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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불꽃처럼 살다 간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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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들 이야기

2017. 7. 10.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불꽃처럼 살다 간 천재



Wolfgang Amadeus Mozart Symphony No. 29 in A major, K. 201 by Herbert Von Karajan

Symphony No. 29 in A major K. 201, the symphonies written by the 18-year-old Mozart in Salzburg after returning in the fall of 1773 from a trip to Vienna with his father, are easily his finest to that time in terms of expressivity and formal mastery.
Symphonie 29 by Herbert Von Karajan was released Jan 01, 2009
Symphony No. 29 in A major, K. 201
(K. 186a): 1. Allegro moderato
(K. 186a): 2. Andante
(K. 186a): 3. Menuetto
(K. 186a): 4. Allegro con spirito



불꽃처럼 살다 간 서양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출생1756년 01월 27일
사망1791년 12월 05일
국적 오스트리아
대표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피아노 소나타 제11번〉, 〈클라리넷 5중주〉 등

서양 음악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등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서양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이다.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추구했으며,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합창곡, 성악곡 등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오로지 아들의 음악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모차르트는 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건반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6살 무렵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건반악기 주자가 되었으며, 오르간과 바이올린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작곡에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해 6살 때 미뉴에트, 8살 때 교향곡, 11살 때 오라토리오, 12살 때 오페라를 작곡하는 기록을 세웠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나이 6살이 되던 1762년,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를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다. 이것이 모차르트 일가의 첫 번째 연주 여행이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을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썼다.

연주 중인 모차르트와 누나 나넬, 아버지 레오폴트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했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 궁정을 방문해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으며, 여기서 쇼베르트의 건반음악과 글룩의 오페라를 감상했다.

1764년, 모차르트 일행은 프랑스 칼레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는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찬 바흐와 그의 동료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모차르트 가족은 1765년 겨울은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인 길, 겐트, 로테르담, 헤이그를 여행했으며, 1766년에는 프랑스의 파리, 디종, 스위스의 제네바, 로잔, 베른, 취리히, 빈터투르, 딜링겐,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그해 11월,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1768년,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빈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 〈바보 아가씨(La Finta Semplice)〉와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를 작곡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다. 빈에서는 오페라 외에 바이젠호이스 성당의 헌당식을 위한 미사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769년 말부터 1773년까지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밀라노의 사마르티니를 비롯해 이탈리아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를 여행했으며, 특히 로마에서는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밀라노에서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를 초연했으며, 파도바에서 오라토리오 〈풀려난 베툴리아(La Betulia Liberata)〉의 작곡을 위촉받았다.

1773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가 되었다.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 현악 4중주, 소나타, 미사곡, 세레나데, 오페라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런 성공에도 그는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했다. 1년에 150플로린밖에 되지 않는 낮은 보수와 오페라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뮌헨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

1777년 8월, 그는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가 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파리, 뮌헨 등을 방문했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에서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제안했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여행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들을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이려고 애썼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연봉은 450플로린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를 마지못해 수락했으며,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는 길에도 만하임과 뮌헨에 들러 다른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할 수 없이 1779년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 후로도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1781년,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가 뮌헨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해 3월,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과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에 머물고 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소환을 받았다. 대주교의 부름을 받고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그가 자기를 종처럼 취급하는 것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툰 백작부인이 그에게 연주회를 제안했다. 잘츠부르크에서 그가 받던 보수의 절반이 넘는 연주료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대주교가 이것을 금지했다. 이 일로 불만이 극에 달한 모차르트는 대주교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자신을 해고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대주교는 매우 모욕적인 방식으로 그를 해고했다.

이렇게 해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결별한 모차르트는 그 길로 빈으로 갔다. 대주교와 화해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강요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무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았다. 고용주의 속박에서 벗어난 모차르트는 마음껏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수없이 많은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1782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독일 오페라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의뢰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Die Entfuhrung aus dem Serail)〉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전까지 오페라는 대개 이탈리아어로 쓰였는데,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통해 독일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오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다.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와 더불어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이해에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

1786년과 1787년,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과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런 걸작들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으면서 모차르트는 대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는 안정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실 가족이나 귀족 앞에서 연주를 하거나 귀족 자제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터키 간의 전쟁으로 귀족과 왕실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수입이 줄었다.

1787년 12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빈에 잡아 두기 위해 파트타임 일자리를 제안했다. 리도우텐 홀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무도회를 위한 춤곡을 작곡하고 일 년에 800플로린을 받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모차르트에게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1788년, 모차르트 가족은 빈 근교로 이사를 갔다. 집세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아주 비굴한 어조로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도 썼다. 1789년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재정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포츠담,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등지를 방문했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극심한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었다.

