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무 아리랑

오솔 2021. 9. 28. 05:40

 

32.

 

 

최종보고 패키지는 새벽까지 나오지 않았다. 에이플랜 팀은 모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강명철이 대외비 자료 배포 일련번호를 써넣은 시간이 10 시 무렵이었다. 트윈타워 구내 식당에서 점심식사는 건너뛰었다.

 

 

(1993년) 11월 8일, 오후 3시. 본사 회의실. <에이플랜 프로젝트 스티어링 커미티> 보고회가 시작되었다.

 

 

<사업 활성화를 향한 신체제 확립을 위하여-제 1차 중간보고>라는 제목의 두툼한 보고서 두 권이 경영회의 멤버들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시퍼런 표지와 자료의 부피가 위압감을 더해 주었다.

 

경영회의 멤버는 모두 13명이다. 각 사업부장, 공장장, 에이플랜 팀에서 14명, 매킨지에서는 매킨지 일본 본사의 지구사 이사가 참석해 모두 6 명, 회장실은 남용 상무를 비롯하여 4 명 등 40여 명이 자리를 잡았다.

 

보조의자까지 들여와 넓은 회의실이 사뭇 좁았다. 첫 보고회다운 열기를 뿜어냈다. 호기심과 긴장감 속에 엄숙함마저 배어났다.

 

 

 

 

 

 

 

에이플랜 팀의 첫 작업으로 < 12개 주요사업의 활성화 > 프로세스에서 9월부터 12월 말까지 일정이다. 오늘은 1차 중간보고로서 < 12개 사업의 진단 >을 통해 전략적 과제를 파악하는 단계다. 92년 매출 9,486억 원의 86%를 12개의 사업이 차지했고 이익은 100% 여기서 나왔다.

 

거의 두 달 동안 각 사업부장, 실무 부 과장을 대상으로 한 워크샵과 고객의 모니터, 경영회의 멤버들의 개별면담, 사장들의 개별면담이 진행되었다. 별도로 중복사업에 대한 전략적 방향 설정을 위해 워크샵도 병행했다. 동시다발의 만만치 않은 작업에 회사 전체는 그야말로 요란했다.

 

 

 

나는 프리젠테이션 스틱을 들고 스크린이 있는 앞쪽으로 나갔다. 조명이 꺼졌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OHP가 켜져 있는데다 브라인더 커튼이 쳐진 창밖에서 빛이 새어들었다. 장내의 시선이 나한테 모아졌다.

 

 

“ 산전CU는 95년 1월의 산전, 계전, 기전 3개 법인의 합병을 앞두고 신체제의 원활한 이행과 비약적인 성장을 실현하기 위해 8월 30일에 사업활성화 프로젝트(이하는 ‘에이플랜’)를 시작하였습니다.

에이플랜의 목적은 단지 산전CU내 중복사업을 정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으로 전체의 사업을 활성화시켜 수익력을 강화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본 프로젝트는 먼저 전체의 사업구조를 재점검하고 각 사업의 요건과 과제를 명확히 함으로서 실질적인 수익력 강화의 기초를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주요 활동은 각 사업의 핵심 요소를 추출하고 이를 골격으로 CU의 새로운 비전을 정의함으로써 신생 산전CU의 장래상과 체제를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에이플랜 팀은 2개월간, 각 사업의 현상과 전략요건 등 전체의 사업구조를 파악하였습니다. 특히 년간 매출액 200억 원 이상의 12개 사업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을 진행하여 왔습니다.

 

오늘은 12개 사업의 전략요건과 과제, 해결의 방향성에 대해 검토한 결과와 향후 조직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사항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산전CU 전체의 현상과 과제에 대해 인식을 같이하는 第一步로서 12개 사업에 대하여 기탄없는 의견과 토의를 요망합니다. “

 

 

에이플랜 보고에서 ‘첫머리에’로 시작하는 통상적인 서론이었다.

 

 

 

이어 본론에 들어갔다. 맨 먼저 <송배전기기 사업> 중에서 범전기기 사업영역이었다.

 

“ 산전CU는 세계수준의 경쟁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상태로는 수년 내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산전CU 전체로서도 커다란 대미지를 입을 수 있습니다. ”

 

이어 나는 기종 수, 차단용량, 용적 등 기종과 성능에서 우리의 수준과 미쓰비시, 아남, 현대의 제품을 비교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 보시다시피 미쓰비시에 비해 기종 수는 60%, 차단용량은 절반 수준, 용적은 130% 크기입니다. 품질은 떨어지고 덩치 만 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유저 들도 상황에 따라 메이커를 교체하겠다가 20%, 당연히 교체하겠다가 30%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 제품에 대한 로열티는 줄어가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는 95년으로 예측되는 수입선 다변화 해제 후에 일어날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값은 싸게 치고 들어올 것입니다.

