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ARY

Lotus Pond 2019. 3. 25. 00:15

도재기

경향신문 선임기자

2019.03.01 16:46:52                                                                                                         

매헌 윤봉길 회중시계(보물 568-2호)

매헌 윤봉길 회중시계(보물 568-2호)

백범 김구 회중시계(등록문화재 441호)

백범 김구 회중시계(등록문화재 441호)

지금까지와는 다른 성격의 문화재를 다뤄본다. 그동안 짧으면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 전의 문화유산들을 살펴봤다.

상징적 의미에서 ‘천년 향기’를 지닌 것들이다. 이번에는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100년 전후의 문화유산 일부를 소개한다.

앞으로 수백년, 수천년을 이어 ‘천년 향기’를 풍길 유물들이다.

최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민족공동체를 위해,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조명하는 소중한 일이다.

항일독립운동 관련 문화재들에는 100년 전 그들의 삶과 정신, 간절한 꿈이 오롯이 서려 있다.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보존과 관리·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역사적·학술적 가치로 우리의 정체성을 재확인시킬 문화유산들이다.


■ 그날, 시계를 맞바꾼 백범과 매헌


1932년 4월29일 정오 무렵, 24세의 청년 매헌 윤봉길(1908~1932)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윤봉길 의거’를 단행했다. 일본 왕 생일과 상하이사변 승리 기념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요인들을 처단한 것이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 주석이 “중국 백만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평가한 의거다.


이 의거는 3개월 전 일본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와 함께 당시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을 줬다. 세계에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의지를 알리는 쾌거였다.

이 의거로 윤 의사는 그해 12월 순국한다.


윤 의사가 생전 아껴 손때가 묻은 유품들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60여점은 보물 568-1~3호로 지정됐다.

백범 김구(1876~1949)가 조직한 항일투쟁단체 ‘한인애국단’(이봉창·윤봉길 의거는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거행됐다)

입단 때 쓴 선서문과 유서·이력서(보물 568-1호)가 대표적이다. 또 평소 읽던 시집과 책, 안경집, 담배함,

 수저 등 27점(보물 568-3호)도 있다. 보물 568-2호는 평소 지녔던 유품들로 동그란 휴대용 시계인

회중시계, 지갑, 손수건 등이다.


윤 의사의 유품들 중 회중시계는 특별한 사연으로 눈길을 잡는다. 의거 당시 그의 품에 있던 회중시계는 원래 백범의 것이다.

거사 당일 백범과 매헌은 함께 ‘마지막 아침상’을 가진 자리에서 매헌의 제의로 회중시계를 맞바꾼다.

그 사연이 백범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기록돼 있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7시)을 친다.

윤군(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주며 ‘이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

(…)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했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해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을 향해 달렸다.

” 순국을 앞둔 매헌은 ‘한 시간밖에는 쓸데가 없는’ 금빛의 새 시계를 백범의 낡은 은빛 시계와 바꾼 것이다.

말모이 원고(등록문화재 523호)


말모이 원고(등록문화재 523호)


그날 백범과 교환한 매헌의 시계는 어떻게 됐을까. 17년이 지난 1949년 6월26일,

백범이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울 ‘경교장’에서 운명한다. 서거 당시 백범이 지닌 유품들 중에 매헌과 교환한

그 회중시계(등록문화재 441호)가 있었다. 매헌과 백범의 자그마한 회중시계에는 두 인물의 위대한 삶,

의로운 정신이 응축돼 있어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유물이다.


백범과 관련한 문화재 중에서 <백범일지>(상하 전2권·보물 1245호)도 유명하다.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백범이 독립투쟁과 임시정부 활동 등을 기록한 <백범일지>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다. 잘 알려진 ‘나의 소원’은 이 책 마지막 부분에 붙어 있다.

백범의 다른 유물로는 서거 당시 입고 있어 핏자국이 남아 있는 의복들, 광복군에 대한 동포들의 지원을 당부하는

먹글씨를 쓴 태극기,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그림) 등도 전해진다.

유묵 가운데 ‘愼其獨’(신기독·홀로 있을 때도 삼간다)은 백범의 평소 마음가짐을 짐작하게 한다.

백범의 집무실·숙소였던 경교장(사적 465호)은 서울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데, 1938년 지어진 건축물이다.


항일독립운동 관련 문화재 중에는 지난해 등록문화재가 된 ‘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도 있다.

