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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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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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 이야기(첼로)

2014. 11. 11.

 

 

 

 

 

카잘스 명연주자 열전 18 카잘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카피를 발견했고,<br>이 작품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카잘스의 연주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자신의 저술을 통해 바로 ‘예술과 도덕의 영원한 결합’을 상징한 바 있다. 음악가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불멸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거의 극소수만이 이를 실현했고, 그들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모델은 바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은 “그의 단순함과 우아함, 고결함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점들은 밖으로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이 위대한 카탈루냐 출신의 첼리스트이자 선생, 평화의 사도에게는 가장 정확하고 영속적인 성경과도 믿음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음악가는 그저 인간일 뿐이지만 음악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이다.”라는 마음이었다.

비천한 출신이라는 딱지는 종종 한 인간이 성장한 뒤 그의 인간성 부족을 탓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잘스에게 있어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엘 벤드렐에 위치한 11남매를 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탈루냐의 타라고나 지방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 지휘자였다. 카잘스는 어린 시절부터 이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했다. “나의 음악적 재능은 전적으로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이다”라고 카잘스는 후일 회상한 바 있다.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 카를로스 카잘스는 파블로를 포함한 자신의 아이들에게 노래와 피아노, 오르간 등을 가르쳐 주었고, 여덟 살이 된 파블로는 이미 바이올린을 충분히 습득하여 지방 연주회에서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위대한 인본주의자의 탄생

어린 시절부터 조약한 첼로를 들고 다니며 유량악단과 연주를 하던 어린 파블로를 지켜보던 카를로스는 제대로 된 울림통과 곡선을 지닌 진짜 첼로를 사주었다. 실제 첼로를 처음 접한 열 한 살의 카잘스는 악기를 들도 도시의 연주회장을 찾아 다니며 피아노 트리오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1888년 카잘스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음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요셉 가르시아로부터 정식 첼로 교육을 처음으로 받았는데, 우연하게도 그는 1년 전 벤드렐에서 피아노 트리오를 연주할 때 만났던 음악가였다. 가르시아의 새로운 학생은 탁월한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고 3년 뒤에는 스승의 능력을 상회하는 테크닉과 솜씨를 구사하게 되었다.

40대 무렵의 카잘스 모습. <출처: Wikipedia>

이 시기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카페인 ‘토스트’에서 프로페셔널한 연주 경력을 쌓아나기 시작했다. 왈츠는 물론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 사르수엘라 편곡 작품들을 좁은 카페에서 끊임없이 연주했고, 이와 더불어 진지한 클래식 레퍼토리를 한 곡씩 소개하면서 청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 카페에서 카잘스의 연주를 들은 당대 최고의 스페인 작곡가인 이사크 알베니스는 그가 미래에 크게 성공할 것임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는 카잘스에게 스페인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의 비서에게 추천서를 써주었고, 이를 계기로 카잘스는 궁전에서의 연주회를 비롯하여 마드리드의 음악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경력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는 바흐와 베토벤이었고, 그들의 음악이 카잘스 음악세계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열 세 살 무렵 바르셀로나 항구에 인접한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 가운데 위치한 중고책 서점에 들린 때를 기억하며 행복해 하곤 했다. 여기서 그는 책 모서리가 전부 구겨져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카피를 발견했고, 당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이 작품을 홀로 연습을 해 나갔다. 이 작품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카잘스의 연주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남은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카를로스 3세 훈장'을 받을 정도로 스페인 왕실로부터 인정을 받은 그는 1899년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여행을 가졌다. 유럽 전역에서 환호를 받은 그는 여세를 몰아 1901년에는 미국을 방문했고 2년 뒤에는 남미까지 연주여행을 떠났다. 1904년 1월에는 백악관에 초청되어 루즈벨트 대통령 앞에서 연주를 했고, 3월에는 카네기 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휘로 [돈 키호테]를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915년에는 처음으로 레코딩 세션(이 녹음은 1925년에 음반으로 발매되었다)을 가지기도 했다.

