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yromance에서

Lotus Pond 2016. 9. 10. 07:01



총장 부인 유순택 여사 생애 첫 인터뷰





내 남편은 수험생..가장으로서 점수는 70점?
지금 보다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데 걱정..
나는 가방 싸는 사람..한 달에도 몇번씩 출장
여성 지위 향상, 자폐아 문제 관심 많아

어디 가서 누가 세계의 퍼스트 레이디 그러면 몸이 막 오그라 들어요.

그런 말 들을 자격이 안되는데..
뉴욕 맨해튼 이스트 허드슨 강변의 조용한 주택가인 서톤 플레이스.

지난 21일 유엔 총회에서 전폭적 지지 속에 5년 연임이 확정된

반기문 사무총장의 관저가 있는 곳이다.

촉촉한 이슬비가 내리던 관저 2층 응접실에 들어선

반 총장의 부인 유순택 여사는 온화하면서도 넉넉한 기품으로

기자를 맞았다.

"아이구 내가 이런 걸(인터뷰) 해 본 적이 없어서.."라고 서두를 꺼냈지만 조리 있는 말솜씨며 몸에 배인 겸양은 `부부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고등학교 때 만난 첫 사랑과 결혼에 골인해 올해로 40년째 동반자로 살아가는 노부부. 유 여사는 반 총장을 `우리 총장님', `총장', `그 양반' 등으로 호칭했다.

"이번 연임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국민들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말로 시작된 유 여사의 생애 첫 언론 인터뷰는 한 시간 가까이 진행 됐다.


=다음은 유 여사 일문 일답=
-- 반 총장께서 앞으로 5년을 더 유엔 사무총장으로 일하시게 됐다. 여사께서도 세계의 퍼스트 레이디 5년을 연장 받으신 셈이 됐고..

▲ 어디 가서 세계의 퍼스트 레이디 그러면 몸이 막 오그라 들고 그래요. 그런 자격이 안되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

--두 분이 모두 겸손과 소탈함이 몸에 밴 것 같다. 반 총장도 역대 어느 사무총장보다 탈권위적인 분으로 평가 받고 있지 않나.

▲ 그런 게 또 가끔 가다 문제가 되기도 하죠. 카리스마가 없다고 (웃음)
-- 연임이 확정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 2006년 10월 유엔본부에서 사무총장 수락연설할 때 지켜보면서 굉장히 감명 깊었는데 벌써 5년이 지났네요. 관저 수리 때문에 초기 10개월은 호텔 생활을 했고.. 그러고 보니 우리 총장님은 관저도 개보수하고 지금 유엔본부가 대규모 리모델링을 하고 있잖아요. 관저와 유엔본부를 모두 새로 꾸미는 첫 사무총장이네요.

37년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이사도 수십번 다녔고 짐을 참 많이 쌌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큰 짐은 아니지만 수도 없이 여행가방을 싸야 해요. 한 달에도 몇번씩 외국 출장을 가니까 가방 싸고 풀고 하는 것이 일이에요. 앞으로는 더 많이 싸야 할 것 같아요. 대개 7-8일 여행가면 4-5개국을 다녀오는데 가는 지역이 겨울인 곳도 있고 여름인 곳도 있고 하니 기후에 맞게 옷가지를 싸야 하고..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외국 여행 다니면서 보면 남편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한국을 예로 들어 어려운 나라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이번 연임 과정에서 많은 한국 분들이 마음으로 성원하고 도와줘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 가정에서 반 총장은 어떤 분이신지.

▲ 항상 공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에요. 아이들 어렸을때는 아이들과 시간 좀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불평도 했어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아빠가 항상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모델로 삼았던 것 같아요.

총장님은 성격이 자상한 편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이 문제가 있거나 하면 스스럼 없이 얘기도 하고 상의도 해 줬습니다.

-- 집에 들어오시면 어떻게 지내시나.

▲ 꼭 수험생 같이 생활합니다. 밤 12시쯤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 정도에 일어나요. 여러 자료들을 모두 검토하고 소화해 내지 않으면 안되니까. 꼼꼼히 읽고 정리하고 꼭 모범 수험생 같아요. 토.일요일에는 주로 외국 정상들 하고 통화하느라 거의 시간을 보내고.

