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높고 높은 하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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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찬송가 해설

2007. 12. 29.



 


높고 높은 하늘이라

(Mother's Love)

  (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

해설 : 오소운 목사

 



 

이 노래는《어린이 찬송가, 1953》99장에 발표된 이후 선풍적인 인기리에 애창되어, 마침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채택된 노래로서 윤춘병 목사 작사다.

 

윤춘병(尹春炳, 1918~2010) 목사는 평남 중화에서 태어났다. 평양 요한학교․중앙신하교 등을 거쳐 감리교 목사가 되었고 감독으로 은퇴하였다. 1980년 어린이 찬송가 역사자료를 수집하는 나에게 윤춘병 목사님은 이 노래에 대한 추억담이 실린 잡지1)를 오려서 나에게 보내주셨다. 그 쪽지에서 인용한다.


  ― 8 15 해방을 맞은 그 해로 나는 월남을 했다. 서울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건만 친구 하나 없는 나에겐 허허벌판과 같았다. 군중 속의 외로운 존재였다.

  나는 마침내 영양실조에다 과로로 인해 병석에 눕고 말았다. 간호해 주는 이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약 한 첩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병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다. 조용한 방에 혼자 누웠노라면 기슴을 깎는 고독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작사자 윤춘병 감독님                    

 

  누구 하나 따뜻하게 찾아주는 이 없는 나의 외로운 병상. 잠들면 꿈속에서 고향 길을 헤매었고 깨어나면 생각 속에 고향 길을 오고 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향 길을 오가노라 나의 마음은 창 밖으로 흐르는 구름을 따라 38선을 넘나들었다.

  내가 38선을 넘어오던 날이었다. 마을 뒤 읍으로 가는 큰 길 가에는 행인들이 쉬어 가는 늙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소나무 밑에까지 따라 오신 어머님은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시며 「인제 가면 언제 오는 거냐」 목 메인 소리를 남기고는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 아들의 뒤를 지켜보시던 모습이 병상에 누운 내 눈에 어른거렸다.

  (어머님께서 내가 병들어 누운 것을 아시면 얼마나 애타 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창밖에 흐르는 흰 구름을 따라 고향 하늘을 더듬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했다. 그러나 그 하늘보다 더 높고 더 푸른 건 어머님 사랑. 어머님 은혜야말로 하늘처럼 넓고 하늘처럼 다정했다. 나는 그 때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을 하지만

   나는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하고 쓴 것이 「어머니의 은혜」라는 노래다. 그것이 1946년 4월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 38년 동안이나 어머니의 노래를 불러오건만 어머님 뵈올 길은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1) <크리스챤라이프>1980 5월호(?), 41쪽. 「作詞의 뒤안길」 어머니와 어린이를 위한 페이지.



한편 박재훈 목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ㅡ 매해 어머니날이 되면 한국교회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미 「어머님 은혜」는… 1946년에 윤춘병 감독님이 서울에서 작사하고 내가 작곡한 노래다. 1938년 내가 평양 요한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윤형은 장수철 형과 함께 3학년이었다(중략). 해방 후… 남하하여 살던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의 형님 박재봉 목사께서 한강 건너 흑석동에 살고 있었기에 나의 안내로 우리는 형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둘이서 전차를 타고 노량진 쪽으로 가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던 중, 5월의 어머니 주일2)이 다가오므로 어머니의 은혜를 담은 노래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2) 우리나라에서 「어머니 주일」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1930년 구세군에서 시작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어머니 주일의 정신을 일반 대중에게도 전한다는 의미에서 1955년 5월 8일(주일)을 「어머니 날」로 제정․공포하였다. 그런데 남자들이 「왜 아버지 날은 없는가」 농담을 하자, 여자들은 「364일이 아버지 날 아니냐」 라고 대꾸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1960년 어머니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개칭하였고, 1974년에 이르러 정부에서 어머니 날을 「어버이 날」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전차에서 내려 흑석동 고개를 넘으면서 어느 양지바른 곳에 이르러서 잠깐 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윤형이 무엇인가 종이에 긁적긁적하더니 “이게 노래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어머님 은혜」이다.3)


3)  [내 마음 작은 갈릴리] : 박재훈 지음, 서울 성실문화사, 2002. 41-42쪽.

 

 

                                 

                                                  작곡자 박재운 목사

 

 

 

 


작곡자 박재훈(朴在勳, 1922~ ) 목사는 1922년 강원도에서 박창숙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으로 가서 요한학교에 입학, 장수철, 윤춘병 등과 함께 1943년 3회로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곧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훈련소에서 도망쳐 귀국, 평남 강서군 문동국민학교의 교사로 교편을 잡은 그는 이유선(李宥善, 1911-2005) 교수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946년 4월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에 있는 금양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6년 그 동안 작곡한 동요들을 모아《일맥동요집》을 출판하였다. 일맥(一麥)이란「한 알의 밀알」을 뜻하는 그의 아호이다. 그는 대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긴 후, 야간으로 새로 설립된 중앙신학교에 입학 제1회로 졸업하였다. 6・25 사변 때에는 해군 정훈음악대에 복무하였다. 전쟁 후에는 기독교방송 음악과장, 영락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일하였다. 1955년 그는「박재훈 동요작곡집」을 기독교아동문화사 (대표 안성진 목사) 에서 출판하였다. 국판 45쪽에 31곡이 수록되어 있다. 1959년 미국에 유학간 그는 웨스트민스터합창대학, 크리스천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하여 한국찬송가위원회 간사로 있으며 음악전문위원으로서《개편 찬송가, 1967》편집을 도왔다. 장수철이 세상을 뜬 후 그의 후임자가 되어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북미 지역을 순회 연주하기도 하였다. 1965년부터는 숭전대학, 장로회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 서라벌예술대학, 한양대학교음악대학, 서울대학교음악대학 등의 강사로 출강하였다. 1982년 회갑을 넘긴 그는 미주 한인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4년 토론토에 큰빛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1990년 정년 은퇴하였다.


 


이 찬송은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데, 가장 귀한 3절을 삭제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결론적인 3절을 모른다. 그 3절은 다음과 같다.


<3절>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 올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이 3절을 빼고 배워서 그런가…?

목이 메도록 고마운 어머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식들이

자꾸 늘어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