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의 찬양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한국은 동방의 이스라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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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2018. 1. 24.

 

 

한국은 동방의 이스라엘인가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BC 2333년에 고조선을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청동기 문명시대인 BC 1000년경에 고조선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철기문명기 차이나의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고 한사군을 설치함으로써 우리민족은 식민지생활을 했고, 고구려에게 낙랑군이 멸망당할 때까지 400여 년 간이나 차이나의 식민지생활을 했다.

 

 

우리의 역사 왜곡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 되었다.

 

 

단군신화를 조작하여 마치 이 민족이 곰의 자손인 것처럼 천대한 것이 바로 차이나사람이었고, 그렇게 왜곡된 역사가

일본인들에 의해 또다시 왜곡되어 우리의 뿌리는 영영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시각이다.

 

 

삼한시대의 사람들이 섬으로 건너가 일본 원주민이 되고, 그 후 가야, 백제가 멸망하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늘의 일본을 형성하였으며, 따라서 일본인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이 학설은 대체로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오래 전에 KBS 일요 스페셜 팀이 제작한 <황금나라의 비밀, 신라 황남대총>방송 녹화 테이프를 본 적이 있다.

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가설을 제시했다.

 

이하는 동 자료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너무도 흡사한 유대인과 한국인의 풍습 

 

1973년 7월 6일, 신라의 고도(古都)인 경주시내 한가운데 있는 대릉원에서 출토된 유물의 기원을 찾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 다큐멘터리 <황금나라의 비밀, 신라 황남대총> 신라의 금관부터가 일찍이 유래가 없었던 것으로, 그 기원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유라시아 샤먼들과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알타이 공화국의 우코크 평원에서 발견된 무덤이 신라초기 돌연 출연한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동일하며, 출토된 유물의 대다수가 당시 지중해와 흑해연안에서 사용하던 것과 동일함을 실물과 비교,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앞 바다에 있는 사이프러스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신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그것은 완전히 똑같은데,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쓰던 물건들이 똑같다는 것은 생활양식도 그러하다는 것. 먼저 가장 보수적인 전통 중에 하나인 무덤 양식이 똑같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積石, 즉 그들도 우리도 돌담을 쌓은 것이다.

 

 

이스라엘 북부나 중부 일부에 사는 일부 종족들은 아직도 돌담으로 지은 집에 살며, 제사를 지낼 때도 마찬가지로 돌 제단을 쌓는다. 예전엔 우리나라에서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단(壇)을 쌓았으며(강화도 마니산의 첨성단), 제단 앞에서는 잔을 세 번 돌린 후 제상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사 방식뿐 아니라 특히 유대인들의 장례방식은 우리와 너무도 흡사하다.

가령 상주들이 베옷을 입고 베로 건을 만들어 쓴 뒤 향을 피우며 대나무를 짚고 곡을 한다든가(창37:34, 대상21:16), 곡을 할 때는‘아이고 아이고’라고 한다는 것 등이 그러하다.

 

 

가까운 일본이나 차이나도 이런 식으로 장례를 지내지는 않는다. 인류사를 통틀어 사람이 죽었을 때, 베옷 입고 곡을 하는 민족은 오직 한민족과 이스라엘 민족뿐인 것이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은 우리와 같은 농경법과 농구(보습, 쟁기, 도리깨 등)로 농사지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부삽, 부집게, 숟가락, 놋그릇을 사용(왕하 25:14)하며, 매운 음식과 부추 그리고 아주 깊고 맑은 물에서만 사는 향어(일명 이스라엘 잉어) 등을 즐겨 먹었다.

