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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 2021. 9. 1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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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4/4분기 중반에 CM(컨센서스 미팅)을 했다. 당해년도 경영 성과가 손에 잡히고 다음해 사업계획이 그려지는 시점이다. 그룹 회장과 CU장 간에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각 CU의 경영 성과는 ABCDE 등급이 매겨져 사장단의 인사 이동, 임원 승진과 퇴진, 차등 상여의 지급 기준이 되었다.

 

 

년말이 가까워오면 그룹내 20여 CU는 CM에 대비하느라 전전긍긍 했다. 나는 CM의 실무 책임을 총괄했다.

구자경 회장의 '럭키금성' 시절에는 자율경영이라는 테두리에서 선언적인 각서 교환으로 끝났으나 1995년 구본무 회장 체제의 'LG'가 되면서 약 1시간 30분 대면 보고와 질의응답 형태로 전환되었다.

 

 

 

 

 

96년 11월12일은 기억에 새롭다. 96년도 산전CU CM에서 마무리 발언에서 구본무 회장이 말했다.

 

 

“ 주요 5개 사업 제품에서 시장 점유의 1위를 잡고 있는 게 산전이라는 건 잘 압니다. 확실하게 1위를 계속 굳혀주세요. “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툭 던지듯 뭉텅스런 한마디는 일찌기 없었던 산전에 대한 관심의 일단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온기를 느꼈다.

 

며칠 후, 당일 CM 내용을 정리하여 그룹 회장실에서 이종수 CU장 앞으로 보내왔다. '인비(人秘)'로 직접 전달되었다.

 

 

 

 

회장실 누군가가 다녀가자마자 이종수 CU장은 나를 불렀다. 책상 위에는 서류 한 장이 놓여있었다. < CU 경영활동에 관한 조언과 권고사항>이라는 머리글이 눈에 들어왔다. 뒷장에는 구본무 회장의 큼직한 서명이 있었다. 

 

 

11월 12일 CM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그동안 신경이 쓰였던 터다. 나는 서류를 앞으로 당겨 훑듯이 단숨에 읽어보았다. 단번에 눈에 띄는 대목. 

 

‘목표에는 미달했으나 최고의 경상이익을 낸 데 대해 치하함.’

 

‘CU 성과 측면’에서 '잘한 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 ..................  "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고생한 걸 알긴 아는군! ”

 

이종수 CU장이 나직이 말했다. 표현이 간명했다. 

 

 

“ .................. ”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 외 나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 고생한 걸 알긴 아는 군! ’

 

이종수 CU장의 심사를 읽었다. 산전에 온 지 2 년만에 이종수 CU장에게 비로소 나는 어떤 친근감을 느꼈다. 처음 느끼는 유대감이었다. 

 

 

“ 전 임원에게 알려주세요. ”

 

이종수 CU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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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CU 임원회의에서 나는 <CU 경영활동에 관한 조언과 권고사항>을 OHP로 비추며 설명했다.

 

보고가 끝났는데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무표정하게 시선을 주고받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작년 C에서 올해는 B-. 칭찬도 생소하면 감흥이 없는 것인가.

 

‘ 목표에는 미달하였으나 최고의 경상이익을 낸 점을 치하함 ‘은 최고의 칭찬으로 기록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더 이상도 이하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참모들이 요약해준 문자를 옮겨적은 '말씀'이 아니기를 바랐다. '트윈타워 동관'이 진정으로 산전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 우리 더 잘 합시다. 산전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도록 다같이 노력합시다. 수고하셨어요. 여러분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

 

이종수 CU장의 <'96년 업적 컨센서스 미팅 결과 보고> 안건의 마무리였다.

 

 

 

 

“ 오늘날과 같은 기업환경에서 인재는 획일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업문화가 다른 CU별로도 인재의 모습이 다를 수 있고 업무의 성격, 지역별 특성에 따라서도 바람직한 인재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점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인재로 키울 만한 사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장점을 찾아서 그것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면 많은 숨어있는 인재들을 키워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

 

 

91년 10월 8일, 그룹 월례 합동이사회에서 구자경 회장의 월례사이다.

