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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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로포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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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 이야기(첼로)

2014. 11. 11.

 

 

 

 

 

 

로스트로포비치 명연주자 열전 17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로 연주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실내악, 성악, 오페라까지 섭렵하며<br>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산한 다재다능한 음악인이었다.

 

 

20세기에는 수많은 첼리스트가 활동했지만 일명 ‘슬라바’라는 애칭으로 많이 불리는 므스티슬라프 레오폴도비치 로스트로포비치만큼 커다란 예술적 영향력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은 파블로 카잘스 외에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로 리사이틀은 물론 오케스트라, 실내악, 성악, 오페라까지 섭렵하며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산했을 뿐만 아니라, 후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겸허함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70세 때 떠난 휴가지에서 따분함을 느낀 뒤 죽을 때까지 휴가를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그는 성실함이라는 미덕을 갖춘 음악가의 표상이었다.

현대 첼로의 화신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아제르바이젠의 바쿠에서 러시아인 부모(아버지는 벨라루스-폴란드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슬람권 도시인 바쿠에서 자란 로스트로포비치는 네 살 부터 유능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열 살 무렵에는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이자 저명한 첼리스트인 아버지로부터 첼로를 배울 수 있었다. 이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그의 가족은 오렌부르크로 이사한 뒤 1943년에는 모스크바에 정착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16세의 로스트로포비치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 입학하여 첼로와 피아노, 지휘와 작곡을 공부했다.

20세기의 위대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출처: Wikipedia>

3년 뒤인 1945년 그는 소련 정부가 개최한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콩쿠르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1948년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그는 1956년까지 이 학교에서 첼로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에 헌신했다. 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을 하는 한편 연주자 활동 영역 또한 서서히 넓혀나갔다. 1942년 첫 리사이틀을 연 그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국제 음악제에서 1등상을 수상하며 당시 소련에서 가장 촉망받는 첼리스트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1950년 23세의 나이로 그는 스탈린상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소련 최고의 첼리스트로 인정받게 되었다. 레닌그라드 콘서바토리에서도 교수직을 맡게 되며 자국 내에서 최고의 인지도를 얻게 된 그는 1955년 볼쇼이 극장의 성악가인 갈리나 비슈네브스카야와 결혼하며 20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명성에 걸맞게 그는 소련 작곡가들로부터 많은 작품을 헌정 받았다. 1949년 22세의 나이에 프로코피에프로부터 [첼로 소나타 C장조 Op.119]를 헌정 받았고 이듬해 동료인리히테르와 함께 이 작품을 초연했다. 이를 계기로 프로코피에프는 [첼로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또다시 그를 위해 작곡하여 1952년에 초연할 수 있었고, 작곡가의 서거로 완성을 하지 못한 첼로를 위한 콘체르티노는 이후 작곡가 카발레프스키의 도움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쇼스타코비치는 두 개의 첼로 협주곡 모두를 그를 위해 작곡했다. 초연 또한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에 슈니트케, 패르트, 루토스와프스키, 메시앙, 뒤티외, 불레즈, 구바이둘리나 그리고 많은 영국 작곡가들로부터작품을 헌정받은 만큼, 그가 헌정 받은 작품들로 20세기 첼로를 위한 현대곡 목록을 완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63년 리에쥬 콘서바토리에서 키릴 콘드라신과의 협연을 시작으로 그는 서방 세계에서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특히 영국에서 벤자민 브리튼을 만나 전폭적 지지를 얻게 된 그는 이후 첼로 소나타와 세 개의 셀로 모음곡, 첼로 교향곡 등을 헌정받아 초연했다. 1976년 브리튼의 때 이른 서거로 그들의 파트너십은 지속될 수 없었지만, 병상에서 브리튼은 하늘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 재결합할 수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들의 음악적 신뢰는 대단히 높았다. 작품을 헌정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브리튼은 직접 피아노를 맡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앙상블을 만드는 것을 즐겼고, DECCA 레이블에서 발매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와 같은 명반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음반은 브리튼이 좋아했는데, 그는 서거하기 직전까지 침대에서 이 음반을 들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그의 딸이 전한 바 있다.

그의 엄청난 음악성과 음악에 대한 열정은 첼로라는 악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1962년 11월 고리키시에서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 관현악 발췌와 쇼스타코비치 편곡의 무소르그스키의 [가곡과 죽음의 무도]를 지휘하며 처음으로 지휘봉을 들었다. 이후 1967년에는 볼쇼이 극장의 초청을 받아 차이콥스키 [예프게니 오네긴]을 지휘했고, 이후 많은 곳에서 콘서트와 오페라를 지휘하며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8년 8월 21일에는 영국 프롬스에서 소비에스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지휘자로 서방 데뷔 무대를 가졌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카라얀과 만나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DG)을 함께 레코딩하여 희대의 명반을 탄생시길 수 있었고, 이후 R.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EMI)와 베토벤의 [3중 협주곡](EMI)을 카라얀과 함께 녹음하며 최고의 협연을 선보였다.