 

 

이렇듯 한국과 이스라엘은 수천 년 동안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공유해오고 있다. 그러므로 유물이 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동짓날의 팥죽과 유월절의 희생양

 

동짓날만 되면 우리 조상들은 팥죽을 쑤어 각 방의 문설주를 비롯, 장독과 헛간 등에 뿌리곤 했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기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일종의 신앙적인 행사가 성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출애굽기(12:6, 23)에는 모세의 말을 듣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는 모두 살고, 그렇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장자는 모두 죽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선 양의 피를 바르면 ‘死者’ 귀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후로 한반도까지 건너온 이스라엘 단 지파의 자손들에게도 이 관습이 그대로 남아 동짓날 팥죽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양이 많던 애굽이나 이스라엘에 비해 한반도에서는 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양의 피와 비슷한 색깔인 ‘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먹는 것은 단순한 절기음식이 아닌‘유월절 행사’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사 지낼 때 고사떡을 반드시 팥으로 하는 것도 팥의 색깔이 양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3500년이란 전통을 가진 이스라엘의 명절이다. 즉, 모세가 애굽에서 식민지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파라오 앞에서 행했던 열 재앙의 하나인 장자가 죽는 마지막 재앙 때에 양의 붉은 피를 바른 문설주는 죽음의 천사가 건너 넘어가서(pass over)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7월 14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일주일간 지킨다.

특히 첫날 밤엔 모든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출애굽의 역사를 재현하는 거대한 민족적 축제로 밤을 새운다.

 

 

무엇보다 유월절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희생양’을 바치던 제사의식.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 유월절 희생제사 의식을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름 아닌 그리심 산의 사마리아 유대인 즉 사마리탄(Samaritan) 종족이다. 이들은 현재 이스라엘의 ‘나불루스’ 라는 곳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곳은 주로 아랍인들이 사는 사마리아 지방의 한 부락이다.

 

유대인과 한국인이 흰 옷을 즐겨 입는 이유

 

유월절이 되면 사마리탄 남자들은 모두 흰 두루마기를 입고 그리심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많은 수의 양을 잡아 제사를 올린다. 그리고 그 양의 피를 모든 사마리탄 종족의 얼굴과 흰 두루마기에 묻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기도를 드린다. 먼저 성경을 읽은 다음 번제를 드리는데 이 의식이 그들을 성화시키며 이를 통해 속죄함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흰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은 마치 조선시대의 선비를 연상시키는데, 사마리탄 종족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이 이 유월절만은 반드시 ‘흰 옷’을 입는다. 흔히 우리 민족이 흰 옷을 즐겨 입는다 하여 ‘백의 민족’이라 일컫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흰 옷은 노동복이 아니라 예복이었다. 구약성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이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갈 때 입었던 예복도 바로 세마포 모시옷 명주옷(레 16:4)이었으니, 예법을 중시했던 우리 민족 또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처럼 흰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예절을 갖추었던 것이다.

 

 

 

2천년 전 유대인 풍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베두인족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유목·천막생활을 하는 종족들이 있다. 그 중 베두인족은 고대 유대민족의 전통과 풍습을 가장 많이 지키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인류학자들은 주로 그들의 생활과 의식을 통해 유대민족의 전통과 풍습을 고증하고 있다.

 

베두인족은 결혼할 때 서약식을 한 후, 신부의 부모가 사는 천막 근처에 임시로 초당을 짓고 3일 동안 신방을 꾸민다. 이때 이 초당의 주위에 ‘양의 피’를 뿌려 축복을 기원한다. 귀신을 쫓기 위함이다.

 

 

하지만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신부의 부모가 사는 근처에 양의 피를 뿌릴 수는 없었고, 다만 양의 피를 상징하는 빨간색으로 신부의 온 몸을 치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처녀 때는 빨간 댕기를 하고 결혼할 때에는 빨간 치마에 빨간 끝동과 옷고름이 달린 저고리를 입고서 얼굴에 빨갛게 연지곤지까지 찍었던 것도 일종의 ‘死者’ 귀신을 쫓기 위한 풍습이라는 것이다.

 

 

최남선은 이러한 연지풍속이 고려 때 원나라에서 들어왔다고 하였으나 고구려의 여인들도 즐겨 찍었다. 5-6세기의 쌍 기둥 및 수산리 무덤의 여인들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베두인족들은 남녀유별과 남존여비사상도 유별나서 우리 여인네들처럼 누구나 아들 낳기를 고대한다.

그래서 아이를 못 낳거나 딸만 낳으면 이혼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인 셈이다.

