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시

Lotus Pond 2011. 3. 27. 23:36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이 진 명


우이동 삼각산 도선사 입구 귀퉁이
뻘건 플라스틱 동이에 몇 다발 꽃을 놓고 파는 데가 있다

산 오르려고 배낭에 도시락까지 싸오긴 했지만
오늘은 산도 싫다

예닐곱 시간씩 잘도 걷는 나지만
종점에서 예까지 삼십 분은 걸어왔으니
오늘 운동은 됐다 그만두자

산이라고 언제나 산인 것도 아니지
젠장 오늘은 산도 싫구나

산이 날 좋아한 것도 아니니
도선사나 한 바퀴 돌고 그냥 내려가자

그런 심보로 도선사 한 바퀴 돌고 내려왔는데
꽃 파는 데를 막 지나쳤는데

바닥에 지질러앉아 있던 꽃 파는 아줌마도 어디 갔는데
꽃, 꽃, 꽃이로구나

꽃이란 이름은 얼마나 꽃에 맞는 이름인가
꽃이란 이름 아니면 어떻게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것, 그것이 꽃 아니겠는가
몸 돌려 꽃 파는 데로 다시 가
아줌마 아줌마 하며 꽃을 불렀다

흰 소국 노란 소국 자주 소국
흰 소국을 샀다
별 뜻은 없다
흰 소국이 지저분히 널린 집 안을 당겨줄 것 같았달까

집 안은 무슨, 지저분히 널린
엉터리 자기자신이나 좀 당기고 싶었겠지

당기긴 무슨, 맘이 맘이 아닌
이즈음의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 자가 위로
잘났네, 자가 위로, 개살구에 뼉다귀

그리고 위로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냐, 어쨌든
흰색은 모든 색을 살려주는 색이라니까 살아보자고
색을 산 건 아니니까 색 갖고 힘쓰진 말자

그런데, 이 꽃 파는 데는 절 들어갈 때 사갖고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올리라고 꽃 팔고 있는 데 아닌가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 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다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

시집<세워진 사람 / 창비>

★이진명 시인

서울예술대학 졸업
90년 계간《작가세계》 제1회 신인으로 등단.

시집:『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민음사), 『집에 돌아 갈 날짜를 세어보 다』
(문학과지성사),『단 한 사람』(열림원),『세워진 사람』(창작과비평사)

수상:제4회 일연문학상, 제2회 서정시학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