그해 6월, 빈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왕실로부터 새로운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것이 1790년에 초연된 〈여자는 다 그래(Così fan tutte)〉이다. 이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발표한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ote)〉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 익명의 사람에게 〈레퀴엠(Requiem)〉 작곡을 의뢰받고 곡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1791년 12월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6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여흥을 위한 가벼운 음악부터 본격적인 연주회용 음악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가 여흥을 위해 작곡한 음악에는 세레나데와 디베르티멘토가 있다. 이 중 세레나데는 본래 밤에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는 노래였는데, 나중에는 기악으로 연주하는 모음곡 형태로 발전했다. 모차르트는 주로 귀족들의 오락이나 축제, 사교 모임을 위한 가벼운 음악으로 세레나데를 작곡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Eine kleine Nacht Musik)〉인데, 이것은 독일어로 '작은 밤음악(小夜曲)'이라는 뜻이다. 1787년 작으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느린 로망스, 3악장 독일 민속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활발한 분위기의 론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1776년 잘츠부르크 시장 하프너의 딸 엘리자베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쓴 세레나데 제7번 '하프너(Haffner)', 우편마차나 역마차에서 사용하는 나팔을 6악장에 도입한 세레나데 제9번 '포스트호른(Posthorn)'이 있다.

모차르트는 독주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20여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41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 피아노는 여성의 악기로 널리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가볍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며, 대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서정적인 아다지오나 안단테, 3악장 카덴차가 있는 경쾌한 론도로 구성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3악장에 '터키 행진곡(Turkischer Marsch)'이 나오는 제11번이다. 대개의 소나타는 1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곡은 1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악장은 미뉴에트이며, 3악장이 행진곡풍의 론도로 작곡된 '터키 행진곡'이다.

실내악에서는 현악 4중주, 피아노 5중주, 현악 5중주, 클라리넷 5중주, 플루트 4중주, 오보에 4중주, 혼 5중주 등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남겼다. 대개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다. 이 장르의 대표곡으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789년에 작곡한 〈클라리넷 5중주〉가 있다. 악기 편성은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현악 4중주 편성에 클라리넷 한 대가 추가된 형태이다.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목가적인 분위기의 느린 악장, 3악장 우아한 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변주곡 형식의 경쾌한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클라리넷과 현악 4중주가 서로 대응 관계를 이루며 음악을 이끌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모차르트는 근대적인 의미의 협주곡 양식을 처음으로 완성시킨 작곡가로 꼽힌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45곡이나 작곡했는데, 독주 악기의 종류도 피아노, 바이올린,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보에, 혼, 클라리넷, 바순, 플루트, 플루트와 하프 등으로 다양하다. 이 중 바이올린 협주곡은 대부분 20세 때 작곡한 것으로 아름다움과 예술적 완성도에서 있어서 나이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여 준다. 한편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25곡으로 대부분 장조로 작곡되었다. 하지만 1785년에 쓴 제20번만은 이례적으로 단조로 되어 있다. 피아노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곡은 고전주의를 넘어 낭만주의를 예고하는 협주곡으로 알려져 있다. 극적인 내용과 스케일의 방대함이 가히 교향곡에 비견할 만하다. 1악장 교향곡처럼 장대한 스케일의 소나타 형식, 2악장 노래하듯 연주하는 로망스, 3악장 활달한 론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역시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모차르트는 8살 때인 1764년에 처음 교향곡을 쓰기 시작해 1788년까지 24년 동안 모두 41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은 대체로 하이든이 세운 교향곡의 틀, 즉 빠른 템포의 1악장과 4악장 사이에 느린 2악장과 미뉴에트풍의 3악장이 들어가는 고전주의 교향곡의 모범을 따르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이탈리아풍과 규모가 큰 빈풍으로 대별된다. 대부분의 교향곡이 장조이며, 25번과 40번만 단조로 작곡되었다. 41곡 중 마지막에 작곡한 〈교향곡 제39번〉, 〈교향곡 제40번〉, 〈교향곡 제41번 '주피터'〉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중에서 1788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40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1악장은 서주 없이 곧바로 제1주제로 들어가는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율이다. 느린 템포의 2악장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분위기가 고조된다. 3악장은 소박한 민요풍의 미뉴에트 악장이며, 4악장은 높은 음역의 경쾌한 동기와 격렬하고 극적인 모티브가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썼는데, 독일어 오페라로는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마술피리〉가 있고, 이탈리아어 오페라로는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여자는 다 그래〉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는 1786년에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이다. 이 작품은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하나로 줄거리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후편에 해당된다. 사랑하는 로지나와 결혼한 알마비바 백작은 결혼 후에도 천성적인 바람기를 버리지 못하고 피가로와의 결혼을 앞둔 하녀 수잔나를 차지하려 한다. 이런 백작의 마음을 알아챈 백작부인과 수잔나, 피가로가 서로 짜고 백작을 골려 준다는 것이 오페라의 줄거리이다. 1막에서 피가로가 부르는 〈더 이상 못 나르리(Non piu andrai)〉, 2막에서 백작부인이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부르는 〈사랑을 돌려주오(Porgi amor)〉, 사랑에 눈뜬 소년 케르비노가 부르는 〈사랑의 괴로움 그대 아나(Voi che sapete)〉, 3막에서 백작부인이 옛날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어디로 갔나 그 시절은(Dove sono)〉,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편지를 쓰면서 부르는 편지의 이중창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Che soave zefiretto)〉가 유명하다.

〈피가로의 결혼〉 1막 중 한 장면을 그린 그림. 백작과 만나는 수잔나. 의자에는 케르비노가 숨어 있다.

