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입력 2019.03.16. 19:39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에 싸움을 걸었다. 동기는 국면 전환이었다. 일본은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에서 중국군과 한민족 독립군한테 밀리고 있었다. 서쪽에서 발생한 이런 난관을 타개하고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동쪽 미국과
새로운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민족·중국과의 전쟁은 물론, 미국과의 태평양전쟁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 105만 대군이 중국대륙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1945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8월 6일·9일)와 소련의 대일선전포고(8월 8일)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일본은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이 동아시아 전쟁에 연루되는 이런 상황은, 무장 독립투사들에게는 탐탁치 않은 일이었다.
두 대국을 응원군으로 얻은 것은 다행이지만, 만만치 않은 이해관계자들을 추가로 불러들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 김원봉. |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
1920년 9월: 박재혁,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 투척.
1920년 11월: 최수봉(최경학), 밀양경찰서에 폭탄 투척.
1921년 9월: 김익상,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922년 3월: 김익상·이종암·오성륜,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1925년 3월: 이인홍·이기환, 베이징에서 일제 밀정 김달하 처단.
1926년 12월: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에 폭탄 투척.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약산 김원봉 평전>은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며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
ⓒ 국사편찬위원회 |
"김원봉은 ······ 몇 명의 탐관오리와 토호열신(당시 중국식 표현, 대지주·자본가 지칭)을 암살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조국의 해방을 바랄 수 없으며, 강력한 무력으로써만 강도 일본의 기반을 벗어나 자주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무력투쟁 역량을 기르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는 것이 시급함을 자각한다."
"1938년 10월 창설 당시 조선의용대의 인원 규모는 겨우 89명에 불과하였고 의용대 대원의 주요 구성원이
조선민족혁명당(임시정부 내 좌파) 당원이었는데, 1940년에 이르러 조선의용대는 총대부(總隊部, 본부) 및
세 개의 지대(支隊)를 포함한 314명으로 발전해 2년 전에 비해 거의 4배의 급성장을 보였다."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가 2013년 발행한 <충청문화연구> 제10호.
▲ 김원봉. |
ⓒ 위키백과 |
일반적인 장군이나 장교가 그런 일을 시도하거나 그런 능력을 가진 게 드러나면,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기무사)
요원들의 감시를 받기 쉽다. 김원봉 같은 혁명가형 장군의 리더십과 일반적인 장군들의 리더십을 수평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김원봉 같은 혁명가형 장군이 300명을 보유했다면, 동그라미를 적어도 한두 개는 더 붙여야 이런 인물의 위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3천이나 3만 정도의 병력을 거느릴 역량을 보유했다고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인물들이 양성한 독립군은 일반 사병이 아니라 간부급이었으므로, 이런 부대가 국내로 진입해 산악지대에
기지를 잡았다면 300이 3000이나 30000으로 늘어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을 위해 멕시코 항구에서 출항할 당시, 이들이 이끄는
부대의 규모는 본인들을 포함해 82명이었다. 멀미와 풍랑과 굶주림에다가 정부군의 공격으로 병력이 소실된 까닭에,
상륙 직후 이 부대의 규모는 12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12명을 '밑천' 삼아 세력을 불리며 혁명전쟁을 수행한 끝에,
카스트르와 체 게바라는 1959년 1월 1일 쿠바 정권을 잡을 수 있게 됐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
ⓒ NARA / 박도 |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그는 중국 공산당 부대, 중국 국민당 부대, 미군, 소련군, 일본군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전쟁 국면의 확대는 김원봉의 조국해방 로드맵을 망가트리는 데
기여했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연합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 세계 전쟁에서 명확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원대한 꿈은 그렇게 스러지고 말았다.
결국 김원봉은 1945년 12월 2일 장군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이끌고 고국을 해방시키려던 오랜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 뒤 그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 미군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 사이에서 예전의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노골적으로 분단을 획책하는 이승만과 미군정을 피해 북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포부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북쪽에서 그는 군인이 아닌 정치가여야 했다. 주 무기를 버린 채 활동해야 했던 것이다.
1948년 월북한 김원봉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거쳐 국가검열상 및 노동상을 지낸 뒤 국회 부의장급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지만,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1958년 숙청을 당해 인생을 마감했다.
항일투쟁에서 가장 빛나는 무장투쟁 성과를 남긴 인물 중 하나이지만, 인생 마지막은 그처럼 쓸쓸히 마감해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