처녀들은 예전의 조선시대 처녀들처럼 머리를 길게 따 늘어뜨리고 다니는데 그러다가 결혼하면 대개 머리를 틀어 위에 얹는다. 그리고 여인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간다든가 외출 시에 얼굴을 가리는 모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한민족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

 

흔히 한국인의 두뇌가 우수함을 보고 사방 사람들은 ‘동방의 유대인(Orient Jew)’이라고 한다. 그런데 70년도 미국 하버드대학교 인류학자들은 한국인이 가장 머리가 뛰어난 민족이며 그 다음이 유대인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1950년 1월경 모 일간지에는 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는 유대인 인류학 박사의 기사가 실렸다. 그의 말들 들어 보자.

 

 

“나는 각 나라 민족 별로 골상의 형태를 오랫동안 연구하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그의 얼굴이나 유골을 보면 쉽게 어떤 계통의 민족인지 알 수 있다. 나는 2년 반 정도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무덤의 유골을 보아 왔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한국인들이 한결 같이 나와 같은 유대민족 골격에 골상을 하고 있었다.”

 

 

동아 백과사전에서도 한국인의 골격 구조와 골상이 ‘고대 유대인’의 골상과 동일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골상뿐 아니라 외모상으로 보아도 원래 유대인은 한국인들처럼 황인종(창 9:25)이며 머리카락이 검고 키가 작았다(민 13:32-33).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城)을 쳐들어가려고 정탐꾼을 보냈을 때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곳 사람들은 키가 장대 같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라’ 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국인이 현재의 유대인들보다 순수 이스라엘 혈통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2천년 동안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역경과 시련으로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려 성경상의 유대인들과는 거리가 먼, 노란 머리카락에 키 큰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한민족과 마찬가지로 시련과 고난 속에서 협동의 지혜를 배워 체질화함으로써 모든 생활면에서 이를 활용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특유의 농촌 취락인 <키부츠>나 협동 농촌인 <모샤브>이다. 그것은 일종의 우리네 두레나 품앗이, 마을계의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대개의 유럽이나 미주지역 사람들에겐 <키부츠> 나 <계>가 형성되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형성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우리에게는 오히려 사라지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반만년

 

수 년 전, 미국 시카고에서 성서언어학(수메르어)을 연구하는 강신택 박사가 ‘단군이 수메르인’이라고 주장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켜 B.C. 3천-2천 년까지 융성했었던 수메르족이 아케디언족에 의해 멸망당하자 농사법과 무기 등 선진문명을 갖고 약 B.C. 1천년 경, 한반도에 들어와 세운 나라가 바로 <조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군이 수메르인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는 반만년인 셈이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라는 세계 최초의 문명을 이뤘던 수메르족의 말을 20년간 연구하면서 이 같은 가설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메르어의 어순은 주어, 목적어, 동사 순으로 우리말과 문장 형식이 똑같고 조사로 쓰이는 ‘-로’는 ra(라)로, ‘-에서’는 es(에스)로 각각 비슷하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히브리어에 절대적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수메르어라는 사실이다.

 

 

언어는 곧 지배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히브리 민족의 근원이 수메르족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도 메소포타미아 남부(갈대아)에 위치한 <우르>가 아닌가. 그도 수메르인인 것이다.  

 

수메르국과 우르국에서 단군에게 특산물을 바치다

 

고려 때 행촌 이 암 선생이 전한 <단군세기>에는 위의 사실에 대해 부연설명하고 있다.

 

<단군세기>는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가까지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단군은 1세 단군이다.

 

 

제 15세 단제 때의 기록을 보자.