1791년, 모차르트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로부터 〈레퀴엠〉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모차르트는 심신이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지만 적지 않은 보수를 준다는 말에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은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눈물의 날에(Lacrimosa dies illa)〉의 앞부분까지만 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머지는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가 남긴 초고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교회음악의 하나로 꼽힌다. 연주자로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독창자과 합창단, 오케스트라가 참여한다. 〈입제창(Requiem aeternam)〉,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진노의 날(Dies irae)〉, 〈놀라운 나팔소리(Tuba mirum)〉, 〈위엄과 공포의 왕(Rex tremendae majestatis)〉, 〈자비로운 예수(Recordare, Jesu Pie)〉, 〈꺼지지 않는 불길(Confutatis maledictis)〉, 〈눈물의 날에〉, 〈영광의 왕 예수 그리스도(Domine Jesu Christe)〉, 〈찬양과 기도의 제물(Hostias)〉, 〈거룩하시다(Sanctus)〉, 〈축복 있으라(Benedictus)〉, 〈신의 어린 양(Agnus Dei)〉, 〈영원한 빛(Lux aeternam)〉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도 교회음악으로 〈C단조 미사〉와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 합창곡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모테트 〈춤추고 기뻐하라. 복된 영혼이여〉 등이 있다.



진회숙 집필자 소개

이화여대 음대에서 서양음악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을 공부했다. 1988년 월간 「객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에 '한국 음악극의 미래를 위하여'라는 평론으로 수상, 음악평론가로 등단했고, 「객석」, 「조선일보」, 「한국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 매체에 예술평론과 칼럼을 기고했다. 이후 KBS와 MBC에서 음악프로그램 전문 구성작가로 활동하며 MBC FM의 「나의 음악실」, KBS FM의 「KBS 음악실」, 「출발 FM과 함께」, KBS의 클래식 프로그램인 「클래식 오디세이」 등의 구성과 진행을 맡기도 했다



초기생애와 작품

초기생애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작곡가이자 잘츠부르크 대주교 악단의 부악장이었으며 어머니 아나 마리아(결혼 전 성은 페르틀)는 장크트 길겐 출신인 공무원의 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1751년 7월 30일에 태어난 딸 마리아 아나(나네를로 알려졌음)와 볼프강만이 살아 남았다. 모차르트는 요아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라는 긴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지만 테오필루스가 독일어로는 Gottlieb, 라틴어로는 Amad였기 때문에, 후에 그는 자신의 편지나 작품에 W. A. Mozart, 혹은 Wolfgang Amad Mozart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볼프강과 누이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아버지로부터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비록 바이올린 연주자나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볼프강이 태어나던 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처음 출판한 그의 이론서 〈기본 바이올린 교습법 시론 Versuch einer gründichen Violinschule〉은 그가 죽고 오래지 않아 세계 각국어로 출판되었다. 1778년 2월 16일에 레오폴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모차르트의 어린시절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린시절 너는 어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른스러웠으며 네가 클라비어에 앉아 있거나 음악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아무도 감히 너에게 농담조차 걸 수 없었다. 심지어 너무나 엄숙한 너의 연주와 일찍 개화한 너의 재능과 생각에 잠긴 진지한 네 작은 얼굴을 지켜보았던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네가 오래 살 수 있을지 걱정했다."

5세에 볼프강은 미누에트와 소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하프시코드와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하게 되었다.

1770년대말경 점차 공개적인 바이올린 연주와 피아노 협연을 그만두었으며 그때 이미 정상급의 대가가 되어 있었다. 레오폴트는 시골 잘츠부르크에서보다 두 자녀의 재능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고 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볼프강과 나네를에게 여러 차례 유럽 여행을 하도록 해 따로 또는 함께 연주할 기회를 마련했다.

초기 연주여행

1762년에 있었던 첫 연주여행은 뮌헨·빈·프레스부르크·빈을 거쳐 1763년 1월 5일에 잘츠부르크로 되돌아오는 경로였다.

1763년 6월 9일부터 1766년 11월 30일까지 계속된 이 긴 첫번째 유럽 대여행에서 볼프강은 남부 독일의 주요도시를 포함하여 라인란트·브뤼셀·파리(1763~64 겨울에 볼프강은 이곳에서 그의 첫 작품인 K.6~9의 바이올린 소나타 4곡을 출판했음)를 순회했으며 그후 1년 6개월 동안 런던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모차르트 일가의 벗이 되었으며 모차르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그의 동료인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첫 교향곡들인 K.16과 K.19를 작곡했다(쾨헬). 모차르트에 대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763년대의 모차르트


1765~66년 겨울을 네덜란드에서 보낸 모차르트는 브뤼셀·파리·제네바·베른·뮌헨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모차르트 일가는 1767년 9월 11일 2번째 빈 여행을 떠나 1769년 1월 5일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빈에서 볼프강은 첫번째 독일 오페레타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 Bastien und Bastienne〉 K.50을 작곡했다(징슈필). 1768년 12월 7일 바이젠호이스 성당의 헌당식을 위해 미사곡과 다른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황제 앞에서 그 작품들을 지휘했다.

그가 잘츠부르크로 돌아오자 언제나 모차르트 일가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인자한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 주교는 빈에서 거절당했던 〈보아라, 바보 아가씨 La finta semplice〉 K.51을 자신의 궁정에서 연주하도록 했으며 볼프강을 콘체르트마이스터로 임명했다(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는 거의 있지 않았으므로 급료는 없었음).

