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무 아리랑

오솔 2021. 7. 22. 17:34

 

44-2

 

나는 조심스럽게 이희종 CU장의 의중을 떠보았다. 

 

" 저, 일 좀 하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지금 이래가지고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자꾸 갑니다. "

“ ....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해. 나도 알아.”

낌새를 느꼈는지 CU장은 적극적으로 대응해주었다.

“ 에이플랜 반년이 넘었습니다. 밑에서 나올 이야기는 다 나왔습니다. 이젠 에이플랜의 갈 길도 공유가 되었습니다. 속도만 붙이면 됩니다. ”

“ .............. 내가 무얼 도와줄 가? ”

“ 문제는 어른들입니다. 사장님들끼리 이야기 좀 하십시오. ”

내 어투에는 다분히 짜증이 있었다.

“ ................ ”

“참깨 천 번 구르느니 호박 한 번이 낫다는 말도 있지않습니까.”

 

‘CU장님 책임입니다’ 라는 말이 입가에 나왔으나 참았다. 사실 그렇다. 임원, 사원들 참깨의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가 큰 호박, 사장들이 풀어야할 문제였다.

 

 

“ 자리를 한번 옮기지 그래. ”

무언가 결심을 한 듯 CU장은 단호했다. 평소 감지해온 어떤 과제가 현실로 다가온 듯 CU장은 빠른 반응을 보였다. 

“ ................. ”

“ 다들 담아두고 있던 말 좀 해보라지. 그럴려면 장소를 한번 바꿔 봐! ”

순간, 나는 재작년의 산전 임원들의 ST( Sensitivity Training )를 상기했다. 장소의 변화가 다른 분위기를 만들고 허심탄회한 토론을 만들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그 때는 홍은동에 있는 스위스그랜드 호텔이었다.

 

“ 제주도가 어떻습니까. 골프도 한 번 하시고... ”

“ 그렇게 해봐. 이왕이면 빨리 해. ”

 

결정이 빨랐다. CU장은 파이프에 담배를 재며 웃었다. CU장과 나는 어색했던 긴장감에서 벗어났다. 헝클어진 통합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더더욱 김회수 사장의 '내한테 오지마! 사건'은 나를 갑갑하게 했었다.

 

 

며칠 전 '네고플랜' 관련하여 면담할 때 CU장의 말이 생각이 났다. 2, 3월까지는 히타치와 결론을 명쾌하게 내겠다는 말에 주목했다.

 

“말씀대로 중국 대련공장에 김회수 사장과 함께 가셔서 보여주십시오.”

CU장의 말대로 금성기전의 인천 주안공장의 엘리베이터 생산규모보다 훨씬 큰 금성산전의 대련공장의 해외 생산기지를 보여주면 작은 문제에 얽매어서 헤어나지 못하는 김 사장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하는 바람이었다.

“물량을 올려주면 미쓰비시가 해외시장에서 우리를 밀어준다고? 도면 한 장도. 어림없어!”

CU장은 훨씬 유연성이 있는 히타치 쪽으로 밀고나가겠다는 의지를 이 한마디로 대변했다.

 

“대련공장에 빠른 시일 내에 같이 한번 다녀오십시오.”

‘김 사장은 생각이 참 편협해. 그러니까 스스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거야. 주위에서 이야기해줘도 좀체로 결단을 하지 않아.’라는 CU장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어째서 김 사장님이 생각하는 안을 에이플랜에서는 반영하지 않는지,  김 사장의 오해도 풀어주시고... 이 상태로 가다보면 또 다른 오해가 생길가 걱정스럽습니다. 제주도에선 그런 반전의 분위기만 만들어 주십시오."

"알았어!"

 

 

 

 

 

2월 19일 이른 아침, 두 편의 비행기에 나뉜 일행은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제주도로 날고 있었다. 경영회의 멤버의 ‘해외’ 전지 워크샵이다. 제주도도 해외다. 갑작스런 제주행에 참석자들은 들떠 있었다. 지금까지 임원 워크샵은 곤지암에 있는 그룹 연수원인 인화원 아니면 고작 서울 인근의 호텔이었다.

 

일행들에게 제주행 1박 2일 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장소는 제주의 그랜드호텔이다. 신축호텔인데다 실내가  밝았다.  밝고 깨끗한 모양새가 맘에 들었다.

 

 

일행은 모두 17명이다. 사장단으로 이희종, 백중영, 김회수, 권태웅, 성기설, 허창수, 전무 이하 임원으로는 구자욱, 이중칠, 박충헌, 구정길, 서정균, 김수철, 이민우, 김형철 그리고 에이플랜 팀에서는 박진홍, 문동일, 강명철이다.

