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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us Pond 2017. 9. 2. 04:50


1801년 11월 함께 유배길에 오른 정약전·약용 형제는 전남 나주에서 이별한다. 형은 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갔다. 약전은 다시 뭍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림은 흑산항에서 열두 굽이를 돌아 오른 상라산에서 내다본 풍경이다. 형제에게 저 바다는 건널 수 없는 바다였다. 안충기 기자-화가


다재다능한 다산 정약용은 시인의 풍모가 출중했다. 깊고 넓은 다산 사상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이른바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집대성됐으나 2500여 수나 되는 시로도 터져 나왔다.

『다산시 연구』(창비)를 펴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그의 시는 병든 현실에 대한 임상보고서이고

일표이서를 비롯한 기타 저작들은 그 처방전인 셈”이라며 다산의 시는 그의 실학사상과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시인 정약용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사회시(社會詩) 또는 민중시의 효시라 할 만하다.

사실성(寫實性)을 중시한 다산은 봉건 지주와 부패 관리 밑에서 굶주려 신음하는 농민의 찢긴 삶을 눈앞에 보일 듯 묘사했다.
 
“시냇가 헌 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체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집 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되겠네
 
개 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 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무너앉은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다산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 사실은 그의 ‘조선시(朝鮮詩) 선언’이다.

다산은 중화주의(中華主義)를 맹목으로 추종하는 지식인들 태도에 분노하며 “나는야 조선사람, 조선시 즐겨 쓰리

(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고 했다. 그의 주체적 문학관을 담은 시 ‘노인의 즐거움(老人一快事)’은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무조건 따르던 선비들을 향해 내리친 일종의 죽비다.
 
“늙은 사람 한 가지 유쾌한 일은
붓 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구태여 경병(競病)에 구속될 필요 없고
고치고 다듬느라 더딜 것 없어
흥이 나면 당장에 뜻을 실리고
뜻이 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야 조선사람
조선시 즐겨 쓰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오활하다 그 누가 비난하리오
 
구구한 그 격(格)과 율(律)을
먼 곳 사람 어떻게 알 수 있으랴
 
(…) 배와 귤은 그 맛이 각각 다른 것
입맛 따라 저 좋은 것 고르면 되지.”
 
송재소 교수는 “‘용산촌의 아전’ ‘파지촌의 아전’ ‘해남촌의 아전’ 등 관리들의 수탈을 소재로 한 일련의 시들에서

다산이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것은 우리나라 시문학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라고 설명한다.

조선 사회가 가진 복잡한 여러 관계 속에서의 하급관리들을 전형적으로 창조한 예는 일찍이 없었기에

“다산시는 리얼리즘의 위대한 구현으로 평가될 만하다”고 덧붙였다. 순수한 우리말 또는 토속적인 방언을 한자화해

시어로 쓴 점도 높이 샀다. 보릿고개를 맥령(麥嶺)으로, 높새바람을 고조풍(高鳥風)으로, 신부(新婦)의 방언인

아가를 아가(兒哥)로 바꿔 조선시 정신을 살렸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정치의 잘못을 일깨워 주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며 이렇게 일갈했다.

“최근 수십 년 이래로 한 가지 괴이한 논의가 있어 우리 문학을 아주 배척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우리나라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눈도 주지 않으려 하니 이야말로 병통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사대부 자제들이 우리나라의 옛일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의논했던 것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해도 그저 엉터리가 될 뿐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편역, 창비 펴냄, 42쪽)
 


다산 연구자들은 파탄에 빠진 나라 이곳저곳을 직접 관찰하며 참담해진 정약용 선생이 시를 쓰면서

그 우울함을 치료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20년 가까이 유배지에 갇혀 살았다면

우울증에 걸릴 법도 하다. 당시 조선 사회의 여러 모순을 시로 비판했던 다산은 부패한 세상에 분노하고,

자신의 큰 뜻을 펴지 못한 절망을 시로 달랬다.
 
“약은 놈 비단옷 찬란히 빛나는데 

못난 놈은 가난을 괴로워하네
 
커다란 강령이 이미 무너졌으니
만사가 막혀서 통하지 않네
 
한밤중에 책상 치고 벌떡 일어나
높은 하늘 우러러 길이길이 탄식하네.”
 
200여 년 전 다산은 ‘시 치료’로 자신의 우울증을 이겨 냄으로써 현대 예술 치료의 선구자가 된 셈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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