이탈리아 여행

1769년 12월 13일부터 1771년 3월 28일까지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로베레토·베로나·밀라노·파르마·볼로냐·피렌체·로마·나폴리를 차례로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레오폴트와 볼프강은 3개월 동안 볼로냐에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볼프강은 파드레 마르티니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밀라노에서 의뢰받아 작곡한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Mitridate, rè di Ponto〉 K.87은 1770년 12월 26일 밀라노 테아트르 레조 두칼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20번이나 재공연되었다.

1771년 3월에 파도바에 간 모차르트는 새 오라토리오 〈구원받은 베툴리아 La Betulia liberata〉 K.118을 의뢰받아 작곡했다. 1771년 8월 13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2번째 이탈리아 여행 중 볼프강은 밀라노에 들러 극적 세레나타 〈알바의 아스카니오 Ascanio in Alba〉 K.111을 작곡·지휘했는데 이 작품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과 모데나의 공주 마리아 베아트리체의 결혼식을 위해 의뢰한 곡이었다.

그는 4주 만에 전곡을 완성했으며, 1771년 10월 17일에 있었던 공연은 전날 있었던 요한 아돌프 하세의 오페라를 '무색하게 할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1772년 10월 24일에서 1773년 3월 13일까지의 3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밀라노의 레조 극장 의뢰로 오페라 세리아인 〈루초 실라 Lucio Silla〉 K.135를 작곡하여 1772년 12월 26일 초연했다. 이 오페라는 그의 음악양식 발전에 있어 중요한 경계선을 이루는 작품으로 세부적인 표현과 처리가 적절하며 특히 관현악 처리가 완벽하고 풍부하다.

한편 슈라텐바흐 대주교가 죽고 구르크 주교인 콜로레도의 백작 히에로니무스가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모차르트와 새로 부임한 대주교의 관계는 결코 이전의 대주교와의 관계처럼 친밀하지 못했다. 1772년 4월 29일의 대주교 취임식을 위해 모차르트는 축전 오페라 〈시피오네의 꿈 Il sogno di Scipione〉 K.126을 작곡했다. 밀라노에 있는 동안 그는 〈루초 실라〉에 출연했던 뛰어난 가수인 라우치니를 위해 그 유명한 모테트 〈춤추라, 기뻐하라, 너 행복한 영혼이여 Exsultate, Jubilate o vos animae beatae〉 K.165를 작곡했다.

빈·잘츠부르크·뮌헨 여행

1773년 7월 14일~9월 26일 모차르트 일가는 다시 빈을 방문했다.

모차르트 부자는 황실의 직책을 희망했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빈에서 하이든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770년대초의 많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예를 들면 플로리안 레오폴트 가스만, 카를로스 오르도네스, J. B. 반할 등)들의 음악양식과 마찬가지로 하이든의 양식도 당시 이미 급진적인 변화를 겪은 뒤였다. 새로운 하이든의 양식은 가벼운 로코코 음악으로부터 갑자기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독일의 문예운동을 일컫는 용어 질풍노도는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폰 클링거가 쓴 개성이 강한 연극의 제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혁명'은 독일의 문예운동보다 몇 년 앞서 있었으며 질풍노도는 1767~68년에 이미 하이든과 함께 시작되었다. 1772년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작품 20에서 영향을 받아 6곡의 현악 4중주(K. 168~173)를 작곡했으며 폭풍우와도 같은 그의 〈교향곡 G단조〉 K.183은 그 시대 빈 교향곡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2대가 아닌 4대의 호른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1773년 후반과 1774년 한 해 동안 모차르트 일가는 잘츠부르크에 머물렀는데 볼프강은 작곡에 몰두했다. 그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아마도 〈바순 협주곡 B♭장조〉 K.191과 4곡의 교향곡(K.199~202)으로, 이 가운데 교향곡 A장조 K.201이 가장 유명하다.

모차르트 부자는 1774년 12월 6일부터 1775년 3월 8일까지 뮌헨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볼프강은 오페라 부파 〈가짜 여정원사 La finta giardiniera〉 K.196을 작곡했는데 이것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모차르트가 선제후 밑에서 일하려고만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으나 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1777년 후반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곡을 작곡했는데 그 가운데는 다른 작곡가들이 이미 많이 써먹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 곡을 붙인 매혹적이고 세련된 오페라 〈양치기 임금님 Il rè pastore〉 K.208이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모차르트는 몇몇 그의 미사곡에서 대중적이고 '민속적인' 미사를 시도했으며 그 가운데 〈미사 C장조〉(크레도 미사)가 특히 뛰어났다. 이 밖에도 유명한 5곡의 바이올린 협주곡(K.207·211·216·218·219)을 비롯해 현과 케틀드럼을 위한 매혹적인 〈세레나타 노투르나 Serenata notturna〉 K.239와 길고 웅장한 〈세레나데 D장조(하프너 세레나데)〉 K.250을 포함한 여러 곡의 세레나데와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했다.

후에 모차르트는 〈하프너 세레나데〉를 기초로(케틀드럼을 추가하는 등 여러 가지 변형을 통해)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기이하게도 이 작품은 주목을 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쾨헬 번호도 없다. 모차르트는 그의 음악 세계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었던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작품(뒤르니츠 남작을 위한 6곡의 소나타 K.279~284, 3중 협주곡 K.242, 2곡의 협주곡 K.238·246) 등도 작곡했다.