지난번 (총회)연설에서도 그렇고 어디 가서도 그렇고 앞으로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그러는데 걱정돼요. 아니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웃음) 제발 좀 지금 같이만 한다고 하면 안되겠느냐고 그랬다니까요.

-- 유엔 사무총장이 아닌 가장으로서 점수를 주신다면
▲ 어려운 질문인데... 50점은 너무 박한 것 같고 70점 정도(웃음)
-- 세 자녀들을 교육하실 때 어려움은 없었는지.

▲ 저희 때는 세대가 달라서 아이들을 그렇게 푸시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잘 자라줘서 고맙지요.

-- 지난 4년 반 동안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속상했던 적은 언제인가.

▲ 총장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그냥.... 폄하하는 그런 기사를 보면 억울하고 속상했지요. (이 대목에서 유 여사는 잠시 비감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일부 서방 언론들은 반 총장 임기 중반 무렵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중국 인권 등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등의 비판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또 너무 일이 많으니까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또 행사에 갔다가 집에와서 쌓인 자료를 읽어야 하고.. 그럴 때는 `안됐다' 하는 생각도 들고, 건강을 지켜야 하는데 무리하지 말라는 말도 합니다.

-- 총장님은 일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하시던데
▲ 그렇죠. 보람을 느끼고 일에서 에너지도 받고 하니까.

-- 남편인 반 총장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는 언제였나.

▲ 2009년 1월 가자 전쟁때 셔틀 외교를 하면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직접 가자에 들어 가서 폭탄맞은 건물 앞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그때 연기 속에서 마이크도 없이 육성으로 연설한 것이 외국 방송에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고 집에 돌아왔는데 목이 완전히 잠겨서 말을 하기도 힘들어 하더라구요. 연기를 많이 마시고 큰 소리로 연설해서...

또 코트디부아르 사태때 외국정상들하고 수도 없이 통화하면서 결국 문제를 해결한 것도 기억에 남고 반대가 심했지만 4개 유엔 여성 기구를 합쳐서 `유엔 여성' 통합 기구를 출범시킨 것도 보람된 일로 꼽을 수 있겠죠.

-- 사무총장의 배우자로서 외국 출장 가실때 자주 동행 하시나.

▲ 재난 재해 지역이나 분쟁 지역 같은 곳은 비행기 편도 그렇고 해서 같이 못가지만 대부분은 함께 갑니다. 아프리카 지역 같은 곳 갈때 거의 따라갔어요. 에티오피아는 매년 가고, 카메룬, 브룬디, 말라위, 케냐 등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다녔어요. 그런 곳 가면 마치 한국전 끝난 직후의 상황을 보는 것 같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지역인데 그런 곳에서 보람을 갖고 일하는 유엔 직원들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 집니다.

처음 동반해 갔을 때는 박물관이나 쇼핑센터 같은 곳을 어레인지 해 넣더라구요. 그런데 현지 가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유엔에서 도와주는 여성 쉼터나 관련 기관, 병원 같은 곳을 방문하는 일정을 넣으라고 했죠. 제가 가는 게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그 사람들 한테 격려가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반 총장 외교 스타일을 `조용한 외교'라고들 말하는데.

▲ `조용한 외교' 그것은 좀.. 할 말을 안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그건 좀 아니다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 양반은 그냥 상대방 자존심 챙겨주면서 끈질기게 설득해서 좋은 결과 끌어내는 사람이에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하고 싶네요.

-- 여사의 내조 스타일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

▲ 내조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특별한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제 남편이 공직 생활을 오래 했으니 남편의 커리어에 해가 되지 않게 그렇게 조심하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죠.

다만 유엔에서는 192개국 대사들이 와 있고 그 부인들의 활동이 굉장히 활발합니다. 문화.자선 등 여러 행사가 많고 그런 행사에는 꼭 가려고 하고 그렇게 해 왔어요.