 

❶신시2년(기원전 1660년) 대홍수가 나서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➋겨울 10월에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❸가을 7월에는 우루국 사람 20여명이 투항해 오니,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단군세기를 비롯 북부여기, 태백일사 ․ 삼성기 ․ 단기고사 등의‘한단고기(桓檀古記)’들은 사학계에서는 소위 이단시 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고대사에 있어서 정통으로 취급되고 있는 사서들의 ‘곰이 사람을 낳았다’는 식보다는 훨씬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의 재위 년도 등을 따져봤을 때 부분적으로 시기가 맞지 않거나 연도계산이 틀린 것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등장하는 사건들이 있다. 이를테면 위의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양운국, 수밀이국, 우루국은 모두 한인(桓人)시대의 한국(桓國) 12연방 가운데 하나로서 특히 수밀이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족의 나라로 추측된다. 그리고 우루국 역시 서남아시아의 <우르국> 또는 성경에 나오는 <갈대아 우르국>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단군의 지배영역이다.

아마도 전후 상황으로 보건대 통치영역이 지나칠 정도로 넓었거나 아니면 한반도에 정착하기 이전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단군의 첫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이 어디인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흑해나 지중해 연안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루국> 사람이 투항해오자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했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염수(소금물처럼 짠 호수)가 바로 사해(死海)는 아닌지......

 

 

 

수메르어에서 차이나어까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라고 하면 우리나라 전역을 일컫는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는 그 전역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한다. 레바논 동북지방에 위치한 단(Dan)은 단(Dan)지파가 가나안 땅에 쳐들어가기 위해 200년간을 싸우는 동안 점령하고 있던 땅으로 원래는 <라이쉬>였다고 한다(삿18:29).그 후 또다시 레센도 점령하여 <단>이란 지명으로 고쳐 불렀는데(수19:47), 이처럼 단 지파는 이동하여 정착하는 곳마다 단이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단 지파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동시에 기원전 10세기경 성서에서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최근 학자들은 그 후 단 지파의 경로에 대해 가나안 소라(Zolar) →레바논 동부지방(지금의 시리아)→ 이라크(일부는 터키로 감)→ 이란 →차이나 북부 알타이 산맥 →몽골 →만주(일부는 시베리아로 감)→압록강→대동강 변 도착(고조선 건국), 한반도라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우랄 알타이 산맥에서는 100년간 정착함으로써 거기서 자란 2세들은 아예 히브리 말을 잊어버리고 알타이 말만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사에서 우리 민족을 우랄 알타이어족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일본어에 지천으로 널린 뜻 모르는 단어의 어원이 우리나라의 고어가 많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뜻 모르고 쓰는 대부분의 언어도 몽골어를 비롯한 외래어들이 많다. 가령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으레 <야호>라고 외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도 쓰이고 있는 몽골어다. 컴퓨터와 전화가 없던 시절, 장거리를 단번에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산 꼭대기에서 저 산 꼭대기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야호∼, 가도 되느냐> 라고.

 

 

비록 민족의 대이동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을지언정 언어의 생명력은 아직도 남아 단 지파의 이동경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수메르어에 뿌리를 두고 다음으로 히브리어, 몽골어, 차이나어가 남아 있는 것이다. 나중에 영향을 받은 것일수록 많이 남아 있는 법, 그렇다면 과연 히브리어는 어디에 남아 있을까?

 

 

고대 히브리 문자가 씌어진 와당(瓦當)과 단군지석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과 광주 박물관에는 아주 희귀한 고조선시대 와당(瓦當)이 소장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일본인 이우찌 이사오(井 功, 1911-1992)씨도 이를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1988년에 한국에서 소장품을 전시한 바 있으며 국립 중앙 박물관에 고구려 수막새 기와 및 일본의 기와 류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것들은 대동강변에서 출토된 것인데 놀랍게도 고대(古代)히브리 문자가 씌어 있다. 그 내용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다.

 

잠언을 가르치는 사사가 통치한다.

오엽화와 협력하여 하니님의 나라에 들어가라.

도착했다.

성도가 모여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회복된다. 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대략 B.C. 1천년 경에 사용했던 것으로 그 당시의 것에서 약간 진보된 것도 있다.

이 문자는 야곱의 12지파만이 사용한 것인데 그 문자의 사용시기가 성경상에서 갑자기 사라진 단 지파의 소멸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조선 시대의 와당이며 대동강변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대 히브리 문자가 적혀 있다.