모차르트와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관계는 점점 긴장감을 더해갔으며 1777년 8월의 어느 날 모차르트는 자신의 해직을 청원했다. 8월 28일의 회신에서 대주교는 모차르트 부자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나, 1781년에는 결국 모차르트와 대주교 사이에 파탄이 오고 말았다.

파리·잘츠부르크·뮌헨 여행

1777년 9월에 모차르트와 그의 어머니는 독일과 파리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났으며 모차르트는 파리에서 영구적인 일자리를 얻기를 희망했다.

뮌헨을 거쳐 만하임에 온 모차르트는 그곳에서 필경사이면서 무대 뒤에서 배우에게 대사를 읽어주는 일을 하는 프리돌린 베버의 둘째 딸 알로이지아와 사랑에 빠졌다. 알로이지아는 매우 뛰어난 기교를 가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으며 모차르트는 그녀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파리에서 모차르트는 전혀 돈을 벌지 못했으며 1778년 7월 3일 어머니가 죽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뮌헨으로 이사가 있던 베버가(家)에 들렀으나 알로이지아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다"라고 썼다. 오랜 귀행 여로 끝에 그는 1779년 1월 중순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여행중에 작곡한 많은 곡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6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K.301~306(여기에 7번째 소나타인 K.296이 추가되어야 함)과 2~3곡의 피아노 소나타(A단조 K.310을 포함), 〈하찮은 것 Les Petits riens〉(장 조르주 노베르의 발레를 위해 파리에서 작곡), 콩세르 스피리튀엘의 조제프 레그로를 위한 3곡의 교향곡이 있으며, 이 교향곡 가운데 교향곡 31번 D장조인 〈파리 교향곡〉 K.297만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동안 많은 궁정 음악가들이 잘츠부르크에서 죽자 모차르트는 1779년 1월 이전에 안톤 카제탄 아들가서가 맡고 있다가 공석이 된 궁정 오르간 연주자에 응모했고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1779년 한 해와 1780년 대부분을 잘츠부르크에서 지내면서 모차르트의 음악은 일관된 위대함을 보여주는 첫 시기에 돌입하게 된다. 새로이 나타나는 성숙함은 점차 모차르트 음악에서 그 중요성으로 인정받고 있는 어두운 색조와 더불어 이 시기의 모든 작품에 나타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일련의 교회음악(2곡의 C장조 미사곡, 〈대관식 미사〉 K.317, 〈장엄 미사〉 C장조 K.337 등)과 극적이면서 극히 현대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집트 왕 타모스 Thamos, König in Ägyten〉 K.245(이 작품을 통해 에마누엘 시카네더와 만나게 됨)를 위한 음악, 2곡의 교향곡(이 가운데 〈교향곡 34번 C장조〉 K.338은 당시 오스트리아 교향곡 가운데 수작으로 꼽힘), 〈바이올린·비올라·관현악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장조〉 K.364가 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관현악 세레나데인 〈세레나데 D장조〉(포스트 호른 세레나데, K.320)가 있는데 후일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줄이고 수정하여 하프너 세레나데로부터 유행한 교향곡의 형태로 개작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동안 모차르트는 뮌헨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 정가극 〈이도메네오 Idomeneo〉 K.336과 발레음악 K.367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1780년 11월 초와 1781년 1월 29일에 뮌헨을 방문했으며 이 새로운 오페라는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대주교는 빈에 있었으며 레오폴트와 나네를은 볼프강의 새로운 성공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왔다.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가 절정에 있는 자신의 역량을 과시한 최초의 극음악이었으며 비록 정가극이라는 낡은 형식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음악이 너무나 심오·화려하며 관현악 처리 또한 절묘하여 잘츠부르크 궁정 사제인 아바테 바레스코의 진부한 대본을 사용했음에도 극적 효과가 뛰어났다. 뮌헨에서 작곡한 그밖의 작품 가운데에서는 〈키리에 D단조〉 K.341과 13대의 목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B♭장조〉 K.361이 단연 돋보인다.

〈세레나데 B♭장조〉는 목관악기와 특히 클라리넷족(族) 악기(바셋 호른을 포함한)에 대한 새롭고 독창적인 처리를 보여주고 있다. 모차르트는 전 세대 작곡자들이 그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클라리넷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781년 3월초 모차르트는 대주교의 소환을 받고 3월 16일 빈에 도착했다. 그는 툰 백작 부인과 코벤츨 백작을 비롯한 많은 빈 귀족들의 후원을 얻었으며, 콜로레도 대주교는 자신이 거느린 젊은 작곡가의 영광을 함께 누렸으나 자신의 자택 이외의 장소에서 모차르트가 연주하는 것을 금했으며 하인과 함께 식사하도록 강요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 관계는 곧 극에 다달아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썼고 모차르트는 사임했으나 그후로도 공식적인 해고 통지는 없었다.


후기생애와 작품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와 헤어진 후 완전히 독립하였으며 이로써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이후 공식적인 후원 없이 자립을 감행한 최초의 작곡가가 되었다.

