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ARY

Lotus Pond 2019. 4. 13. 01:49

좌우로 나뉘어 위기 겪던 임시정부
윤봉길 상해의거 후 기사회생 성공

소화제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방
임정 활동 알리고 국내 정보 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덕수궁-옛 러시아공사관 터-중명전-정동제일교회-옛 배재학당 터로 이어지는 '정동길'은

서울에서도 걷고 싶은 거리로 손꼽힌다. 정동에서 서소문에 이르는 이 일대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

한국 근대사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역사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동북아역사재단 방향으로 좀 더 걸어가면 평안교회와 롯데캐슬 단지 사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라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서울연통부지'란 서울의 연통부가 있던 곳이란 뜻이다. 연통부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거점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가 관할하는 행정조직으로, 상해와 국내 간 통신과 독립자금 수합 등이 주요 기능이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거점 역할을 한 '서울연통부' 표지석. 순화동 소재.사장 민강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거점 역할을 한 '서울연통부' 표지석. 순화동 소재.사장 민강

1995년 8월 15일에 서울특별시가 이 표지석을 세웠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이곳은 서울시청과 비슷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서울연통부가 자리 잡고 있었던 터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3일 중국 상해에 수립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연통부와 교통국을 은밀히 조직하여 국내외를 오가며 활약하였다.

그 중 서울연통부는 일제와 싸우면서 임정이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고

 나라 안의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정에 보고.전달하였다." 



서울연통부를 서울시청에 비유한 점이 눈에 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유적이란 얘긴데

우리 일상 속에 생각보다 매우 깊숙이 들어와 있는 셈이고, 또 그 표지석이 그렇게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찾아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리게 된다. 이곳이 소화제로 유명한 활명수의 고향이란 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임시정부 핵심 유적을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데는 임정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온전하게 정립되지 못한 데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거국적 3.1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탄생했다.

서울연통부 표지석에는 '4월 13일'로 되어 있는데, 이제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당초 4월 13일을 기념일로 한 것은 이날이 임정을 선포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에 '대한'이란 국호가 제정되고 임시헌장 반포와 국무원 선임도 이루어졌다는 점을

중시하는 의견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국가보훈처 주관 아래 각계 의견 수렴을 거쳐 임정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부터 4월 11일로 기념일을 변경하기로 2018년 4월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거국적 독립운동의 열기로 탄생한 임시정부였지만 아쉽게도 이데올로기 격랑에 휩쓸려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

1920년 말부터는 임정은 거의 무력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백범 김구는 이런 분열상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세계 사조가 봉건이니 사회주의니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계도 사상이 갈라지고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결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 불일치로 때때로 논쟁이 일어나 국시가 서지 못하고,

정부 내부에서 괴이한 현상이 거듭되었다."(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김구가 서술하는 100년 전의 모습이 마치 오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100년이 지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런 분열상은 오늘날 임정을 평가하는 시각에서도 나타난다.

임정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시각이 엇갈린다. 

임정에 대한 평가는 1980년대 초반까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 내용은 임정이 3.1운동의 산물이고,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체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법통성을 지닌다는 점을 중시했다.

임정의 지도력이 약화한 시기를 겪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오랫동안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는 평가인 것이다. 

김구 '한인애국단' 결성 돌파구 

1980년대 후반부터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임정을 '부르주아 민족운동'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다르다.

임정 구성원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민중의 의사와 역량을 파악하지 못하여 민족해방투쟁사에 기여하지 못했으며,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무장투쟁을 부수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결국 쇠퇴했다고 깎아 내리는 식이다.

이런 부정적 성향은 사회주의 노선을 이상적으로 위치시켜 놓고 그 하위 단계로 임정을 배치하곤 한다. 

임정에 대한 북한의 역사 서술은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흐름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부르주아 민족 상층의 정치적 참위분자들이 중국 상해에서 이른바 '림시정부'를 조작"하였고,

 "이른바 '상해림시정부 대표'가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파리 평화회의에 구걸행각을 갔다가 실패"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 '조선근대사'는 "3.1운동 후 조선에서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전면적인 쇠퇴.몰락 과정을

직접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의 뚜렷한 표현이었다"고 서술했다.(김희곤 지음,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임시정부 안에서 이념 갈등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갈등과 분열이 심해지며 임정을 이탈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상해 임정을 찾은 독립운동가는 한때 1000여 명에 달했으나 차츰 줄어 1920년 후반에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힘들고 유명무실한 적도 있었지만 다시 일어나 세계 유례가 없이 장기간의

독립투쟁을 거쳐 끝내 독립을 성취해낸 역사가 이어졌다. 

상해 임정의 존립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특무공작 기관으로 김구가 결성한 것이 '한인애국단'이었다.

김구는 안중근의 전통을 잇는 의열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이 의열투쟁의 정점은 이봉창의 동경의거(1932년 1월 8일)에

이은 윤봉길의 상해의거(1932년 4월 29일)였다. 상해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기사회생했다.

끊겼던 독립자금이 속속 답지했고, 장개석과 김구의 공식 만남으로 한.중 군사동맹이 결성되어

장차 한국광복군을 이끌 한인 사관들이 중국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는 그로부터 11년 뒤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에서 조국광복의 출로를 연 계기로 평가된다.

(황태연 지음,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피식민지 국가가 있었는데 그중에 한국(Korea)만 두 번씩이나 언급하며

독립을 확정한 사실을 간단하게 볼 일이 아니다. 사실상 '코리아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로선언이 나오기까지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윤봉길의 상해의거와 김구가 이끈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음을 놓쳐선 안 되는 것이다. 

임정을 탄생시킨 원동력은 거국적인 3.1운동의 열기였고, 거국적 3.1운동이 가능한 데는

고종의 비극적인 '독살'에 대한 국민적 분노, 손병희가 이끈 전국적 동학(천도교)의 자금과 인력,

임병찬이 이끈 대한독립의군부(1914)에서부터 준비된 비폭력 정치투쟁 등이 연속적으로

작용했음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