸다. 서봉암에서 점심을 대접 받았다.

미륵암의 천2,3백년 됐다는석굴의 천정은 돔식으로 다듬지 않은 모양 그대로 쌓아올렸고 부처님을 비롯하여 16 나한을 모셨는데 불상과 입구 양쪽 벽은 원형 그대로 두지않고 흰 횟가루가 칠해져있어 안타까웠다. 문화재는 이끼가 중요하다. 역사는 이끼다. 문화재를 망쳐놓았다. 부처님의 코와 손가락이 떨어져나갔다. 어느 산부가 부정을 염려하여 낙태를 해야 했는데 부처님의 코를 삶아먹으면 되는 걸로 떼어갔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해 다시 미륵암을 찾아갔던 일기다. 

 

1970年 1月25日(12.18) 日  晴

백암,현국 씨와 미륵암을 갔다. 작년에 뵈었던 스님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무슨 재를 지낸 모양이라 떡과 감,과자를 먹고 가라고 붙잡았다. 절 음식이 건강에 좋다면서 자꾸 권하는 노스님의 얼굴과 말씨에는 자애로움이 깃들었다. 비구니들만 있는 곳이라 깔끔한 분위기가 돌계단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확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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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미륵암의 다른 하나의 기억이 사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미륵암에는 예닐곱 분의 비구니가 수행하고 있었다. 그 날 노스님의 간곡한 말씀을 뿌리칠 수 없어 일행 셋이 함께 방에 들어갔는데 거북한 냄새가 났다. 오로지 비구니들의 수행처라 오랜 세월에 특유의 냄새가 곳곳에 배였다.  나는 그 냄새에 눌려 음식을 먹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음양의 조화와 이치를 곰곰히 생각했다. 남자들 하숙집 발고랑내 땀내도 여자와 더불어 합해지면 모든 냄새가 바로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을.  반쪽 반쪽이 서로 만나면 그날부터 천당이고 극락이다. 미륵은 내세의 부처다.

 

효당 조실은 머리를 깎지않았다. 다솔사 절간 마당에 젊은 보살이 간혹 눈에 띄었다. 이미 소문으로 알려진 효당의 젊은 마누라 원화보살이었다. 죽로지실 옆 요사채에 효당의 가족들이 생활한다고 상현 수좌가 일러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