 

 

‘자율경영’이 무엇이며 ‘Culture Unit( 사업문화 단위 )’이 가는 길이 어디인가? ‘

 

사업문화가 다른 데서 다른 인재가 나올 수밖에 없음이다. 현실과 이상을 반추할수록 그룹이 보는 산전의 종착역은 아리송했다. 원론적인 '회장님 말씀'이 산전에는 빛을 내지 못했다. 산전은 관심 밖이었다. 산전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누구도 산전을 말하지 않았다.

 

 

 

 

<산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비추어 '트윈타워 동관'의 안목은 왜소했다. 이희종 CU장은 산전이라는 사업분야를 개척한 산전부문의 창시자다. 산전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룹은 자율경영과 Culture Unit을 말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이희종 CU장은 가끔 감정을 토로했다. 

 

‘ 산전은 산전에게 맡겨라. ’

 

이희종 CU장은 주장했다.

 

‘ 산전이 쓰레기 매립장인가? ‘

 

어느 사원이 거침없이 말했다. 산전의 실종은 심각했다.

 

 

 

 

산전 27년에 CU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산전에는 없다.

 

‘ 우리 산전엔 사람이 없는가? ’

 

 

백중영, 성기설, 김회수 사장은 그나마 산전에서 복 받은 사람이다. 임원으로 승진한데다 전문 경영인으로서 사장이라는 명함을 가져보았다. 그러나 더 컸어야 했다.

본인은 물론 후배들을 위해서 CU장에 올라야 했다. 그것이 조직의 흐름이다. 직원의 장래이자 회사의 미래다.

 

한 때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한계가 드러났다. 물러나는 장본인들도 이래저래 불만을 곰씹었다. 조직 전체가 빠져드는 박탈감은 물러가는 어느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사원들의 정서는 스스로의 장래와 무관하지 않았다. 스스로 인재가 되려는 인재. 그런 인재를 키우는 선발과 육성이었다.

 

‘ 산전 본질의 추구. ’

 

새로운 산전을 건설하려는 그림을 말했다. 산전에서 인재를 키우려는 노력 그 자체다. 3사 통합 작업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었다. 곧 인재 육성.

 

 

“ 인재를 찾아 육성하는 일, 산전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에이플랜은 사업가를 길러내는 프로젝트입니다. 장래의 후계자, 사업부장들을 길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에이플랜 팀 여러분들이 스스로 인재가 되고 인재를 찾아주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경험이 인재가 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에이팀 인재’라고 부르겠습니다. 장래의 후계자요 사업부장이 바로 ‘에이팀 인재’인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발탁인사도 하겠습니다. 산전이 갈 길은 이것입니다. 95년에 신체제가 소프트 랜딩하도록 에이플랜 초기에 프레임을 잘 짜 주기 바랍니다. 3사 통합 작업만이 아닙니다.“

 

이희종 CU장은 에이플랜 팀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내일에 거는 기대를 표출했다. CU장의 구상이 '산전이 갈길'의 지름길이자 대안이었다.

 

 

 

 

 

 

 

< 초일류의 본때를 보여주자 >

 

에이플랜 프로젝트의 두번 째 시작하는 새해 벽두 휘호로 이희종 CU장은 손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가며 거침없이 썼다. 가슴으로 와 닿았다. 산전의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 그래. 내가 그걸 도와 드리자. ’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기회다. 이제부터다.

 

이듬해 3사 통합작업이 마무리되고 다음 단계인 < BEST 21 > 혁신활동을 추진할 때 < BEST 21 >의 정신이 되었다. < 본때를 보여주자 >. < BEST Song >에 이 구절을 노래 가사에 넣었다.(59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