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맛과 멋

Lotus Pond 2018. 5. 27. 11:15




글자 하나, 마침표 하나에 들어 있는 세상

책 속으로

미국 잡지 ‘뉴요커’의 교열 여왕
최고 수준의 영어 지킴이 40년
교열은 삶의 모든 경험 집합체

뉴욕은 교열 중

뉴욕은 교열 중

뉴욕은 교열 중 
메리 노리스 지음 
김영준 옮김, 마음산책 
  
미국에는 트럼프도 있지만 ‘뉴요커(The New Yorker)’도 있다. 대통령의 영어 사용 능력은 의심스럽지만, 최고 수준의 영어문장을 추구하는 주간지도 있다는 얘기다. 1925년 창간된 뉴요커는 깐깐한 편집·교열로 악명 높다. 초짜 작가가 어설프게 단편소설을 게재하려다가는 원문을 건지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방어논리를 잘 세워 굳세게 버텨야 편집자들의 원고 난도질을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메리 노리스

메리 노리스

저자 메리 노리스(66·사진)는 그런 뉴요커 교열의 여왕 같은 존재다.

78년에 입사해 오직 뉴요커에만 있는 직책인 오케이어(OK’er)를 20년 넘게

맡고 있단다. 잡지 인쇄 전까지 편집자, 작가, 팩트체커, 보조 교정자와 함께 글을 질의·교정하고 관리하는 게 오케이어의 업무다. 그러니 단순 교열자가 아니다. 이제는 말하련다, 저자가 뉴요커 공장 내부를 투명하게 드러낸 게

책이다. 괴팍하기까지 한 저자의 교열벽(癖), 전설적인 교열 선배들의 추억, 필립 로스 같은 1급 작가를 마주쳤던 일, 웬만한 영문법 책 뺨치는

문법 설명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책은 이런 질문들을 품고 있다. 사람들은 왜 맞춤법에 신경을 쓰는 걸까.

바른 문장이 고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어휘가 태어나고 사라진다. 그에 따라 말에 대한 규범과 판단 또한 바뀐다.

이럴 때 뉴요커의 변하지 않는 교열원칙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노리스는 교열자에게는 실존적인 어려움도 있다고 소개한다.

눈에 거슬리는 문장을 어디까지 손봐야 하나. 과도한 간섭과

교열 태만 사이의 균형점은 어딘가. 
  

미국의 문예종합 주간지 ‘뉴요커’의 1976년 3월 29일 표지. 제목과 달리 뉴욕 바깥, 해외에서도 읽힌다. 지난해 구독자가 오히려 늘어나 매주 120만 부를 찍는다. [사진 마음산책]

미국의 문예종합 주간지 ‘뉴요커’의 1976년 3월 29일 표지. 제목과 달리 뉴욕 바깥, 해외에서도 읽힌다. 지난해 구독자가 오히려 늘어나 매주 120만 부를 찍는다. [사진 마음산책]

가령 “①온실 안의 찻잔 위로, 그녀의 기분이 우울해졌다”와 같은 문장을

문법적으로 명료하게 고치면 “②우리가 온실 안에서 차를 마시는 사이,

그녀의 기분이 우울해졌다”쯤이 된다. 현수분사(懸垂分詞, dangling participle)를 사용하느라 생략된 주어를 되살린 결과다. 하지만 문장 ②는

문장 ①에 비해 침울한 분위기가 덜하지 않으냐는 게 노리스의 생각이다.

①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고칠 수도 있고 그냥 둘 수도

있다. 정확한 문장과 감성이 풍부한 문장 가운데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글 쓰는 이들의 영원한 딜레마를 연상시킨다. 
  
교열 초년병 시절 삼엄한 분위기를 뚫고 영어 단어 ‘flower(꽃)’를

 ‘flour(밀가루)’로 고치도록 표시한 건 대성공이었다.

며칠 후 이런 감사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고맙습니다. 작가도 고마워합니다. 엘리너 굴드(전설적인 교열 선배)도

고마워합니다. 교정자도 고마워합니다. 팩트체커도 고마워합니다.

크리스마스 식품 목록에서 flower로 쓰인 flour를 잡아내서,

우리가 힘을 합해도 하지 못한 일을 해주셔서 우리 모두 고맙습니다.” 
  
담당 편집자가 보낸 글이다. 고맙습니다, 의 지루한 반복이 신기하게도

감정을 고조시킨다. 뉴요커 아닌 곳에서는 갈수록 만나기 힘든

아날로그 감성의 승리다. 
  
노리스는 교열자들이 한 편의 글을 마치 미사일 경로를 변경시키듯

자신의 방식으로 흘러가게 만들려 한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고 소개한다.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쓰라린 좌절을 겪고 i의 점과 t의 교차선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그런 지적에 대해 노리스는 교열 작업은 전인적이어서 좋다고 털어놓는다. “문법, 구두법, 어법, 외국어와 문학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삶의 갖가지

경험도 소용”된단다. 여행·원예·운송·노래·배관 수리·가톨릭·미국 중서부·

모차렐라·뉴욕 지하철·뉴저지 등이 갖가지 경험의 내용이다.

교열 작업을 통해 경험은 더 풍부해진다.

자신이 터득한 걸 전하고 싶어 쓴 게 이 책이다. 
  
책 앞머리에 이런 문장이 인쇄돼 있다. "구두점은 이를테면 점자다.

얕은 돋을새김처럼 문장의 지세에 강약을 부여한다.”

이런 미묘한 차이와 효과에 주목하는 교열의 예술에 관한 책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