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가요 이야기

나이스가이 2009. 8. 30. 19:16

  

 

 

 

추모의 글 -가수 장세정

 

                                                                                                         권 두영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박영호 作詩/김송규 作曲>

 

 

아마도 인생의 반고개를 넘어선 나이가 된 사람들이면 위의 노래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를 처절한 투쟁과 탄압의 역사로 물들여야 했던 일제시대, 1937년 2월에 나온 신인가수 장세정(張世貞)의 노래 '연락선은 떠난다'는 식민지 조선의 피폐했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노래로서 길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였는가. 그녀의 노래가 아직까지 우리의 귓전에 살아 숨쉬는데에도 불구하고 장세정은 그 멀고 멀다는 하늘길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그녀는 본디 1921년생 평양사람으로 부친은 독립운동을 하는 민족투사의 일원이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조부모의 손에서 키워진 그녀는 가수로 발탁 될 무렵 평양 화신백화점의 악기상 점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미 이전부터 노래 잘하는 소녀로 평양내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실력을 확인하고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콜롬비아 레코드였다. 중간에서 친고모의 주선으로 콜롬비아와 사전의 교류가 있긴 하였으나, 정작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오케레코드.
그야말로 당시 초호화 진영으로 전국을 누비며 공연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던 오케레코드의 일행이 그 즈음에 평양에 당도한 것이다. 때마침 간판 여가수인 이난영이 산후조리의 이유로 출연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객이 절감한 상황에서 장세정의 등장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은 얼른 장세정을 수소문하여 전속계약을 우선 맺어놓았다.
하지만 홍보에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던 이철사장은 당장 녹음을 시키지 않고, 콩쿨대회의 형식을 빌어 장세정이란 이름 석자를 보다 확실하게 알리고저 계획을 짰던 것이다.
계획에 따라 콩쿨대회가 진행되었고, 1등에는 역시나 장세정이 당선이 되었다(2등에는 송달협이 당선되었다) 이로서 장세정이라는 신인가수의 등장을 화려하고 또 보다 확실하게 알린 셈이 된 것이다.

오케레코드의 2월 특별신보에서 내놓은 그녀의 데뷔곡 '연락선은 떠난다'는 단연 기록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연락선은 지옥선'이라고 불릴만큼 민족수난의 상징이었던 관부연락선을 소재로 한 이 '연락선은 떠난다'가 당시 대중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으로는 한동안 이난영 특유의 음색에 길들여져 있던 가요팬들이 장세정이라는 신인 여가수의 음성에서 이난영과 흡사하면서도 코 끝에 톡톡 걸리는 풋풋한 그녀의 창법이 큰 호응을 얻었으리라 짐작된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 노래를 결국에는 흐느끼면서 불렀다고 하니 그 감정의 이입이 더 이상 적절할 수가 없었다.  

워낙에 하루아침에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 그녀라서 혹자는 장세정을 '가요계의 신데렐라'라고들 하였는데. 그 해에 '아시나요', '불망의 글자' 등의 노래를 유행시키면서 기반을 더욱 굳게 다져간 장세정은 1938년 '토라진 눈물', '남장미인', '처녀야곡' 등의 노래가 인기를 끌 무렵에는 이미 당대의 톱가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김정구, 타사(他社)의 채규엽, 박향림, 황금심, 박단마등과 함께 가요계 제일선(第一線)의 대인기 스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9년 2월에 나온 '항구의 무명초'는 그녀의 또다른 대표곡으로서 '항구'를 소재로 한 노래들중에서도 잊지않고 불리워 지는 불멸의 작품이다.


울기도 안타까운 부두 위에서
사랑이 무엇인가 가는 님 잡고 몸부림을 칩니다
태징소리 울리고 떠나가는 연락선
끊어지는 테프만이 야속합니다

<조명암 作詩/엄재근 作曲>

'연락선은 떠난다'가 장세정의 이미지송처럼 굳혀질 무렵, 또 다른 연락선 노래는 세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2년전인 1937년보다 훨씬 원숙해진 창법으로 무게있는 블루스풍의 이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1940년 들어서 2월에 '장세정 걸작집'을 발매하고, 여전한 그녀의 인기를 실감케 하였으며 '비 젖은 치맛자락', '잘있거라 단발령', '북경은 좋아요'등의 인기곡들이 계속 나오면서 여전히 무대의 중심에서 머물렀다. 특히나 '잘있거라 단발령'은 그 운치있고 깔끔한 곡조와 고음부분에서 장세정의 가창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한 많은 단발령에 검은 머리 풀어쥐고
한 없이 울고간다 한 없이 울고간다
아- 정든님아 잘 있거라

<조명암 作詩/김해송 作曲>

이 무렵의 오케레코드는 보다 막강해진 정예멤버를 중심으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등 삼국(三國)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으로 절찬을 받고 있었다.
이철사장의 기획력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그룹결성에 손을 뻗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국가요계 최초의 여성그룹 '저고리 시스터즈'에서 그녀는 이난영, 서봉희, 홍청자, 김능자, 이준희, 왕숙랑, 박향림등과 함께 다채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한국의 고전음악에서 일본의 나니와부시(浪花節), 때로는 서양의 재즈음악과 팝송에까지 놀라운 음악성을 선보이면서 최고의 자리에서 머물렀다. 이난영, 박향림, 장세정. 이 세명의 여가수는 당시 오케레코드의 톱클래스 여성가수였다.