몇 년 간의 기다림의 세월이 지난 끝에 1787년 12월 7일 황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연봉 800굴덴(그의 선임자였던 글루크는 2,000굴덴을 받았음)에 궁정 작곡가로 임명했다. 많은 연주회에서 황제의 갈채를 받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와는 별도로 그는 1778년 황제가 설립한 국립 징슈필을 위한 독일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의 작곡을 청탁받았다.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무리가 음모를 꾸몄지만 1782년 7월 16일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뮌헨에서 빈으로 이사한 베버가와 함께 살게 되었으며 셋째 딸 콘스탄체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782년 8월 4일에 장크트슈테판 성당에서 결혼했다. 콘스탄체에 대해서는 변덕스러운 성격에 악처였다는 등 비판이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했으며 모차르트는 일생 동안 콘스탄체에게 애정이 담긴 편지를 썼다.

모차르트는 곧 부르크 극장이나 멜그루베에서 자신의 예약 연주회를 열기 시작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으며 즉흥 연주도 했다. 그의 K.413~595의 위대한 피아노 협주곡은 대부분 이러한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의 구조와 기계적 장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발전과 완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지만 그의 경제사정은 안정적인 때가 결코 없었다.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을 작곡하기 직전에 모차르트는 그의 생애 중 가장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장크트슈테판 성당 뒤쪽의 안락한 거처에서 살았다. 그러나 1785~91년에 점차 재정상태가 악화일로를 치달으면서 그는 친구들, 특히 프리메이슨 단원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돈을 빌려쓰게 되었다(모차르트는 열성적인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음). 모차르트가 가장 부담없이 돈을 빌렸던 사람은 동료 메이슨과 은행가였던 미하엘 푸흐베르크였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빚에 대한 부담은 죽을 때까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볼프강과 콘스탄체는 1783년 8월과 9월 그리고 10월에 아버지와 누이 나네를을 방문했으나 그들의 방문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아버지와 누이 또한 콘스탄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1783년 8월 장크트페터 성당에서 미완성인 채 남아 있는 〈미사 C단조〉 K.427의 연민송(Kyrie)과 영광송(Gloria)을 연주했다.

비록 미완성이기는 했지만 미사곡은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의 일요 연주회에서 보여주었던 바흐와 헨델에 대한 모차르트의 연구가 결실을 맺은 숭고한 작품이다. 빈에 있는 국립도서관의 책임자였던 슈비텐 남작은 후에 하이든과 친교를 가졌으며 젊은 베토벤의 후원자가 되었다.

마지막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을 작곡할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이때에 작곡된 교향곡들은 모두 걸작이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세레나데를 개작한 교향곡 〈하프너 Haffner〉 K.385, 1783년 10월과 11월에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작곡한 〈린츠 Linz〉 K.425, 보헤미아의 수도를 위해 작곡한 〈프라하 Prague〉 K.504, 그리고 마지막 3곡의 교향곡(E♭장조 K.543, G단조 K.550, C장조 〈주피터 Jupiter〉 K.551) 들이 이때 작곡되었다. 특히 마지막의 네 교향곡은 하이든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때까지 작곡된 그 어떤 작품도 따를 수 없는 18세기 교향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레오폴트는 1785년 2월 11일부터 1785년 4월 25일까지 아들 내외와 함께 있으면서 아들의 물질적·예술적 성공을 지켜보았다.

그때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헌정한 6곡의 현악 4중주(K.387·421·428·458·464·465)를 완성하는 중이었으며 그 가운데 마지막 3곡이 하이든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차르트의 집에서 연주되었다. 이때 하이든은 레오폴트에게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말하거니와 당신의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6곡의 현악 4중주에서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제외한 그 어떤 작곡가보다 이 형식을 다루는 데 있어 앞선 완숙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후속 작품 D장조 K.499와 〈프로이센〉에서도 실내악의 중심인 현악 4중주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의 현악 4중주는 모차르트의 현악 5중주(이 가운데 C장조 K.515와 C단조 K.516이 유명하지만 D장조 K.593도 훌륭한 작품임)를 제외하고는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이후 10년 동안 작곡한 대표적인 오페라로는 1786년 5월 1일 빈에서 초연된 〈피가로의 결혼〉 K.492,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에서 초연된 〈돈 조반니 Don Giovanni〉 K.527, 1790년 1월 26일 빈에서 초연된 〈여자는 다 그런 것 Così fan tutte〉 K.588이 있는데 모두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에 의한 것이다.

〈여자는 다 그런 것〉은 앞서 두 작품과는 달리 초연에서 실패했는데 요제프 2세의 사망으로 야기된 빈의 혼란이 그 부분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쓴 〈황제 티투스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 K.621은 새로운 황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을 위해 보헤미아의 의회가 위촉한 작품이다. 시카네더에게 돈과 명성을 가져다 준 〈마술피리 Die Zauberflöte〉(에마누엘 시카네더의 대본) K.620은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으나 청중들은 곧 기계장치까지 동원된 희극적인 요소와 동화의 세계, 프리메이슨적 이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생명을 주는 모차르트의 환상적인 음악에 매혹되었다.

경제적 곤란을 겪는 아내를 구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서 모차르트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떠났다.

