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과 역사가 만나면..

레이니썬 2013. 4. 16. 03:11

바이블의 진술을 보면 무법자같은 행동으로 안티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다윗왕과 그 집안의 아름다운 일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다윗이 산적떼 두목 정도되는 무법자였기 때문이며, 다윗의 왕국이라는 것도 예루살렘에 산채를 마련한 산적떼가 주변지역에서 보호비 명목으로 삥을 뜯는 수준으로 왕국이라 말하기에는 조악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인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의 책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 시대의 고원지대 물질문화는 단순한 수준이었다. 그 지역에는 농촌지대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문물을 갖춘 왕국의 기능발휘에 필요한 광범한 문자 보급의 흔적이나 기록문서, 비문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인구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인들의 인구 구성은 단일민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통일된 문화나 중앙집권 국가의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예루살렘 북쪽 지방은 인구가 상당히 조밀했던 데에 비해서 미래에 유다 왕국의 중심을 이루게 되는 예루살렘 남쪽 지방은 아직도 인구가 희박했다. 예루살렘 자체는 기껏해야 전형적인 고원 지방의 농촌 마을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 이상을 말할 수 없다.
이스라엘 인들의 후기 정착단계 추정인구는 기원전 10세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구 추정을 토대로 여러가지 역사적으로 가능한 사실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산간지방에 살았던 대략 4만 5,000명의 전체 주민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이 북부의 여러 마을에 거주했다. 따라서 남부의 예루살렘과 헤브론 및 유다의 대략 20개의 작은 마을에 흩어져 살았던 주민의 수는 대략 5,000명이 었다. 그밖에 유목생활을 계속한 몇 개 인구 집단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처럼 규모가 작고 고립된 사회의 주민들이, 독립된 왕조를 세워 예루살렘을 400년 동안 다스린 다윗과 같은 뛰어난 지도자에 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10세기에 다윗 가문의 통치는 제국의 순으로 확장되지 않았으며 궁전이 있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고 웅장한 수도 역시 없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실존했으며 그들에 관한 전설이 계속되었다는 것 외에는 고고학적으로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175쪽-----


다윗과 솔로몬의 시기로 추정되는 BCE 10C의 유다지역(다윗은 유다지파이지요)의 인구가 5,000명 밖에 되지 않았으며, 바이블에서 집요하게 숫자를 나열해가면서 황금시대였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는 바이블이 얼마나 심하게 과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는 길에 바이블을 살짝 조롱하면,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열왕기상 10:26~27)


당시 이스라엘 전체 지역의 인구가 4만5천명이고 남유다 지역의 인구가 5천명이었는데 (다른 병사들을 제외하고) 마병이 만이천 명이고, 왕궁조차도 없던 시골 마을 수준의 예루살렘에 은이 돌처럼 발에 채였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솔로몬의 전설적인 하렘에 대한 바이블의 묘사를 보면,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열왕기상 11:3)


당시 예루살렘을 포함한 남유다 지역 전체의 인구가 5천명이니 여자가 2천5백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면, 남유다 지역 전체의 여자들 중 2~3명 중 한 명은 솔로몬의 후궁이었거나 첩이었다는 웃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발견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철기시대 유다는 성숙한 황금시대를 구가하지 못한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및 그 후대의 다윗 왕조 군주들은 변방지대의 외딴 농촌지방을 다스렸으며 그 당시 다윗 왕조가 대규모 부를 소유했거나 중앙집둥화된 행정체제를 갖추었다는 증거가 없다. 다윗 왕조가 전례 없는 번영의 시대로부터 갑자기 쇠퇴와 불운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점전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다윗과솔로몬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땅 안에 있었던 수많은 종교도시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예루살렘이 처음부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적 중심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280쪽-----


바이블은 솔로몬 시대에 황금기를 구가하였다가 우상숭배로 인해서 쫄딱 망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고학의 발굴 결과들은 오히려 초반기에 변방의 외딴 농촌지방 수준이었다가 점진적으로 발전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압디-헤바 왕조의 운명을 알지 못하며 후기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로 넘어갈 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각종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를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다.<중략>... 권력이 미약한 지배자가 예루살렘에서 주변 지역 주민에 대한 명목상의 통치를 했다.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다윗에 대해서는 밝혀진 내용이 거의 업다. 다만 압디-헤바를 위협한 천민집단인 아피루와 다윗을 두목으로 삼고 헤브론 산간지방과 유대 사막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무법자 집단 사이에 소름 끼칠 정도의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윗이 사무엘서에 설명된 것처럼 아피루식의 대담한 공격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으나 그가 세운 왕조는 분명히 지배계층의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부 고원지대의 기본적인 통치방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281~282쪽에서 발췌-----


압디-헤바 왕조는 다윗 왕조 이전에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던 왕조를 말하는데, 왕조라고 말하고 있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미약한 통치력만을 발휘하던 소규모 군벌수준으로 봐야하겠지요. 아무튼 다윗이 이들의 뒤를 이어서 세운 왕조 역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에 미약한 통치력만을 발휘하던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런 종류의 통치 형태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산간지대의 군벌이나 무법자 집단의 두목이 평야지대의 농민들과 상인들의 공물 및 충성서약을 받아내기 위해서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협박과 마피아식 보호를 약속하 는 양면전략을 상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는 직접적인 군사적 정복과 공식적인 관료체제 제도를 설치한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니라 산간지대의 군벌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저지대 말을에 일종의 안전보장을 약속하는 정도였다.
                                                   -----<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166~167쪽-----


결국 다윗의 왕국이라는 것은 다윗을 두목으로 하는 산적떼가 주변의 작은 농촌마을에 적당히 보호비를 받는 수준, 즉 동네 양아치가 동네입구 포장마차에 자릿세를 요구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다윗이 산적떼 두목이었으니, 협박해서 삥을 뜯어내기도 하고 남의 마누라를 강제로 뺏기도 하고 심지어는 부하의 아내를 뺏기도 하고...
애비가 이 꼴이니 자식들도 막장을 달리고..
이런 넘들이 만들어낸 신이니 야훼라는 놈도 천박하기 이를데 없고...
뭐.. 대충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보고 갑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