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ARY

Lotus Pond 2011. 4. 11. 10:27

 

그날 밤 전남도청에는 3백여 의인들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2011년 04월 11일(월) 오전 09:54
[오마이뉴스 김병년 기자]유일하게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는 도시 광주가 피바다로 변했음에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광장의 사람들은 우리나라 군대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절규했다. 그렇지만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훈련시켰던 그들의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 폭도라는 말이 얼마나 섬뜩했는데. 총을 든 빨갱이들을 소탕하겠다고, 하루 종일 헬리콥터로 전단을 뿌리고 방송으로 협박해댔거든.

그놈들을 용서할 수 없어. 삼촌은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진저리를 치곤했다. 헬리콥터에서 밀어 떨어지거나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죽는 꿈도 자주 꾸었다고 했다. 가장 끔찍한 건 반복되는 거야. 삼촌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끝이 안 보였다니까. 

마지막 궐기대회 때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느냐는 물음에, 매우 많았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회상할 때는 사람들이 너무 적어서 슬펐다고 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위로받고 싶은 것들만 의식 표면으로 끌어 올린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그날 밤 쿠데타군이 쳐들어오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광주를 진압하지 않고 쿠데타의 성공은 불가능했다. 광장의 시민들 역시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했다.

궐기대회가 끝날 무렵 최후의 항쟁지도부는, 오늘밤 쿠데타군이 시내로 진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광장에는 무겁고 비장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남은 사람들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모두들 눈앞이 캄캄한 표정들이었다. 총을 든 삼촌 역시 이제 모두 죽는구나 생각했다.

수차례 지도부가 바뀌는 우여곡절 속에서 너무 많은 무기들이 회수되었다. 상당수의 시민군들이 총을 내려놓고 도청을 나간 후였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군과 맞설 수 있으리라고 믿는 시민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도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졌다.

무고한 죽음을 부르는 기나긴 밤이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광장 한쪽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소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노래는 시민들 가슴에 비통한 전율을 일으키며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그것은 연대의 노래이고 좌절의 노래이며, 결속의 노래이고 통한의 노래이며,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소통의 노래이다. 그것은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이해한 노래이며, 해결을 향한 장정의 노래이고, 모호함을 걷어내는 전망의 노래이며, 절망의 마디를 부러뜨리는 희망의 노래이고, 광장을 하나로 묶는 단결의 노래였다.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비통한 노래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울 무렵 시민들은 분노와 용기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 둘 씩 일어섰다. 누가 앞장서서 나가자고 말하지 않았으나 거대한 물결이 되어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은 금남로에서 유동삼거리로, 양동 복개상가와 돌고개를 거쳐 공단입구로 나아갔다.

삼촌은 마지막 시가행진에 참가하지 않았다. 피살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분향소를 정리하는 등의 일을 돕던 그는, 경계근무를 끝낸 직후여서 총을 멘 채였다.

- 시가행진하는 후미를 보고 있는데, 기분이 착잡하더라고. 따라가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어. 혹시나 쿠데타군하고 맞닥뜨리는 건 아닌가 싶었거든. 

그런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고 했다. 총을 들고 따라갔다가 쿠데타군의 표적이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잡혀 집으로 돌아간 것도 그때였다. 삼촌은 늙은 노부모가 자기를 잡기 위해 집회에 참석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시위대가 광장을 출발한 지 얼마 후였다. 두 늙은이는 있는 힘을 다해 늦둥이 막내의 팔을 움켜쥐었다.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삼촌은 자기를 체포하려는 군인들인 줄 알았다고 했다.

가려면 그 총으로 나를 콱! 쏘고 가그라. 죽어도 이 손은 못 놓는다. 삼촌은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가 늙었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팔을 움켜잡고 매달리는 어머니는,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이고 어깨도 왜소한 늙은이였다.

당시 할머니는 예순 넷이었다. 핏발이 곤두선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했고, 목소리까지 반쯤 갈라진 채 잠겨 있었다. 그 옆에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늙은 아버지도 서 있었다.

- 따라갈 테니 먼저 집에 가라 그럴라 했는데, 그 말이 안 나오더라고.

그때마다 삼촌은 감정이 격해져 눈 주변이 붉게 달아올랐다.