범전기기는 <엘리베이터 사업> 다음으로 산전의 수익원인데 이 사업의 붕괴는 바로 산전 전체의 위기입니다. “

 

 

 

개발, 설계인력 인원수 비교, 물류 시스템 등 특약점망의 현황과 고객의 불만 등 현상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현장 중심의 구체적인 자료이기에 생동감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마쳐야 한다는 의무감에 나도 모르게 짓눌려 있었다. 많은 분량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진행할수록 장표를 너무 많이 준비했다는 압박감에 호흡이 가빠졌다.

 

평소같으면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프로젝터에 내가 직접 쉬트를 올리고 내리고 했으나 오늘은 예외로 ‘OHP 운전사‘를 두었다. 시간절약 때문이었다.

‘OHP 운전사‘는 한 장의 설명이 끝나면 재빨리 바꿔 올려놓았다. 갈수록 운전사도 숙달이 되어 덩달아 빨랐다. 회의실에 모인 참석자들의 열기가 겹쳤다.

 

 

초반에 뒤쳐졌던 시간을 어느 정도 만회하였다. 가끔 청중의 반응을 살폈으나 나의 눈에는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이희종 CU장이 가끔 메모를 하는 모습만 보였다. 질문이 있더라도 토의시간에 해줄 것을 서두에 미리 부탁을 했기 때문에 질문도 없었다. 일사천리로 마음이 급했다.

 

 

 

한 시간이 가까워올 무렵이었다. 뒷줄에 앉아있던 후지모토가 슬쩍 손을 들어서 손목시계를 톡톡 쳤다. 잠깐 쉬자는 사인이었다. 10 분간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한 시간에 109매를 소화했다. <송배전기기 사업>, <빌딩제어시스템 사업>, <계량기기 사업>, <자판기 사업>, <쇼 케이스 사업>, 그리고 <전동공구 사업>으로 이번 보고에서 시책 방향과 구체책이 명확화 되어있는 사업들이었다.

 

 

 

아카바와 후지모토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 김 이사님의 설명이 너무 빠릅니다. 내용의 전달이 어렵습니다..... 저가 뒷부분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후지모토가 조심스레 나의 의중을 타진했다. 근심어린 얼굴 표정으로 보아 매킨지 멤버들끼리 먼저 상의를 한 모양이었다.

 

“ ..................... ”

 

내가 머뭇거리자 옆에 서있던 아카바가 말했다.

 

“ 매킨지에서 나머지는 진행하겠습니다. ”

 

아카바는 직설적이었다. 나는 마치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멍청해졌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이 상황을 돌파를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우왕좌왕 할 때가 아니었다.

중간에 프레젠테이션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면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전체 분량은 OHP 쉬트로 173매다. 남은 건 80 매였다.

 

“ 내가 마칠테니 걱정하지마소. ”

 

나는 아카바에게 말했다. 그들은 멋쩍게 물러섰다.

 

 

 

 

 

 

 

 

 

 

 

10여 분의 중간휴식의 장내를 정리하고 후반부에 돌입했다. '시책방향이 명확화되어 있는 사업'인 <자동화시스템 사업>과 <공정제어사업>, '시책방향을 검토 중인 사업'으로서 <엘리베이터 사업>과 <PLC 사업>이 남았다.

 

“ 설명이 다소 빠르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미흡한 부분은 나중 토의시간에 부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

 

나는 양해를 구하면서 여유를 찾으려고 노력을 했다. 무언가 만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전반과 달리 생략할 건 생략하고 중간 중간을 건너뛰면서 전부를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보고를 계속하는 동안 CU장이 부지런히 메모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 CU가 통합이 되면 삼성이 신규로 엘리베이터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수한 이천전기를 발판으로 도시바와의 관계를 활용하는 기술제휴의 카드를 쓸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점이 통합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경쟁사와 비교해서 실력 차가 거의 없는 현 단계에서 적어도 삼성의 진입을 용이하게 하거나 촉진할 우려가 있습니다. 도시바뿐만 아니고 미쓰비시, 히타치, 그리고 쉰들러도 삼성의 제휴대상으로 봐야될 겁니다. ”

 

이중칠 산기 본부장이 한마디 부연 설명이 있었다. 오늘 보고에서 첫 발언이었다.

