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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us Pond 2011. 6. 25. 23:41

 

 

 

악보 뒷면에 꼭꼭 눌러쓴 반세기 전 육아일기[중앙일보] 

박정희 할머니의 1남4녀 양육기
20세기 일상사로도 보물급 자료

 

전쟁과 피난으로 ‘별안간 늘은 식구들’ 이야기를 기록한 글과 그림. 셋째 딸 인애를 위해 쓴 육아일기의 한 대목이다. [걷는책 제공]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박정희 지음, 걷는책
272쪽, 2만8000원


“이토록 귀할 수가!”하는 감탄부터 나온다. 책장을 뒤적이는 내내 가슴 뭉클하다. 딸 넷, 아들 하나를 키우던 젊은 새댁이 반세기 전에 쓴 육아일기에 담긴, 평범하지만 위대한 스토리가 안겨주는 행복감 때문이다.

 기회에 책 만듦새도 칭찬해야 한다. 자녀별 육아일기 원본을 마치 영인본처럼 편집해 보물을 접하는 느낌을 살려낸 단행본의 맛 때문이다. 이 출판사가 ‘해방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사진집 『윤미네집』을 펴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저자인 박정희 할머니(89) 스토리는 이미 유명하다. 오래 전 여성지에 소개된 이래 TV로 선보였고, 책으로도 두 번 묶여 나왔다. 육아일기 원본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록원에 보존 중이다. 이걸 정갈하게 리메이크해 개인 소장이 가능하게 만든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가 주는 감동은 우선 엄마의 힘이다. “재줏덩이가 되어 달라고? 아니다. 늙은 후 나를 잘 위해 달라고? 아니다. … 이웃에 빛이 되는 사람이 되어다오.”

 첫딸을 낳은 스물세 살 새댁은 육아일기 머리말에서 그렇게 소망을 털어놓았다. 첫딸은 해방둥이였다. 8·15 이틀 전 평양에서 탄생했는데, 엄마는 이렇게 썼다. “너를 낳은 다음 날 일본은 망하고 우리는 꿈꾸는 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2년 뒤 의사 남편과 함께 3·8선을 넘어 경기도 인천의 친정으로 월남했는데, 그런 스토리도 곳곳에 배치했다. 하지만 아이가 크고 자라는 일상 묘사가 그 못지않게 값지다. 첫딸 이름(명애)를 지어준 건 할아버지. 물을 ‘뿜빠’라고 부르고, ‘딸래’(인형)을 좋아하던 딸아이의 성장과정, 돌잔치의 선물 목록까지 가족 스케치와 함께 52쪽에 담은 게 첫 육아일기였다. 교회 성가대 악보의 뒷면을 종이로 사용하고, 이불호청으로 표지를 해 책꼴을 갖췄는데, 특이한 건 그림일기를 겸한 점이다. 딸의 옷과 장난감 등이 그림책처럼 담겨있다. 펜 그림과 크레용으로 출발해 넷째 딸 이후 수채화로 변모했다. 사이사이의 손 글씨는 단 한 자도 날려 쓴 게 없으니 감탄이 절로 터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육아일기는 자녀가 한글을 깨칠 무렵 선물했다. 이 책을 더 값지게 만든 건 2부 ‘나의 가족 이야기’. 경성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여성이 평양의 가난뱅이 의사와 결혼한 스토리에서 3·8선을 넘는 생사를 건 모험, 그리고 인천의 평안의원을 개척한 이야기가 소담하다. 맏사위 권태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나의 장모님’, 그 집의 식구처럼 지냈던 백영서 연세대 교수가 쓴 ‘발간에 부쳐’등은 왜 이 기록이 보물인가를 새삼 보여준다.

 누가 이 책을 봐야 할까? 20세기 일상사로도 유감 없어 역사학자가 봐도 얻을 게 많으리라. 나이는 고하를 따질 게 없다. 박정희 할머니네 가족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하랴. 가족의 힘이 생각날 때면 누구라도 끌어안고 뒤적여볼 만하다. 하지만 이 책을 봐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결혼을 마냥 미루거나 혼인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이 그들이다. 그들에게 자녀 낳고 키우는 재미를 새삼 일깨워줄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