그는 제자이자 후원자인 카를 리흐노프스키 공작(뒤에 그는 베토벤의 확고한 후원자가 되었음)과 함께 1789년 4월 8일 빈을 떠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이곳에서 그는 J. S. 바흐의 필사본을 구했음)·베를린·프라하를 방문하고 1789년 6월 4일 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행의 결과로 얻은 재정적 수입은 프랑크푸르트로 떠났던 마지막 연주여행에서와 마찬가지로 형편없었다. 결국 그는 빚더미 속에 빠졌고 결국 그의 재정상태는 파산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791년 여름, 어떤 낯선 사람이 찾아와 〈진혼 미사곡 Requiem Mass〉 K.626을 의뢰하자 모차르트는 신비스런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실 그 사람의 배후에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려는 의도에서 이 일을 꾸민 아마추어 음악가인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 프란츠 하비어 쥐스마이어는 구술을 통한 지시와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하여 발제크에게 주었다.

1791년 늦가을 모차르트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그의 갑작스런 쇠약과 죽음은 곧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낳았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에 발표된 카를 베어의 의학적 연구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이미 어린시절 류마티즘열로 심장에 무리가 있었으며 1791년 12월 같은 병으로 인한 심장의 충격과 과다한 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1791년 12월 5일 빈에서 사망했으며 다음날 묘를 파는 인부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크트마르크 묘지에 묻혔다. 홀로 남은 콘스탄체는 엄청난 빚더미 속에서 절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받았다.

그녀는 후일 덴마크의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결혼했으며 1842년 잘츠부르크에서 죽었다.


평가

주요작품 대부분이 사후에야 출판되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자신의 계파를 만들지 못했다. 비록 1795년경에 이미 그의 오페라들이 독일 전역에 퍼져 있었지만 같은 해 런던에는 그의 작품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낭만주의시대에 모차르트는 바흐와 베토벤을 제외한 그 어떤 음악가도 근접할 수 없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과 심오함, 완전함은 청중들의 찬탄과 기쁨을 자아내고 있다.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고 그중에도 특히 오페라의 등장인물에 성격을 부여하는 능력은 아마도 베르디를 제외한 그 어떤 작곡가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의 유물에 대해 향수를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인류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서양 음악이 이룩한 완전함의 극치를 찾을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교향곡 제29번 A장조

Symphony No.29 in A major, K.201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Mozart - Symphony No. 29 in A major, K. 201

I. Allegro moderato [4:52]
II. Andante [7:10
]
III. Menuetto - Trio [4:07
]
IV. Allegro con spirito [4:32
]

모차르트의 교향곡 창작 이력은 상상 이상으로 길다. 그가 첫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여덟 살 때인 1764년, 런던 체류 중의 일인데, 이것은 그보다 24세나 연상이었던 요제프 하이든보다 겨우 5년 늦은 출발이었다. 그 후 그의 교향곡 창작은 이른바 ‘3대 교향곡’으로 불리는 마지막 세 작품이 나오는 1788년 여름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모차르트는 불과 35년 남짓한 생애 중에서 무려 25년간에 걸쳐 교향곡 창작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 25년 가운데 1773년 10월 초에서 1774년 4월 초에 이르는 6개월간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의 교향곡 양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1773년 여름에 빈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 모차르트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교향곡 두 편을 쓰게 된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이탈리아 풍 ‘신포니아’ 스타일에서 탈피하여 오스트리아적인 스타일로 전향했고, 나아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두 교향곡은 바로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이 ‘기적과도 같은 작품들’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제25번 g단조]와 [제29번 A장조]였다.

1773년 3월,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억류될 위기에 처했다. 주군인 콜로레도 대주교가 그에게 궁정악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작곡을 해야 했고 궁정악단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서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라야 했다. 여느 음악가라면 그런 안정된 직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모차르트에게 있어서 한 곳에, 그것도 잘츠부르크처럼 답답한 곳에 얽매인다는 것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름이 되자 솔깃한 정보가 들려왔다. 빈(Wien)의 궁정악장인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Gassmann)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것이 아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즉, 가스만이 물러나 빈 궁정악단에 빈자리가 생기면 거기에 아들을 앉혀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제국의 수도인 빈은 음악적인 환경면에서 잘츠부르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로운 도시였고, 무엇보다 아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오페라를 작곡할 기회가 많은 곳이었다. 그래서 대주교가 요양차 자리를 비우는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휴가를 얻어 아들과 함께 빈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알현한 순간, 그들의 기대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셨소. 그러나 그뿐이었소.”


비록 희망은 좌절되었지만 보상은 있었다. 당시 빈의 문화계에서는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사조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클롭슈토크, 레싱, 괴테의 문학작품들이 인기를 끌었고, 강렬한 기운과 비장한 색채를 내세운 가스만, 하이든, 글루크 등의 음악작품들이 각광을 받았다. 그러한 빈의 분위기는 사춘기 소년 모차르트의 영감을 자극했고, 그는 거기서 거둔 예술적 수확을 바탕으로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직후에 자신의 첫 번째 단조 교향곡인 [교향곡 제25번 g단조]를 작곡했던 것이다. 이 곡을 완성한 것은 1773년 10월 5일의 일이었다.