 

 

“ 통합을 계기로 일부 이탈하는 인재들이 유출될 가능성도 있어. 그러면 쉽고 빠르게 인재를 확보할 수도 있겠지. 삼성이 진입하면 삼성건설이라는 캡티브 물량에다 기존의 가격 질서가 혼란을 일으킬 것이 뻔해. 사업부에서는 앞으로 면밀하게 동향을 검토해야 할거야. ”

 

 

이희종 CU장이 말했다. CU장과 이 전무가 나에게 한숨 돌릴 틈을 주었다. 중간 중간에 생략하면서 말하는 속도는 조절이 되었다. 훨씬 나아졌다. 듣는 사람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보고회는 이미 두 시간을 지났다. 

 

 

 

 

 

168번째 OHP 쉬트가 올려졌다. ‘ 조직의 문제점과 배경 ’은 오늘 1차 중간보고에서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12개 주요사업의 진단결과에서 조직에 깔려있는 문제점을 요약했다.

 

 

“ 첫째, 산업기기 특성에 대한 접근입니다. 고객에게 ‘Hard'가 아니고 ’Function'을 판다고 하는 인식이 없습니다. 리피트 오더( Repeat Order )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당기 실적 위주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보다는 목표 수치 만 부여합니다. 단순한 일과 생각나는 일 만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셋째, 전략 의식의 부족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곳에 있는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선행 투자는 구호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구조적인 요인으로 두 가지를 요약했습니다.

 

‘Maker'가 아니고 ’Foundry'가 되어 설계도에서 나타나지 않는 부가가치를 체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제안력, 제조 스킬, 서비스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업을 생각하는 Time Horizon 즉, 시간축이 매우 짧습니다. ‘오직 외길’의 사람이 없습니다. 사업부장의 재임 기간이 짧고 단기 평가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

 

 

앞으로 신조직과 조직운영에서 반영해야 할 과제였다.

 

 

‘Hard'가 아니고 ’Function‘.

 

’Foundry'가 아니라 ‘Maker'.

 

 

산전의 문화를 바꾸는데 모티브가 될 키워드였다. 에이플랜 팀에서 많은 토의가 있었다. 앞으로 <조직과 조직운영 룰>을 만드는 과정에 반영해야 할 파라다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에이플랜에서는 ‘가설’ 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팩트(Fact)를 통해 결론을 확실하게 증명하기 전에는 일단 ‘가설’이고 ‘잠정’이었다.

 

 

이 세 가지 공통적 문제에 대한 두 가지의 구조적 요인과 과제는 두 달 동안 수많은 팩트와 가설을 거쳐 에이플랜 팀이 추출한 결론이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배경이 있었다.

 

 

 

나는 하희조 부장으로 하여금 산전CU에 있어서 ’조직상에 깔린 과제 ’를 체계적으로 수렴해보도록 제안을 했었다. 회장실 V-추진본부에서 파견된 하 부장에게 맡긴 이유는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한 시각으로 분석해달라는 뜻이었다. 그 과정에 뜻밖의 복병에 부딪쳤다.

 

이 작업은 12개 <주요 사업의 진단>과 병행하였다. 사장 1명, 사업본부장 2명, 관리본부장, 연구소장 그리고 사업부장 15명을 인터뷰를 했다. 산전, 계전, 기전 3사의 부장 26명, 과장 28명을 대상으로 워크샵을 각각 실시했다. < 프리 인터뷰 >와 < 조직통합에 대한 불안과 불만 >의 자료도 참고가 되었다.

 

두 방향으로 정리를 했다. 하나는 부문별로 스타일/가치관, 전략, 조직구조, 경영관리 룰, 인재/스킬 측면의 분석이었다. 다른 하나는 주요 사업별로 사업의 특성과 KFS, 이에 따른 산전CU의 현상, 그리고 과제를 추출했다.

 

이것을 ‘조직상의 과제’로 종합하였다. 타인에 의존심을 불식시키고 사업에 집착과 사업가 의식을 확립, 콤팩트한 사업 책임단위를 설정하고, 책임과 룰을 철저히 준수하며, 기본 스킬의 장기적 육성 등 네 가지로 정리가 되었다.

 

스티어링 커미티인 공식 보고회와 별도로 경영회의에 두 번에 걸쳐 상정하여 토의했었다.

 

 

 

‘당신이 우리 조직을 얼마나 알아.’ 하는 분위기에 눌렸다. 현상은 그대로 현상. 좋은 측면을 가려지고 부정적인 내용들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중과부적의 반론이 일었다.