또 유엔에서 하는 여성이나 질병 등과 관련된 행사에 패널로 참석하기도 하고, 자폐아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요. 총회에 참석하는 정상 부인들하고도 매년 자폐아 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도 갖고 여러가지를 도와주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자폐증은 예전에는 숨겨놓고 그랬는데, 어릴 때 발견해서 치료하면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 자폐아에 대한 관심은 언제 부터 갖게 됐나.

▲ 저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봤고, 여기 유엔에 와서 첫 해에 정상 부인들 초청을 받아서 이 문제를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 한국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으시다면
▲ 세상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흔히 하지 않습니까. 지금 여성들의 역할 만큼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도 드물죠. 유엔은 물론이고 전세계 각지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총장님도 가능하면 여성을 많이 뽑으려고 하죠(웃음). 지금 유엔 고위직 가운데 여성 비율이 40%라고 들었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임기 중에 거주할 관저가 우리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듬뿍 담은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유엔에 따르면 이스트강을 바라보고 있는 맨해튼 57번가 \'서턴플레이스(Sutton Place)\'에 자리 잡고 있는 사무총장 관저에 대한 개보수작업이 예정보다 한 달 일찍 끝나 지난 주말 반 총장 가족이 입주했다. 사진은 관저 4층 오리엔탈룸의 모습.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뉴욕 관저

외국 손님 주로 묵는 게스트룸 장식장도 침대보도 한지로 만들어


미국 뉴욕 맨해튼 57번가에 자리 잡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관저엔 특별한 방이 두 개 있다. 4층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코리아룸과 게스트룸이다. 차 마시는 응접실인 코리아룸은 반 총장의 부인 유순택 여사가 직접 구상해 만들었다. 유 여사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홍익대 한도룡 명예교수가 디자인했다.


유순택 여사가 한지로만 꾸민 게스트룸으로 안내했다(왼쪽).

이스트강이 보이는 응접실의 창엔 한지창을 덧댔다.



유 여사는 “평소 세계 각국 유엔 대사 부인을 초대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한국을 잘 알릴까 고민하다
응접실을 한국식으로 꾸몄다”고 설명했다.
의자와 탁자는 못을 전혀 쓰지 않은 장인의 작품이다.
라디에이터와 샹들리에까지 의자와 똑같은 격자 모양 틀로 감쌌다.
벽난로가 있던 자리엔 쌀 뒤주를 가져다 막았다.
창문도 한지를 바른 전통 창틀로 바꿨다.
유 여사는 “세계 각국 유엔 대사 부인들이 오면
늘 이 방에서 차를 대접한다”며 “단순하면서도
기품 있는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게스트룸은 벽지·가구가 모두 한지로 만든 방이다.
침대보도 닥나무로 만든 한지다.
유 여사는 “종이로 침대보를 만들었다는 말에
많은 손님이 깜짝 놀란다”며
“침대보가 가벼우면서 보온과 통기성이 좋다”고 소개했다.
장식장도 한지로 만들었다.
창문엔 한지로 만든 커튼이 걸렸고
그 앞엔 한지를 바른 팔각형 창틀을 세워 놓았다.
창 너머론 맨해튼 동쪽을 흐르는
이스트강과 퀸스버러 다리가 보인다.
한지는 전주시가 후원했다.
방을 구경한 뒤 한지를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느냐는 문의도 많았다. 방문 옆 벽엔 자개로 만든 그림이 걸렸다.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가느다란 자개로 꽃을 그린 작품이다.
코리아룸이 방문부터 창틀까지 모두 한국식으로 장식했다면
게스트룸은 동양적 분위기와 서양식 생활문화를 조화시켰다.
온돌방보다는 침대가 서양인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맨해튼 미드타운 57번가 서튼플레이스에 있는
반 총장 관저는 원래 미국 은행가 존 피어몬트 모건의 딸
앤 모건이 살았던 집이다.
1972년 모건가가 이 집을 유엔에 기증한 뒤로
역대 유엔 사무총장 관저로 써왔다.
대지 1300㎡에 4층 건물인데 1·2층은 집무를 위한 공간이고
3·4층은 사저다. 반 총장은 2007년 취임하면서
한국 분위기가 물씬 나도록 집을 보수했다.
4층에 있는 코리아룸과 게스트룸 외에도 곳곳에
동양화나 병풍 혹은 도자기가 놓여 있다.
유 여사는 “총장 관저는 뉴욕시 문화재로 지정돼
마음대로 수리하기 어렵다”며 “그나마 사저로 쓰는
3·4층 정도만 손을 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VISTA 프로그램 참가 수기