 

제주행에 매킨지 멤버가 빠졌다. 나는 일부러 매킨지를 뺐다. 자유스런 토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까지 에이플랜 보고회는 공간이 넓은 대회의실인데다 안건 자체가 딱딱했다. 더욱이 매킨지와 회장실에서 파견된 남용 상무 산하의 V-추진본부 멤버들이 감독관처럼 버티고 있어 이런 분위기에 가세했다.

토론하는 과정에 튀어나오는 영어나 일본말도 스트레스를 주었다. 회의 시작 바로 직전에 완성되어 참석자 앞에 놓인 방대한 보고 자료도 위압감을 가중시켰다. 짧은 시간에 주어진 테마를 소화해서 토론으로 이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매킨지의 아카바와 후지모토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이들도 이해했다. ‘ 바람직한 최고 경영층의 역할 ’ 이라는 주제가 이들에게도 부담스러웠다. 참석을 안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며 그들도 긍정적인 유연성을 나타냈다. 나는 토론된 주요 내용과 결과를 자세하게 피드백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박2일 제주 워크샵 토의의 주제는 세 가지다.

1. 산전이 지향해야할 사업영역은 무엇인가?

2. 세계수준으로 가기 위한 핵심역량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

3. 통합 후 바람직한 입지전략은?

 

 

“ 문제는 어른들입니다. 사장님들끼리 이야기 좀 하십시오. ”

내가 이희종 CU장에게 제안을 했던 요지다.

“ 담아두고 있던 말 좀 들어보지. 그럴려면 장소를 한번 바꿔 봐. ”

이희종 CU장이 단안을 내렸다. 제주행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워크샵의 실제 목적 배경은 <Top Level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나는 하루 전날 에이플랜팀 부장들과 먼저 제주로 갔다. 김포에서 제주도로 날아가는 한 시간 내내,  1박2일동안 워크샵 주제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흐름을 주관해야 할 나로서는 곤혹스러웠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워크샵 회의실부터 점검했다. 딱딱한 의자 대신 소파를 둥그스럼하게 서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재작년 92년에 임원 ST할 때 유동수 선생이 가르쳐준 아이디어를 되살렸다. 고정석 자리를 지정하지 않아 트윈빌딩에서 없던 자연스런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토론 자료를 여러가지 준비를 했으나 오후 반나절의 토의과정을 단순화했다. 진행하다가 필요하면 즉각 OHP에 올려놓고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어가도록 실무적으로 대비해 두었다.

 

 

첫 아젠더는 <산전CU의 장래상>이었다. 탑 매니지먼트로서 산전의 장래와 사업영역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당초 3사 통합이라는 에이플랜 프로젝트에서 장래상인 비전의 설정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것만으로 방대한 작업이다. 매킨지와 나는 이 부분에서 생각이 달랐다. 매킨지는 당초의 계획대로 신규 인력을 투입하여 서브 프로젝트로 하자는 주장을 폈다. 나는 에이플랜의 범주에서 다루자고 했다.

 

서브 프로젝트는 별도의 계약이 수반되는 또다른 프로젝트를 의미했다. 기존의 에이플랜 팀 인력이 분산이 되거나 새로이 팀을 구성해야 하므로 산전CU 인력 수급에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별도의 계약이므로 매킨지에 지불하는 금액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 매킨지로서는 수익의 창출이었다.

 

따라서 당초 에이플랜의 작업 프로세스에서 비전 부분이 변화를 가져왔다. 막상 통합작업의 일환으로 묶어 정립하기에 인력의 투입에서나 시간적으로 역부족이었다. ‘ 비전 ’, ‘ 장래상 ‘, ’ 공통목표 ‘로 표현이 차츰 바뀌어간 데서 보듯이 작업의 볼륨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중요도 면에서 간과된 것은 아니었다. 이 테마는 문동일 부장이 맡고 박진홍 서브팀장이 지원하는 형태로 검토해왔다.

이번 제주 워크샵에서는 비전을 다루되 큰 그림만 그리고 공유하는 것으로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구체안은 차후 별도의 작업을 하기로 매킨지와 잠정 결정했다.

 

 

두 번째 어젠더는 <산전의 사업영역>. 첫 어젠더인 장래상에 이어 구체적인 토의여서 네 시간동안 내내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전원 참여의 분위기가 제주도까지 멀리 날아온 소득이었다.