내가 두어 번 보조설명을 곁들였으나 한번 터진 봇물은 여러 갈래서 좌충우돌했다. 이희종 CU장도 듣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몇가지 보완하여 분석해보라는 정도에서 종결되었다.

 

 

하 부장이 울상이 될 정도로 곤욕을 치렀다. 갸날픈 외모에 심지가 다소 유약해 보이는 하 부장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펼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진단과 평가에서 보고자의 자신감과 뚝심은 필수적이다.

 

 

‘ 조직의 문제점과 배경 ’이라는 이런 내용일수록 접근이 겸허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편 에이플랜이 가는 길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남았다.

회장실에서 파견되어온 하 부장에 대한 선입견과 산전에 남아있는 회장실이라는 존재와 어떤 상관관계일가 하는 대목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이 한 장의 보고 장표에도 이런 배경과 경과와 느낌이 숨어있었다.

 

 

 

 

 

173매가 마지막이다.

 

“ Next Step은 오늘 보고에서 부족한 엘리베이터 사업과 PLC 사업의 기본 방향을 계속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연구개발, 설계, 생산, 영업, 설치, 보수, 물류 등의 사업의 횡적 기능의 실태와 문제를 파악하고 중복사업의 통합을 위한 워크샵을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보고내용 중에 당장 실행에 옮겨질 수 시책은 빠른 조치를 부탁합니다. 에이플랜 팀에서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내용에 토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예정된 두 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경영회의 멤버들은 말이 없었다.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회의실은 갑자기 정적에 쌓였다.

 

 

이희종 CU장의 일성을 기다렸다. 마무리 토의는 CU장의 몫이었다.

 

“ 모두들 장시간 보고를 들었는데 각자 돌아가면서 한마디 씩 해봐요. ”

 

 

앞 줄 왼편에 먼저 시선을 주었다. 김회수 기전 사장이었다.

 

“ 에이플랜 팀에서 짧은 기간 동안에 핵심을 잘 정리했네요. 보고의 내용대로 품질, A/S 등 주요과제에 대해서는 여기에 있는 경영층이 나서야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다음은 최호현 연구소장이 말했다.

 

“ 범전기기의 통합부터 가능한 한 빨리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체 기술력의 확보가 중요합니다. PLC의 경우는 연구소에서 글로벌 PLC를 94년도에 개발을 완료할 예정인데 이를 고려하면 TA는 미쓰비시로 일원화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오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 앞으로 조직 설계 시에는 R&D, 설계, 신제품 개발을 총괄하는 CTO의 설치를 고려해 보십시오. ”

 

산전CU에서 처음으로 CTO(Chief Technology Officer)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중칠 산기사업 본부장이 말했다.

 

“ 사업의 중요도는 외형만이 아닌 향후의 장래성도 감안이 되어야죠. 특히 자동화 시스템사업의 경우는 아이템이 너무 많아 아이템 각각의 중요성이 약간 소홀하게 취급된 감이 있네요. 향후 이런 보고 땐 그때그때 질문하고 토의하는 것으로 진행을 부탁합니다. ”

 

 

경영회의 멤버 몇 분은 발언이 없이 건너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구정길 시스템사업 본부장이 말했다.

 

“ 그동안 각 사업별 이슈들이 잘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失機하지 않도록 적극 추진하도록 하지요. ”

 

 

이희종 CU장에게 차례가 넘어왔다. 내가 보고를 하는 중에 OHP의 간접 조명에 의지해 열심히 메모했던 내용이 궁금했다.

 

“ 오늘 에이플랜에서 발표한 내용은 바로 우리 산전의 실상입니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 사업 내부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잘 요약했습니다.

다 잘 알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창피스럽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부분을 이렇게 들추어낼 것까지 있느냐 하는 생각도 들 겁니다.

 

여기에 있는 각사 사장들 얼굴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기전의 김 사장, 계전의 성 사장, 하니웰의 권 사장, 모두 불편한 심기 이해합니다.

오늘 에이플랜 팀이 정리를 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현장의 실무자들이 협조를 잘 했습니다. 주위의 눈치 안보고 스스로 아픈 곳을 잘 드러내주었습니다.

 

돌아가서 에이플랜에서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도록 했느냐고 야단치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윗사람이 야단을 치면 칠수록 문제는 감추어집니다.

문제의 근원을 다 같이 차근차근 해결해 간다는 자세가 없이 야단부터 쳐버리면 문제의 본질은 영원히 개선이 안 됩니다.“

 

 

‘사장들의 불편한 심기’를 이희종 CU장이 집어낸 대목은 172 페이지 바로 이 부분이라는 걸 미루어 짐작했다.