 

    

 

 

 

 

 

 

 

 

 

            

 

 

 

                            

 

 

     

             

 

 

   

 

 

대동강뿐 아니라 백두산에도 히브리어가 씌어 있다.

 

일제치하 고정록 선생에 의해 발견된 ‘단군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11년경 일본인들이 백두산에서 벌목하다가 뜻을 알 수 없는 글이 씌어 있는 지석(誌石)을 발견, 의주에 있는 평북 도청에 옮겨 놓았는데, 그 지석에 음각된 글이 한글도 아니고 한자도 아니어서 아무도 해독하는 사람이 없어 모두들 궁금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당시 의주 천주교당에 와 있었던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가 그 지석의 글을 판독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이 글자는 ‘히브리’문자이며 내용은 ‘단군지석’인데 판독해보니 제작연대는 약 3천년 전이라고.

 

그런데 비단 이런 유물들뿐 아니라 아직도 우리말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가 있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로 애비, 애미, 애기 등이다. 이것은 히브리어와 발음뿐 아니라 의미까지 같다. 그리고 장례를 치를 때 ‘아이고 아이고’하고 곡을 한다든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남아있는 ‘고수레’ 등의 용어가 그러하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의 ‘단(dan :‘심판자’라는 의미)’부터가 사실은 히브리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로 된 이름을 가진 자가 히브리어를 썼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는 우지 마노르 이스라엘 대사의 말을 통해 본 양 민족의 유사성을 보자."겉은 딱딱해도 속은 따뜻 - 한국 · 이스라엘 꼭 닮아"

오는 7일 한국을 떠나는 우지 마노르(62, 사진) 이스라엘 대사의 표정에 석별의 느낌이라고는 없었다.  대사관 집무실을 찾아가 ‘마지막 인터뷰…’ 라며 말문을 열자,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1970년 처음 영사로 왔을 때 4년을 근무했고, 이번에도 4년을 채웠습니다. 1974년 8월 한국을 떠날 때 아내에게 말했어요. ‘이봐 너무 좋지 않아? 언젠가는 꼭 다시 와야겠어’ 라고 말입니다.”

그로부터 27년 후 주한대사를 자원했고 2001년 9월 다시 서울 땅을 밟았다. 하지만 한국과의 첫 인연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원 시절 국제관계를 공부하는데 전공이 동북아 지역이었지요.”

그는 한국이 이스라엘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이스라엘은 고대왕국 시절 12개 부족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유럽 · 아시아 · 아프리카 등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하나의 부족만 어디로 이동했는지가 미스터리예요. 그 ‘사라진 부족’(lost tribe)의 성이 단(Dan)인데, 고조선의 시조가 단군 아닙니까. 재미있죠?”

그는 보아의 노래와 판소리를 즐겨듣고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원조’ 한류 매니아다. 그래도 노래방에 갈 기회가 있으면 히브리송을 주로 부른다고 했다. 대표곡은 ‘하바 나길라’― ‘행복해집시다’란 뜻이다.

 

“한국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그러자 그는 준비라도 해둔 듯 “혹시 ‘사브라’(Sabra)란 단어를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갔다.

 

“토박이 이스라엘인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원래 사브라는 선인장의 일종인데, 겉은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가 나있지만 그 열매는 아주 달콤합니다. 이스라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 환경 때문에 겉으로는 대하기가 쉽지 않지만 속은 아주 친절하고 따뜻하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브라로 담근 술을 한 병 건넸다. 한 모금 삼켜보니 과연, 초콜릿 오렌지 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bkjeon@chosun.com 전병근 기자

 

출처 : [칼라이더스코프] '한국 속의 세계' 를 들여다본다

 

 

한국어는 대개 우랄알타이어족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히브리어가 씌어진 와당이 출토되었다.

그것도 단군이 고조선을 설립한 대동강유역에서. 한민족이 히브리어를 사용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알타이 산맥부근에 살기 이전, 한민족은 이스라엘에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가나안으로부터 멀고도 먼 한반도로의 이주. 한민족의 꽃인 무궁화도 그 원산지가 시리아가 아닌가.

어쩌면 한민족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