외국소년들에게서 느끼고 생각한 일들

최근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충북 충주고 재학시절인 1962년 청소년적십자(당시 JRC, Junior Red Cross)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2년 7월 30일부터 8월 31일까지 미국적십자사와 국제적십자사연맹 공동주최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개최된 ‘청소년적십자국제대회’(Operation Vista in USA)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곽영훈(경기고), 신은주(경남여고), 정영애(경기여고) 등 4명도 함께 참가하여 청소년적십자활동 소개와 민속예술소개등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VISTA(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s To America) 프로그램에는 당시 43개국 117명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대회기간 중 백악관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등 학생대표들로서는 매우 보람있고 유익한 국제대회였다.
이번 호에서는 자랑스러운 청소년적십자의 동문인 반기문 장관이 1962년 적십자 비스타(VISTA)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돌아와 대학적십자 회지에 기고한 글을 싣는다. [편집실]


7월 30일 오후 3시 45분 김포국제공항을 경기고의 곽영훈군, 경기여고의 정영애양, 경남여고의 신은주양과 함께 떠났다. 생각하면 곧 하늘의 별이라도 따고 말 기분이었지만 한편 내 자신 어떻게 앞으로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일행이 맨 먼저 도착한 San Francisco에는 25개국에서 41명이 모였다. 서로 인사교환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곧 그룹을 나눴는데 우리 반은 캐나다, 칠레, 터키, 파나마, 인디아, 독일, 유고슬로비아, 뉴질랜드, 이탈리아, 한국으로 구성되었다.
San Francisco에서의 생활은 대개 시가지 구경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우리들은 세계에서 제일 긴 Golden Gate Bridge 라든가 Bay Bridge, Golden Gate Park 등 두루 여러 군데를 보았다.
특히 항상 안개에 쌓여있는 금문교는 아직도 그 웅장한 자태가 눈에 선하다.
San Francisco에서 3일간 머무른 다음 Marin County로 갔다. 나의 가족은 Robert. A. Patterson 이라는 중학교장님이었다. 맨 처음에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좀 난처하였다. 더구나 습관이 젖지 않았기 때문에「고맙다」는 인사를 한다든가 “Excuse me”라는 말도 여간해 나오지 않았다. 남의 어깨를 치고서도 먼저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난 뒤라야 “Excuse me”라는 말도 나왔다.
미국 가정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해변가로 소풍을 간다든가 또는 말을 타고 시간을 보낸다든가 무척 재미있는 생활이었다. 보통 그러한 일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하였다. 월요일 및 화요일은 직접 활동하는 날이다. 내가 택한 것은 국제관계 및 교육부 면이었다.
대개 미국청소년적십자 단원의 활동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Gift Box나 Chest-box 또는 Art Exchange 같은 것이 그들의 주요사업인 것 같았다. 말이 나왔으니 가장 감명 받았던 미국적십자의 사업을 이야기 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는 Blood Program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부터 적십자사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 사업이 미국에서는 무척 활발하였다. 피가 모자라는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자기 피를 제공하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한 지사의 병원에서 수십명이 자기의 피를 빼고 있는 거룩한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Henry Dunent이 Solferino 전쟁에서 발휘한 고귀한 인간애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는 Volunteer activity(봉사원의 활동)이다. 정말 Volunteer들에게는 무척 인상을 받았다. 자기의 일도 젖혀놓고서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씩 정신적 물질적으로 남을 돕는 것을 보고서 무척 그들에게 감사도 드리고 또 가장 고귀하게 보았다. 미국 내에는 무려 3,600개의 지사가 있는 데 그 지사마다 약 900명의 Volunteer가 있다니 그 수는 실로 2,3백만 명에 달할 것이다. 아마 미국적십자 사업 중의 90%가 봉사원의 손에 의해 되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미국인의 가정생활에 관해 말해 보려한다.