스페인 프랑코 정권에 대한 반발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카잘스는 알프레드 코르토자크 티보와 함께 음악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1937년까지 함께 트리오 작품을 레코딩하여 지금까지도 첫 손에 꼽히는 명반들을 탄생시켰는데, 여기에는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와 더불어 슈베르트, 멘델스죤, 슈만의 작품들을 포함한다. 한편 코르토의 지휘로 티보와 함께 브람스의 [이중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6년부터 39년 사이에는 자신이 발견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녹음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또한 녹음했다. 협주곡으로는 조지 셸이 지휘하는 체코 필하모닉과의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을 남기기도 했다. 이들 레코딩은 모두 같은 곡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으로 오랜 동안 자리를 잡았고, 특히 바흐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그 아성을 쉽게 넘을 수 없는 일종의 첼로 음악의 성경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1936년 스페인 내전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스페인 공화정을 지지했던 그는 1938년 10월 리체우 극장에서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다시 민주주의가 복원될 때까지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과 맞닿아있는 프라드라는 도시에 거주하며 스페인으로부터의 연주 초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도 연주회를 갖지 않으며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치에 협력한 음악가들, 특히 자신의 오랜 친구인 코르토와도 관계를 끊었다(이후 1958년에야 비로소 화해를 했다).

한편, 미국에서의 연주회 또한 거부했는데, 단 그가 평소에 흠모했던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1년 11월 13일 백악관에서 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와 알렉산더 슈나이더와 실내악 연주회를 가지며 화해의 분위기를 가졌다. 카잘스로서는 60년만의 백악관 연주회였던 이 실황 역시 녹음되어 전설적인 음반으로 남게 되었고, 특히 마지막 앙코르로 카잘스가 연주한 카탈루냐 민요인 [새의 노래]는 그의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아낸 연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3년 미국 정부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에는 병마를 딛고 일어나 베토벤 순례의 길을 떠나겠다고 맹세한 뒤 수 십 년 만에 다시 독일 땅을 밟아 연주회를 가졌고, 당시 호르초프스키와 산도르 베그와 함께 한 베토벤의 [트리오 ‘대공’] 및 베토벤 첼로 소나타 등이 필립스(Philips) 레이블로 발매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와 연주하는 카잘스.

카잘스가 중심이 된 프라드 페스티벌

본격적으로 LP시대가 열린 1950년대부터 카잘스는 그 유명세에 비하여 다양한 디스코그래피를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움을 남긴다. 특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스테레오로 다시 녹음하지 않은 것은 후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가 1950년부터 주관한 프라드 페스티벌에서 가진 연주회 실황들이 콜럼비아 레이블을 통해 녹음, 발매되어 그나마 만년의 그의 위대한 모습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는 첼리스트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애정을 갖고 있었던 지휘자로의 역량 또한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라드라는 작은 도시에 세계의 유명 연주자들이 카잘스를 구심점으로 모이게 되었다.

당시 그의 음악적 동료로서 피아니스트 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 유진 이스토민, 루돌프 제르킨, 마이라 헤스, 파울 바움가르트너, 클라라 하스킬, 이본느 르페브르 등이 참가했고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알렉산더 슈나이더, 요제프 시게티, 아이작 스턴, 에리카 모리니, 예후디 메뉴힌, 시몬 골드베르크 등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참여했다. 한편 지휘자로서 카잘스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소화했고 가끔씩 유진 오먼디 같은 지휘자를 세우고 자신이 협연자로 나서 슈만의 [첼로 협주곡]과 같은 협주곡 레퍼토리를 연주하기도 했다. 백악관 연주회 이후 말보로 페스티벌에 지휘자로 등장하는 등 90세가 넘어서까지 활발한 음악활동을 한 그는 95세 생일을 두 달 앞둔 1971년 10월에는 UN본부에서 세계 평화의 염원을 담은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토록 음악과 인간이 하나 되기를 꿈꾸었던 카잘스는 1973년 10월 22일 96세의 나이를 일기로 푸에르토 리코의 산 후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프랑코 총통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프랑코가 세상을 떠난 뒤 왕정복고가 된 스페인의 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1976년 그의 생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1979년에는 그의 고향인 카탈루냐의 엘 벤드렐으로 이장되어 그토록 사랑했던 스페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카잘스의 오랜 방랑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약력

  • 1888년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 입학
    1889년 중고서점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발견
    1904년 첫 백악관 초청 연주
    1905년 자크 티보, 알프레드 코르토와 트리오 결성
    1915년 첫 레코딩 세션 녹음
    1936~39년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녹음
    1939년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프라도에 은둔
    1950년 프라드 음악제 개최
    1963년 미국 정부로부터 자유의 메달 수여
    1971년 UN본부에서 평화상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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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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