 

 

한편으로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

 

 

‘산전의 목표’라는 테마에 문동일 부장이 준비한 자료를 먼저 설명했다. 초반에 이중칠 전무의 발언이 의외로 빨랐다.

“ 작년에 ‘사업구조 혁신’에서 산전CU의 SPG가 적절했는데, 왜 그런 구분이 이번에는 없어졌지? ”

에이플랜 팀이 구성되기 전 서정균 상무의 전략기획본부 주관으로 워크샵이 있었다. 그 당시 내용을 이 전무가 지적한 것으로 에이플랜 팀에서 로직과 프로세스 면에서 기본 프레임을 바꾸었던 것이다.

 

“ 작년은 관련 사업을 개괄적으로 묶어본 것이고 에이플랜에서 작업은 고객, 기술의 축을 기준으로 다시 설정해 보았습니다. ”

내가 대답을 했다. 이 전무가 발언을 계속했다.

“ 그러니까 복잡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장난감 업체일 경우 그냥 ‘장남감 메이커’ 하면 되지 ‘장난감 트럭 메이커’, ‘장난감 자전거 메이커’ 하고 나열하니깐...... ”

 

그러자 이희종 CU장이 이 전무의 말을 가로챘다. 말씀이 많은 데 비해 평소 남의 말을 경청하는 CU장이 이 순간만은 의외였다.

 

“ 실무자는 ‘종합 메이커로 갈 거냐, 아니면 특정 분야로 갈 거냐’의 뜻으로 말한 것이요. 사업의 구분이 그저 복잡하다는 한마디로 끝낼 그런 뜻이 아니야. ”

CU장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 전무는 갑자기 무안스러워졌다. 잠시 시선을 밑으로 깔고 있던 이 전무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 왜 나만 이야기하면 막습니까? ”

“ .................. ”

“ 내만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

참석자 모두는 순식간에 벌어진 분위기에 긴장되었다. 급랭한 분위기를 추스르려는 듯 허창수 부사장이 말했다.

 

“Toy 얘기를 했는데 Toy도 분야가 다 다릅니다. 종합적으로 모든 Toy를 다 할 거냐 아니면 특정 분야만 할 거냐 바로 그런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초반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왜 나만 이야기하면 막습니까’로 끝냈다면 몰라도 ‘내만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까지는 오늘만의 일이 아닌, 묵은 감정의 일단을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이희종 CU장에게 이중칠 전무의 누적되어온 불쾌감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심각한 갈등으로 보였다.

 

 

사적인 대화가 아닌 회의석상에서 이런 직설적인 표현은 나오기 어렵다. 이런 투의 언사는 그나마 이 전무만이 이희종 CU장한테 할 수 있는 천지난만하기 이를데 없는 표현이었다. 서로 이해가 되는 기초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나는 판단했다.

이 전무가 오늘 이처럼 나서는 데는 사원과 임원을 망라하여 사내 최고참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이 전체분위기를 대표하여 총대를 매고 나선 인상도 없지 않았다. 어떤 의무감마저 느껴졌다.

 

평소 이 전무의 팩하는 성격이 때로는 인간적인 친근감을 주었다. 자기감정에 솔직히 반응하는 타입이어서 엉뚱한 한 마디로 딱딱한 회의 분위기를 바꾸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당사자는 물론 당사자가 아닌 주위사람들이 긴장하기 일쑤였다. 한편으로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이젠 이 전무의 태도에 CU장이 취할 반응을 주목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희종 CU장 본인은 웃으며 한사코 부인했지만 ‘전화기 수십 대 박살낸’ 금성사 상무 전무 시절의 성칼을 누구나 머리에 떠올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지금 CU장 앞에 놓인 연필통이라도 날아옴직 했다.

 

 

이희종 CU장은 빙긋 웃고 말았다. 씩 웃는 그것뿐이었다. 이 전무도 그걸로 끝이었다.

이희종 CU장에겐 이 전무는 사랑스런 후배다. 이 전무는 CU장이 부장 시절에 면접을 한 신입사원이었다. 부산 금성사 동래공장 시절부터 삼십 년을 이어온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독선’으로 보기에는 애정이 있었고 ‘불쾌감’으로 단정하기엔 공경이 배어 있었다. 해피엔딩에 모두 안도했다.

 

 

아무리 남녘이라지만 2월 제주도의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44화 계속)

 

 

 

 

Wow! I see here all the politics going on. the good,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석양의 무법자... 엔니오 모네꼬네 음악이 생각나는군. 글쎄... 자주 들러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