일제가 1920~1940년에 걸쳐 김마리아·안창호·유관순·윤봉길·이봉창 등 4875명의 감시대상 인물의 사진과 출생연월일,

주소 등을 기록한 신상카드다. 독립운동가 활동상의 확인 등을 위해 신빙성 높은 자료인 이 카드는

 첨부된 인물사진들로도 귀하다.


유적지로는 서울 효창공원(사적 330호) 등이 있다.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효창공원은

원래 조선 왕실 묘역인 ‘효창원’이었으나 일제가 ‘효창공원’으로 바꿨다. 해방 이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를 비롯해

이동녕·차이석·조성환 등 임시정부 요원 등의 묘소가 조성되고, 백범도 안장됐다. 정부가 독립운동 기념공간으로

재조성을 추진 중인 효창공원에는 유해가 중국 어디엔가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있다.

서대문형무소(사적 324호)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사적 299호)은 독립운동가들이 당했던

수난, 일제의 비인간적 잔악상을 살펴볼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을 받아야 했고, 유관순 열사 등은 결국 이곳에서 순국했다. 경기 화성시에 있는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은 일제의 민간인 무차별 학살 현장이다.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김 마리아)   사진제공 문화재청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김 마리아)  사진제공 문화재청


■ 어둠에 묻힌 유물들에 빛을…


역사적·학술적 가치에도 불구, 근대문화유산인 항일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은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사실상 방치됐다. 보존과 관리·연구를 위한 활동에 문화재청 등 정부 당국조차 관심이 적었던 것이다.

그사이 유물들은 훼손됐고, 급격한 도시화로 건축물들은 헐렸다. 그 유명한 ‘3·1독립선언서’가 보존·관리가 가능한

등록문화재가 된 것도 겨우 2016년이 되어서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는 일반적으로 제작·건설된 지

100년이 넘은 것을 지정대상으로 하다보니 근대문화유산은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마련되면서 제작·건설된 지 100년이 안된 근현대문화유산이더라도 가치가 크다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청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 가능해졌다.

주로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문화유산들이 대상이다.

이에 따라 2010년대 들어 근대문화유산들이 대거 등록문화재가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 편찬을 위해 국어학자들이 만든 ‘말모이 원고’와 조선어학회가 작성한

‘조선말 큰사전 원고’, ‘독립신문 상해판’은 2012년 등록문화재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회의록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문서’,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 ‘조일관계사료집’ 등도 뒤를 이었다.

지난해에는 저항시인 윤동주(1917~1945)와 이육사(본명 이원록·1904~1944)의 친필 원고들,

독립운동가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등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러나 ‘보물’로 지정됐지만 행방을 알 수 없는 문화재도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으로, 사라진 곳은 청와대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의 첫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이듬해 3월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옥중에서 유묵을 남겼다. 현재 26점이 보물 569-1~26호로 지정돼 있다.


그중 청와대에서 사라진 유묵은 보물 569-4호로,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를 쓴 것이다.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과는 더불어 도를 논할 수 없다’란 의미의 서예 족자다.

안 의사가 순국 직전인 1910년 3월에 쓴 이 유묵은 1972년 보물로 지정됐고,

1976년 3월 소장자인 홍익대 설립자 이도영이 청와대에 기증했다.

그러나 지금도 소유권이 청와대에 있는 이 유묵은 1980년대 청와대에 소장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오리무중이다.


보물로 지정된 안 의사의 유묵들은 고전의 경구나 자신의 가치관 등을 담고 있다.

낙관은 1909년 독립운동에의 헌신 맹세를 하면서 약지 한 마디를 자른 왼손 손바닥으로 했다.

유묵들 가운데 ‘하루라도 글(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개인적) 이익을 앞에 두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의

 ‘見利思義見危授命’(견리사의견위수명),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는

‘人無遠慮難成大業’(인무원려난성대업)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등록문화재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은 항일독립운동 관련 유물들,

특히 기록물이 매우 많을 것이란 게 근대문화유산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문화유산 중에서도 기록물은 소장자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한 게 사실이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활성화는 물론 잊혀지고 숨겨진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후대가 당연히 해야만 하는 뜻깊은 일이다. ‘눈밝은’ 소장자들, 연구자들이 적극 나서

어둠 속에 묻힌 자료들에 빛을 비춰야 한다. 3월 들어 전국 곳곳의 박물관, 유적지, 기념관 등에서는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전시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어 들러볼 만하다.

100년 전, 큰 뜻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불태운 위대한 사람들, 한 시대의 큰 스승들을 만나볼 귀중한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