음악과 자유의 수호자

로스트로포비치는 예술의 뮤즈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자유의 대변자로서의 역할 또한 열정적이었다. 특히 그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자유에 대한 소신을 바탕으로 안락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1948년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 재학할 당시 21세의 그는 당시 형식주의 작곡가들이라고 비난 받던 자신의 스승 쇼스타코비치를 옹호하여 학교를 그만두기도 했다. 한편 1968년에는 그의 친구인 소련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집필할 당시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공산당 서기장인 브레즈네프에게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편지를 각 신문사에 보내기도 할 만큼 용감했다. 그 결과 그와 그의 부인은 해외 연주회를 금지당한 채 감시 속에 모진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1974년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감행했다.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던 그는 1977년부터 1994년까지 워싱턴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맡았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같은 유수의 영국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하며 활발한 지휘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1978년 반애국적 활동으로 국가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소련 시민권까지 빼앗겼던 그는 1980년 파리에서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콘서트를 열었다. 조국 러시아의 정치적 현실에 강하게 반발했던 그는 19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그가 서베를린 측 장벽 아래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는 모습은 전세계 TV로 퍼져나가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의 군부 쿠데타 시도를 막기 위해 크렘린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기꺼이 가담하기도 했다. 옐친과 두터운 친분을 나누기도 했던 그는 음악가라는 직업인 이전에 현대 러시아 의 역사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러시아인이기도 하다.

로스트로포비치와 그의 부인 비슈네브스카야. <출처: Wikipedia>

이렇듯 바쁜 삶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첼리스트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미국와 유럽을 오가며 지휘 활동을 하는 와중에 솔리스트로서의 활동 뿐만 아니라 동료 음악가들 및 젊은 음악가들과 함께 앙상블리스트로서도 많은 실내악 활동을 병행했다.

망명 전에는 에밀 길렐스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레오니드 코간 등과 트리오 및 듀오를 이루어 러시아 음악가로서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앞장섰고, 망명 후에는 서방의 다양한 음악가들과 기꺼이 앙상블을 맞추어 음악의 본질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데에 자신의 재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수많은 음악상과 훈장이 그에게 수여되며 20세기 세계 음악사에서 가장 영예로운 첼리스트이자 진정한 음악가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부인과 함께 로스트로포비치-비슈네브스카야 재단을 워싱턴에 설립하여 구 소련 어린이들의 건강과 교육을 향상시키는 사업을 벌였고, 2002년에는 자신의 고향인 바쿠에 로스트로포비치 박물관을 설립하였으며, 아제르바이젠 국립 콘서바토리에서 첼로 마스터 클래스를 열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이 세운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콩쿨에서 우승한 한국의 젊은 첼리스트인 장한나를 발굴하여 평생토록 그녀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데에 정신적, 예술적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준엄함과 따스함을 동시에 갖춘 스승으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음악적 유산들

그는 주로 1711년산 듀포르 스트라디바리우스와 스토리오니, 과르네리 이렇게 세 대의 악기로 많은 연주회와 녹음을 병행했다. 1950년대 이후수많은 녹음을 남겼고 이들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반으로 남아 있다. 앞서 언급한 브리튼과 카라얀과의 명반 외에도 리히테르와의 베토벤 [첼로 협주곡 전곡](Philips), 루돌프 제르킨의 반주로 녹음한 브람스 [첼로 소나타집](DG), 유진 오먼디 지휘로 녹음한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SONY), 네빌 마리너와 녹음한 하이든 [첼로 협주곡 1, 2번](EMI), 파울 자허와 휴 볼프의 지휘로 녹음한 바로크 [첼로 협주곡집](DG, Teldec) 등이 그를 언급하는 데 있어서 가장 보편적으로 거론되는 첼로 명반이다. 그 무엇보다도 생에 단 한 번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EMI)은 그의 필생의 예술혼을 담아낸 역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에머슨 4중주단과 슈베르트 현악 5중주(DG) 및 안네-소피 무터와의 베토벤 트리오(DG)와 같은 실내악 앨범도 다수 남겼다.

크레믈린궁 80세 생일파티에서 푸틴과 인사하는 로스트로포비치.

지휘자로서의 명연 또한 솔리스트로서의 기량 못지 않다. 가장 먼저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멕베드 부인] 전곡 녹음(EMI)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EMI),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모음곡집(DG), 세 개의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제작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Teldec)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쇼스타코비치를 존경했던 그는 소련을 떠나기 직전 작곡가에게 반드시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겠다는 약속을 작곡가 사후 20년 만에 지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는 2006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가끔 지휘하는 도중에 스승의 얼굴이 나타난다. 종종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난 느린 템포를 좀 더 빨리 몰고 간다. 그러면 이내 그 얼굴이 사라지곤 했다.”