1940년대의 그녀가 데뷔시절보다 훌륭하고 풍부한 발성을 할수 있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기 연예인에게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스캔들은 인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장 이철과의 스캔들은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이철의 아이까지 잉태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묵과하려 이철은 일본의 성악가 하라노부꼬(原信子)에게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비록 표면적인 이유이긴 했지만, 어쨌든 성악가의 지도아래 쌓은 발성법은 그녀의 음악인생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박시춘 '나의 이력서' 참고)


'역마차'등으로 일제말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장세정은 해방 후에 보다 원숙한 중견가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김해송 주도의 케이피케이 악극단에서의 활약은 지금의 상식으로서는 대중음악인들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해송, 이난영, 윤부길, 신카나리아등과 호흡을 맞추어 수준있는 오페라 가극을 선보였던 것이다. 성악발성법을 수련한 것이 그 기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즈음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울어라 은방울'은 민족적 환희, '광복'을 노래한 최초의 작품으로서 '해방된 역마차'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찾아가는 서울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조명암 作詩/김해송 作曲>

경쾌한 폴카의 이 노래가 만인의 애창곡으로 대유행 할 무렵, 그녀는 밴드마스터 한두식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남편과 함께 '블랙 아이즈 탱고밴드'를 결성하고 악기점 및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등 계속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장세정에게 6.25는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편도 잃고, 재산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명성과 인기. 그리고 천부적인 노래에 대한 재능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 장기를 백분 발휘하여 극장무대를 전전하며 여전한 인기를 누렸다.
대구의 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는 '즐거운 목장', '샌프란시스코', '고향초'등의 또 다른 힛트곡들이 쏟아져 나왔다.


널따란 밀짚모자 옆으로 쓰고
휘파람 불며불며 양떼를 몰고
포플러 그늘에 앉아쉬며 종달새는 비비배배
노래를 불러라 불러라 젊은이의 노래를
저 멀리 산마루에 타오르는 흰구름도 춤을 추느냐

<나경숙 作詩/박시춘 作曲>


한가롭고 나른한 목장 오후의 풍경을 노래한 밝은 이 노래는 전시(戰時)에 각박해진 사람들의 가슴을
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휴전 후 여타의 다른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레코드 취입 및 공연활동을 병행하면서 중견가수로서의 역량을 한껏 과시했던 그녀에게 고혈압이라는 뜻하지 않은 병이 찾아온 것은 1970년대 초의 일. 또 그녀의 인기곡의 대부분이 월북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금지조치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뜻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으로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노래를 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청춘의 열정으로 노래하는 젊은 인기스타일수도 없었다.

자식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의 노래를 아쉬워 한 재미교포들은 1978년 '장세정 은퇴공연'을 손수 개최해주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을 이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아 주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그녀는 거동조차 불편하여 주위의 안타까움만을 샀다.

병세의 악화와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장세정의 이름이 서서히 잊혀질 때 쯤. 우리는 그녀의 비보(悲報)를 전해 들은 것이다.

눈 앞이 캄캄하다. 조선과 일본, 중국을 누비며 놀라운 실력을 과시했던 가요계의 영원한 신데렐라 장세정도 이제는 흑백사진속 추억의 인물로만 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머릿속을 찌른다.
팬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봐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실이 가슴쓰릴 따름이며, 노래속에서는 언제나 열일곱살 1937년의 소녀인 장세정의 목소리를 들을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울컥거린다.
건강하게 노후를 보내다가 이 세상을 떠난것이면 차라리 기쁘련만, 식물인간의 상태로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또 자신을 사랑해준 팬들의 제대로 된 보답도 받지 못한채 눈 감은 것을 생각하면 오로지 목이 메어올 뿐이다.

이제 밤하늘에선 '장세정'이란 이름을 가진 별 하나가 새로 생겨나 유난히 반짝일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이난영, 남인수, 김정구, 박향림, 이화자, 이인권, 황금심이란 이름을 가진 별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못다했던 얘기들을 구구절절이 풀어놓을테지.
그저 명복을 빌 뿐이다.
편안히 보내드릴 밖에.

 

 

 

'연락선은 떠난다'의 가수 장세정씨 별세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른 가수 장세정(張世貞)씨가 2003년 2월 16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1921년 평양에서 출생한 고인은 36년 가수로 데뷔해 46년 KPK 악극단 배우가 된 뒤 뮤지컬 ‘카르멘’ ‘춘희’ 등에 출연했다.김정구씨와 듀엣으로 부른 ‘만약에 100만원이 생긴다면’을 비롯해 ‘처녀야곡’ ‘역마차’ ‘고향초’ 등 800여곡을 불렀다. 73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현지에서 교포 위문공연 활동을 펼쳤다. 유족은 한영(62) 한웅(59) 한세란(56) 한성(54)씨 등 3남1녀. 유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포레스트론 공원묘지에 안장된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 사무실에 빈소를 마련했으며 21일 정오에 이곳에서 추모식을 갖는다. 02-3445-6031
(동아닷컴자료)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