 

한편 그로부터 6개월 후, 모차르트는 다시금 진일보한 교향곡을 선보인다. 이번에는 함께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에 몸담고 있던 미하엘 하이든(Michael Haydn)의 영향을 받았는데, 미하엘은 다름 아닌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이었다. 모차르트는 형인 요제프보다 덜 유명하면서 시인 같은 풍모를 지닌 미하엘 하이든에게 남다른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미하엘의 많은 작품들에 대해서 통째로 베껴볼 가치가 있을 정도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가 1774년 4월 6일에 완성한 [교향곡 제29번 A장조]도 미하엘의 [A장조 교향곡]과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물론 세부의 처리에 있어서는 모차르트의 작품이 더 세련되고 뛰어나다.



제 1 악장 : Allegro moderato, A장조, 4/4박자

소나타 형식 곡은 먼저 제1바이올린에 의해 제1주제가 점차 음량을 증대시키면서 저성부에 대선율을 수반하여 나타난다. 이 주제는 옥타브의 도약과 반음계적 진행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특징적인 선율이다.


제 2 악장 : Andante, D장조, 2/4박자



소나타 형식 쾌활한 제1악장과 대조적으로 단아하고 유려한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점음표의 탄력있는 리듬으로 된 제1주제가 나오고 이것이 반복되지만 이때에 나오는 대선율의 아름다움은 매우 인상적이라 할수있다.


제 3 악장 : Menuetto, A장조, 3/4박자


복합 3부 형식 점음표가 붙은 활기있고 리드미컬한 주제의 미뉴에트와, 이에 비해 그의 만년의 작품인 “독일 무곡”의 악상을 연상케 하는 유창한 트리오의 중간부는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악상으로 전개되어 진다.


제 4 악장 : Allegro con Spirito, A장조, 6/8박자


소나타 형식 곡은 마치 론도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경쾌한 곡상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만은 않은 견고한 구성미를 가지고 있다. 신선하고 발랄한 제1주제와 유동적인 제2주제는 잘 균형을 유지하고 있고, 전개부에서는 제1주제의 전반 동기만을 가지고 전개시켜 가지만 단조롭지만은 않은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물론 작곡기법이 상당히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 곡은 관례에 따라 재현부에서 제시부로 반복되며 곡을 끝맺는다.


Mozart Symphony No. 29 K. 201
Wiener Philharmoniker - Karl Bohm

1st. Mov. - Allegro moderato


2nd. Mov. - Andante


3rd. Mov. - Menuetto

4th. Mov. - Allegro con spirito

 

교향곡 제29번 A장조


이 매혹적인 교향곡은 사람들이 모차르트에게 기대하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즉, 경쾌하고 우아하며 생동감이 넘칠 뿐 아니라, 듣는 이 누구에게나 행복감을 만끽하게 만드는 ‘해피 에너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이 곡에서 이탈리아적인 양식과 오스트리아적인 양식을 절묘하게 융화시켰다. 즉, 이탈리아적인 유창한 선율미와 화사한 색채감을 오스트리아적인 체계적인 형식과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던 것이다. 특히 각 성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주선율과 화성이 섬세하게 얽히는 등 실내악적인 서법이 두드러지는데, 이 역시 빈에서 접한 음악들의 영향이었다. 아울러 첫 악장과 끝 악장에서 볼 수 있는 주제의 통일성, 미뉴에트를 제외한 모든 악장을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한 점, 제시부는 물론이고 발전부와 재현부도 반복하며 그 뒤에 코다를 붙인 점 등도 빈에서 배운 것이었다.

 

제1악장은 제1바이올린이 청초한 주제선율을 꺼내놓으면 다른 현악기들이 실내악적으로 정교하게 움직이면서 출발한다. 마치 파도의 일렁임을 연상케 하는 그 움직임이 서서히 힘을 더해가서 포르테(forte)에 이르면 관악기들도 가세하여 주제를 반복하고, 비올라와 첼로는 카논으로 주제를 모방한다. 그야말로 모차르트의 이전 교향곡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밀도 높은 서법이 돋보이며, 듣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인 오프닝이 아닐 수 없다. 이후에 한결 차분한 느낌으로 제시되는 제2주제도 감미롭고 아름다우며, 그것이 잠시 고조되었다가 갑자기 피아노(piano)로 가라앉으면 흘러나오는 새로운 주제도 매혹적이다.

 

경쾌하고 화사한 기운이 가득한 교향곡 29번

 

제2악장은 매우 우아하고 기품 있는 느린 악장으로, 내성부의 정성스러운 짜임새와 풍부하고 깊이 있는 울림에서 한 단계 성숙한 소년 모차르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제3악장은 관악기들의 팡파르가 가미된 미뉴에트로, 점음표를 지닌 리드미컬한 주부와 사뿐거리면서도 차분한 트리오가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제4악장은 전형적인 고전파 교향곡 스타일의 피날레로, 분위기와 주제의 연관성 등에서 제1악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활기차고 열정적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제1주제와 보다 우미하고 선율적인 제2주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상당히 길고 충실한 발전부에서는 제1주제에 사용된 동기들이 줄기차게 반복되면서도 교묘하게 처리되어 끊임없는 긴장감을 유발한다. 특히 시원스럽게 상승하는 음형이 극적으로 사용되어 듣는 이에게 후련한 쾌감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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