제일 좋았던 것은 그 사람들은 항상 명랑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호조건의 덕택이겠지만 그곳에선 인간으로서 대하는 것이다. 동양에서와 같이 어른은 아이들을 무조건 눌러버리는 그러한 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모든 사람사이에 항상 웃음의 꽃이 피고 좀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점이 있는 반면 나쁜 점도 없지 아니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좋게는 생각되지 않았음을 솔직히 말해둔다.
미국사회는 미국의 10대 청소년들에게 너무나 많은 자유를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나칠 정도를 생활을 enjoy하려고 한다든가 또는 부모와 자식사이에 의견이 맞지 아니할 때 부모가 간섭을 안 한다든가 하는 것은 서양미덕은 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동양도덕에는 없는 소리이다.
Marin County에서의 7일간 후에는 Oregon주의 Portland로 갔다. 거기서는 농장을 경영하는 John Barett 씨댁에서 머무렀다.
미국사람 및 그 외 대표들의 한국 인식부족에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전(辭典)이 있느냐 大學이 하나라도 있느냐 또는 남녀 date를 하느냐 하는 등등의 질문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Portland에서 우연한 기회에 인디안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네들의 독특한 복장에 고유의 춤과 노래는 진귀한 구경거리였었다.
Portland에서 7일간을 지낸 뒤 Washington주의 Spokane으로 갔다. 미국사람들의 생활은 자동차와 밀접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어하는 눈치다. 그래서 그런지 Drive-in Theater나 Drive-in Restaurant 가 많이 눈에 띈다. Drive이라는 것은 자동차를 몰고 극장이나 식당에 들어가서 자동차안에서 영화구경을 한다든가 음식을 먹는 아주 듣기에도 기이한 일들이다.
여하튼 자동차와 Television 냉장고는 미국인의 필수생활조건인 것 같다. 8월22일 Washington D.C.로 갔다. 거기서는 43개국의 117명의 대표들이 모였다. 진짜 우리의 생활은 Washington에서 재미있었다. 인종도 많이 모였지만 성질도 별의 별 인간이 다 모였다. 우리의 숙소는 가정대신 Wesley Theologial Seminar의 기숙사에서였다.
아침, 점심, 저녁 백여명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면 정말 가족과 같은 흐뭇한 마음이 들곤 했다. 한번은 international night를 열었다.
한국대표로서는 辛양이 부채춤을 추었는데 인기최고였었다고 자부한다. 어떻게나 감탄들을 했던지 모든 대표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또 郭군이 Vista Song을 지어 각국대표들이 같이 부르게 하여 일약 한국을 빛냈던 것이다. 월화요일은 토론이 있었는데 월요일은 Office of Volunteers, Office of Educational Relations, Safety and Disaster International Relations에서 2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화요일은 Agriculture, International Law, Religious Life, Education에서 2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내가 택한 것은 Office of Volunteers와 Office of Educational Relations와 Agriculture와 International Law였었다.
한국대표의 긍지를 가지고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무척 영광스러웠던 날은 Kennedy 대통령과 만난 날이었다. 먼저 백악관의 내실을 구경하고 11시에 만났다.
말이나 시진에서만 보던 Kennedy 대통령! 보기에도 묵직하게 생기신 분이었다. 2,3분 동안 연설을 하고나서는 여자들 몇 명과 악수를 하고 들어가셨다. 한번 악수를 해볼려고 노력하다가 헛수고만 한 생각을 하면 쓴 웃음을 금치 못하겠다.
저녁 7시부터 Bon Voyoge Dinner가 있었다. General Grunther의 연설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했다. 폐회식을 마치고 난 각국대표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섭섭한 눈물을 흘렸다. 모두다 형제자매와 같은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튿날 우리는 117명의 여러 대표들과 미국적십자관계의 여러분과 친절했던 미국인 친구 및 미국에 adieu를 고했던 것이다.

충주고등학교 3년 반 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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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스런 세계인의 대통령를 한국사회에서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