한편 막심 벤게로프와 함께 한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 [바이올린 협주곡집](Teldec)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EM) 또한그 가치가 높고 13세의 장한나를 후원한 차이콥스키와 생상스 앨범(EMI) 또한 훌륭하다. 한편 피아니스트로서 아내인 비슈네브스카야를 반주한 러시아 가곡집(DG)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6월 서울에서의 두 번째 내한 공연 때 앙코르 첫 곡을 연주할 때 갑자기 뒤로 돌아 연주하여 합창석 청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배려를 보여줄 정도로 휴머니즘 넘치는 모습을 보여 준 로스트로포비치에게도 기어이 죽음이 찾아왔다. 2007년 3월 27일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그를 크레믈링 궁으로 초청하여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암으로 점점 악화되어 4월 7일 병원에 입원했고 그 달 27일 세상을 떠났다. 4월 28일 로스트로포비치의 유해가 모스크바 콘서바토리로 이송되어 많은 사람들의 참배를 받았고, 그 가운데에는 푸틴 대통령도 참석해 있었다. 그리고 그가 1990년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26년만에 고국 땅을 밟은 그가 가장 먼저 달려간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 곳에서 비로소 먼저 떠난 정든 친구들과 함께 보드카 잔을 오랜 만에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약력

  • 1945 소비에트연방 음악콩쿠르 우승
    1948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1950 스탈린상 수상
    1962 소련에서 지휘자 데뷔
    1968 영국에서 지휘자로 서방 데뷔 무대
    1974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77~1994 워싱턴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역임
    1978 소련 시민권 박탈
    1987 영국 명예 KBE훈장(외국인대상 명예훈장)
    1995 폴라음악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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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수도 바쿠에서 태어난 소련의 명 첼리스트. 부친은 바쿠 음악원에서 첼로의 교수를 하고 있었으나, 로스트로포비치가 4세 때 모스크바 구네신 음악학교로 옮겼기 때문에 집안이 이사하여, 이 부친에게서 7세 때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고, 10세로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뛰어난 성장을 보였다. 15세 때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해서 데뷔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부친을 잃었기 때문에 이듬해 1943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코조루포프에게 첼로를, 셰버린과 쇼스타코비치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재능은 더욱 더 빛을 보여, 재학 중인 45년에는 벌써 전 소련 음악 콩쿠르에 우승했고, 졸업 후 47년에 프라하 세계 청년 우호 콩쿠르. 49년에 부다페스트 국제 청년 콩쿠르, 50년에 프라하 국제 첼로 콩쿠르에 모두 제1위를 획득한다는 위업을 보였다.

 

이 동안 1948년부터 모교의 교수가 되고, 유럽 각국에서 공연도 가졌는데, 그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떨쳐지게 된 것은 1956년에 영국, 미국, 프랑스에서 연주하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때부터이다. 이후 미국과 유럽의 30 수개국을 순방하여 모두 경이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길렐리스, 코간과의 3 중주, 리히테르와의 소나타 협연 등 실내악에도 손대고, 독주에서는 1963년에 모스크바에서 11회나 이르는 첼로 협주곡 연속 연주회를 가져, 비발디에서 쇼스타코비치, 졸리베에 이르는 전 41곡을 연주한다는 전대 미문의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하여 프로코피에프, 하차트리안, 브리튼 등의 대작곡가가 다투어 그에게 작품을 헌정한 것도 당연하다. 현재 의심할 바 없이 세계 최고의 첼로 주자라고 칭할 수가 있으리라.

 

로스트로포비치는 근래 지휘자로서도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역시 첼리스트의 여기이기는커녕 전문 지휘자로서도 따를 수 없는 놀라운 표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반 콘서트는 물론이지만, 레코드 분야에서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전집과 같은 대작을 완성했고, 오페라에서는 본거지인 빈에서도J.슈트라우스의박쥐를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오페라 레코드에서도 푸치니의 토스카를 녹음하는 등 자기 나라 이외의 작품에도 손을 뻗치는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1977년부터는 워싱턴의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고, 78년에는 영국의 올드버러 음악제의 음악 감독을 겸임했으며, 또 지휘 이외에서도 피아노의 명수로서 부인인 명 소프라노 카비시네프스카야의 가곡 반주를 맡는 등 놀라운 솜씨를 자랑한다.

 

첼리스트로서의 로스트로포비치는 카잘스가 '종래의 첼로 연주의 관념을 뒤엎은 명인'이라고 절찬한 것처럼, 우선 비길데 없는 기교의 소유자이며, 아무리 어려운 패시지라 해도 균일한 음색으로 막힘이 없이 연주해 낸다. 볼륨도 지금까지의 연주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더구나 피아니시모의 섬세함도 비길데가 없어서, 놀라울 정도의 최약음까지도 회장의 구석구석까지 들리게 한다.

 

표현은 놀라운 웅변으로 일관된다. 조그만 감정의 움직임에 의해서 표정은 무한히 팽창되고, 어디까지에나 뻗어 나가서, 갖은 다채로운 기복을 나타낸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를 듣고 있으면, 명 바리톤 가수 피셔-디스카우를 연상케 한다. 이 양자만큼 탁월한 연주가도 드물 것이며, 그들만큼 예풍이 닮은 이도 드물 것이다. 신기에 가까운 기술의 날카로움과, 놀랍게 풍부한 감정 표출, 웅대하고도 부드러운 프레이징, 더구나 그것을 내부에서 단단히 뒷바침 하는 지성이 그들의 특징이다.

 

19804월에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서 그의 뛰어난 지휘 솜씨를 보였으며, 6월에는 첼리스트로서 내한 할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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