 

“ 고객에 대한 업무를 개선하려는 체제는 있습니까? “

 

나는 강조하는 의미로 반문을 했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몇 가지 반문을 이어갔다.

 

 

‘ 생산기술을 제고하고 축적하기 위한 조직체제는 있는가? ’

‘ A/S 부문에서 사업부장 이상으로 승진한 사람이 있는가? ’

‘ 엘리베이터, 송배전 사업 분야 외의 사업부문에서 처음부터 성장해 임원이 된 사람이 있는가.?

‘ 장래의 이익에 연결되는 사항, 예를 들면 고객 만족도를 평가하기 위한 체제가 있는가? ’

 

 

반문조의 질문이 오늘 보고의 사실상 결론이었다. 각 사의 사장들은 그동안 아무 일도 안한 것 처럼 들리는 대목이다. 그만큼 묵은 테마였다. 나나 듣는 분들이나 피차 곤혹스러웠다. Next Step에서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희종 CU장이 분위기를 바꿔주었다. CU장의 말이 이어졌다.

 

“ 이제 현상 파악 단계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도출하는 단계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중요하듯 우리 산전의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업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개선해야할 문제가 있다면 우리 모두 달라들어서 이를 바로 잡는 겁니다. 해결방안을 도출해주기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결국은 실천입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실천이 가능한 일은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깁시다. 알면서도 나중에 보면 그대로 일 때가 많습니다. 개선을 못하는 이유는 실천의지입니다.

 

참석자 여러분들은 오늘 이 보고서를 가져가서 천천히 음미하십시오. 오늘 바로 이 자료에서부터 산전이 새로 출발하는 겁니다.

보고 내용을 읽어보고 12월에 있을 최종보고 시에는 좋은 결론이 나도록 공부해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판기 사업부에서는 주류의 자판기 판매금지가 법률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건지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

 

 

 

이것으로 예정했던 두 시간을 훌쩍 넘겨 세 시간이 지났다. 첫 보고회는 종결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이희종 CU장은 무언가 미진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CU장이 말했다.

 

 

“ 두 달이 안되는 짧은 시간에 참으로 고생 했어. 이만한 분량의 작업을 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야. 에이플랜 팀에게 수고를 했다는 말밖에 다른 말이 없습니다. 우리 박수 한번 칩시다. “

 

 

이희종 CU장은 뒷줄에 배석해 있던 에이플랜 팀을 모두 일으켜 세웠다.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 실은, 현업 라인에서 더 고생했습니다. 영업부서는 물론 특히 공장 현장에서 협조가 컸습니다. ”

 

내가 CU장을 거들었다. 사업부 현장 실무자들에 대한 격려가 빠졌기 때문이다.

 

" 그렇군. 돌아가서 사업부장들이 나대신 격려를 해주세요. “

 

 

 

 

 

 

 

 

 

“ 김 이사니무, 수고하셔슴무니다. ”

 

에이플랜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후지모토가 말했다. 더듬거리는 한국말이었다.

 

내 머리에는 173이라는 숫자만 아롱거렸다. OHP 173매. 생각할수록 아찔했다. 쓴웃음이 나왔다. 

 

 

 

지난 일주일은 전쟁터였다. 박수는 받았으나 지칠대로 지쳤다. 에이플랜 팀은 회의실에 모두 모여앉았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뒤에 찾아오는 허탈과 정막이 감돌았다.

 

“ OHP 매수를 줄이고 단순화해야 했어. 더 간추려야 했어... ”

 

혼잣말처럼 먼저 내가 운을 뗐다.

 

“ ................... ”

 

후지모토는 손으로 머리를 툭툭 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첫 보고서에 들어있는 에이플랜 팀의 정성과 열의는 석류알처럼 영롱했다.(32화 끝)

 

 

 

 

 

Wow! Big jobs and big challenges! And let's give A-Team a big hand! I can't imagine all those pressure and stress coming from executives as well as managers. Needless to mention deadline pressure.
2000년 넘어서면서 보고문서 형식은 크게 바뀐듯 합니다. 검토, 예정 등 교과서적인 학위논문 문구 같은 수식어는 배제되고 통계화가 기초된 돌직구 같은 간단하고 실무적인 보고 문서로 변경 되었지요. 예를 들어 168번째 시트 조직의 문제점과 배경은 어떤 조직에서도 해당되는 일반적 내용은 요즘 안쓰는거 같습니다. 실록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