의인이 된다는 것은, 양심과 존엄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는 일이다. 두렵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삼촌은 의인의 용기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 앞에 선 그는 늦둥이 막내로 돌아와서, 메고 있던 총을 내려놓았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드라고. 뭐라 그러며 총을 반납했냐고? 큰 소리로 근무 끝났다고 보고할라 했지. 그런데 혀가 말려 씹히드라고. 웅얼거렸제. 상황실에 있던 그 양반은 아무 말 없이 총을 받아주더라고. 돌아 나오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고 했다.

삼촌은 두 늙은이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몇 번이나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한번 꺾인 용기는 다시 추슬러지지 않았다.

늦둥이를 무사히 구출해 집에 도착하자, 두 늙은이는 서둘러 대문을 걸어 잠갔다. 삼촌 손에 요강을 들려 안방 다락에 집어넣고 걸쇠를 고리에 끼운 후에야 모든 것을 이루었다 싶었다. 영감, 이제 됐구마.

그 시각. 항쟁의 마지막 시위대는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쿠데타군과 지척의 거리에서 대치했다. 그들은 쿠데타군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쳤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그렇지만 시가지를 돌아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수백 명으로 줄어들었다. 더 이상 버틸 여력도 없었다. 희생을 줄이기 위해 총을 반납하고 도청에서 완전히 철수하자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총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만 남으시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오늘 밤 우리는 끝까지 항전할 것입니다. 

그날 광장에 서있던 사람들 중에 상처 없이 돌아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쿠데타군에게 함께 저항했지만 마지막 결정이 달랐을 뿐이다. 도청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는 길이었고, 돌아가는 것은 사는 길이었다. 누구도 그걸 대신 결정할 수 없었다.

들어가면 죽을 것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누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도청에 남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살아남아 새로운 저항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머리를 곧게 세운 시민들은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폭도로 몰렸고 오늘 밤 폭도로 피살될지라도, 쿠데타군과 한 하늘 아래에서 양립할 수 없었던 의인들은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들 사이의 동등함을 맛보았던 전사들은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주님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던, 가난하고 순결한 어린 양도 대속의 멍에를 짊어지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누이가 공수부대에게 잔혹하게 피살된 고등학생은 복수를 위해 울면서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부모에게 잡혀 집안에 숨어있었지만, 양심에 거리껴 견딜 수 없었던 청년들도 친구와 동지로서 손잡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항쟁기간 내내 함께 투쟁했던 부부는, 남편이 아내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담대히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최후의 한 명까지 저항함으로써, 정의를 세우겠다는 시민들은 죽음의 공포를 뚫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백년전쟁의 격전지 프랑스 칼레에 여섯 명의 의인들이 있었다면, 80년 5월 26일 밤 전남도청에는 3백여 명의 의인들이 있었다.

항쟁의 마지막 밤. 광장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모두들 죽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웃으며 헤어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마지막 식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전사들은 각자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역할을 나누었다. 군제대자들과 청년들은 총을 들고 도시 외곽으로 달려갔다. 쿠데타군의 진입을 일차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여성들과 학생들은 도청과 인근 건물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그들은, 쿠데타군 중에서도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와 싸워 이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탱크와 장갑차와 헬리콥터로 무장한 저들은 인민군보다 더 무자비했고 일본 순사들보다 더 잔혹했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불길한 고요함이 도시를 지배했다. 시민군들만이 곳곳에 진지를 구축한 채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며 총을 들고 도로를 노려보았다.

의인들을 도청에 제물로 바친 시민들 역시 잠 들 수 없었다.

가족이 공수부대에게 잡혀간 뒤 생사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잔혹한 폭력과 무차별 총격으로 자식과 남편과 아버지와 형제와 누이와 친구를 잃은 사람들도, 일주일 넘게 치열하게 전개된 항쟁에 참여하느라 심신이 지친 사람들도, 항쟁기간 내내 두려움과 공포로 숨어 지내던 사람들도, 광장에서 돌아선 비겁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도, 내일을 위해 오늘의 잔을 비켜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피에 굶주린 학살자들이 광란하는 죽음의 밤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당신들 목숨보다 두 배는 더 귀중한 늦둥이를 숨겨놓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날 밤이 악몽의 마지막 고비이기를 절절히 갈구했다.

그러나 악몽은 끝나지 않았고, 탐욕스러운 아가리로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