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윤은...

사랑하는 것들과... 고전음악, 풍란들..., 그리고 사진...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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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들 이야기(피아노)

2019. 4. 26.










탄생 200년 맞아 나온 본격 평전  독재자 아버지와 정신질환 남편…
고통 속 꽃 핀 예술활동 ‘생존 서사’
클라라 슈만 평전

낸시 B. 라이히 지음, 강자연·하인혜 옮김/경북대학교출판부


지금이라면 마르타 아르헤리치급이었을까. 그는 “제왕적 풍모”를 가진 여성 피아니스트였다.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와 위엄을 지녀 슈만, 브람스, 리스트 같은 작곡가들이 ‘여사제’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자신의 연주료를 당당히 요구했으며 남성 음악가들과 동등한 위치를 원했다.
남편을 좋게 본 음악감독이라도 자신을 무시했다 싶으면 “내 연주는 남편과 별개”라며 화를 냈다.

하노버에서, 15살의 클라라 비크. 피아노 위에 그의 협주곡 7번 3악장의 솔로 파트가 펼쳐져 있다. J. 기에르의 1835년 석판화.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하노버에서, 15살의 클라라 비크. 피아노 위에 그의 협주곡 7번 3악장의 솔로 파트가 펼쳐져 있다. J. 기에르의 1835년 석판화.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클라라 슈만(1819~1896) 탄생 200년에 맞춰 제대로 된 평전이 나왔다.
<클라라 슈만 평전>은 미국 음악학자 낸시 라이히의 책 <클라라 슈만: 더 아티스트 앤 더 우먼>(1985)의 2001년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미국에서 첫 출간된 뒤 풍부한 자료조사와 드라마틱한 재현으로 학술적 가치까지 인정받은 책이다.


클라라 슈만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사와 피아니즘에 강한 흔적을 남긴 여성 음악가로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단순히 로버트 슈만의 아내라거나 요하네스 브람스가 흠모한 여인으로 기억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곱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는 1854년 남편이 죽을 때까지 거의 계속 임신 상태였지만 그 14년 동안 무려 139번이나 연주회를 치렀다.
죽는 날까지 연주 레퍼토리를 확장했고 남편과 자식들의 죽음 같은 연이은 비극적 사건 속에서도 예술 활동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불굴의 생존자”였다.

12살의 클라라 비크(파리). 에두아르드 페흐너의 초상화에 기반한 1832년 목판화. 츠비카우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12살의 클라라 비크(파리). 에두아르드 페흐너의 초상화에 기반한 1832년 목판화. 츠비카우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그는 1828년 아홉 살 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야심가였고 ‘바짓바람’을 일으키며 신동의 연주여행을 따라다녔다.
어린 클라라는 사람들 앞에서 “우수에 젖은, 조롱하는 듯 고통에 찬” 미소를 가끔 지었다는데, 폭군에 독재자였던 아버지 탓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연주 활동은 승승장구했다. 왕족이나 남성 작곡가들은 그를 추앙했고, 출판업자들은 앞다퉈 클라라가 만든 곡을 출판하려 애썼다.
괴테는 클라라가 10대 시절 이미 “남자아이 여섯 명이 치는 것만큼의 힘을 갖고 연주한다”고 평했으며, 동료 음악인들도 “음악에 있어서 충분히 남성적”이라 말했다.

딸의 연애를 반대해 슈만을 고소한 아버지와는 20살에 결별했다.
아버지가 결혼 지참금을 주지 않자 클라라는 연주여행으로 돈을 벌었다. 로버트 슈만은 다정한 남편이었음에도 정신적으로 불안했다.
클라라는 남편 작품의 리허설을 감독했고, 피아노 편곡을 거들었으며 남편의 피아노곡들을 초연하면서 널리 알렸다.
청년 브람스는 클라라를 격정적으로 사랑하며 슈만가를 돌봤는데, 나이가 들수록 뒤로 물러섰다.
무자비할 정도로 이성으로서 관계를 끊어내 클라라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라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켰으며 평생 독신이었다.
그는 클라라가 죽고 열달 뒤 세상을 떠났다.

결혼 직전인 스무 살의 클라라 비크 초상. 이즈음 그는 돈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맞서 연주회를 통해 자신의 지참금을 벌기로 결심했다. 요한 하인리히 슈람의 1840년 채색 소묘.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결혼 직전인 스무 살의 클라라 비크 초상. 이즈음 그는 돈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맞서 연주회를 통해 자신의 지참금을 벌기로 결심했다. 요한 하인리히 슈람의 1840년 채색 소묘.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클라라 슈만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고 그의 악보가 복원된 것이 20세기 페미니즘의 영향이라지만,
지은이는 클라라 슈만이 페미니스트가 아닌 프로 연주자로서 스스로를 정의했다고 강조한다.
여성 권리 투쟁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확신했고, 아내나 어머니 노릇보다는 전문 연주자로서 느낀 성취감이 큰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아마추어에 머물렀던 당시 ‘신동 출신’의 다른 여성 연주자들과 달리 프로 연주자로서 남자들과 경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엔나에서의 클라라와 로버트 슈만. 1847년 에두아르드 카이저의 석판화.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비엔나에서의 클라라와 로버트 슈만. 1847년 에두아르드 카이저의 석판화.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그의 삶이 워낙 중층적이어선지, 공동번역자인 피아니스트 강자연 숙명여대 대학원 반주과 대우교수와 영문학자 하인혜 인천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조차 역자후기에서 각자 다른 입장을 밝혔다.
하 교수는 1980~90년대 이후 백인 남성 중심의 문학사 속에 잊힌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페미니즘 문학연구자들의 ‘리커버리 프로젝트’와 최근 대두되는 여성주의적 의제를 연결해 평전의 의의를 살렸다.

강 교수는 음악적 특권이나 보호막이 없는 가운데 출산과 양육, 생계 유지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정련된 음악을 탄생시킨 한 19세기 여성 전문 연주자의 치열한 투쟁에 방점을 찍었다. 어느 쪽이든 엄격한 자기 단련과 맹렬한 투지로 예술적 성취를 이룬 19세기 여성 음악 거장에게 바치는 헌사로 읽힌다.

서른다섯 살의 클라라 슈만. 로버트 슈만이 병원에 수용된 직후, 프란츠 한프슈탱을이 1854년 찍은 사진.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서른다섯 살의 클라라 슈만. 로버트 슈만이 병원에 수용된 직후, 프란츠 한프슈탱을이 1854년 찍은 사진.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책은 클라라 슈만의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 700쪽에 달한다. 음악학 연구에서 쓰이는 방법론적·심리학적 통찰, 여성사, 음악사를 통괄하며 평전으로서 품격을 갖췄다. 클라라가 슈만, 브람스를 비롯해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 일기도 감정선이 살아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59살의 클라라 슈만. 프란츠 폰 렌바흐의 파스텔 초상화. 1878년.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59살의 클라라 슈만. 프란츠 폰 렌바흐의 파스텔 초상화. 1878년. 츠비카우의 로버트 슈만 하우스 소장. 경북대학교출판부 제공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나무위키)

 

파일:클라라 슈만.png
이름
클라라 조제핀 비크 슈만
이름(영어)
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직업
피아니스트, 작곡가, 음악 해설가
출생
사망
배우자
자녀
4남 4녀




1.개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음악 교육자이며 본명은 클라라 조제핀 비크 슈만(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이다. 독일의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피아니스트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로서, 또 요하네스 브람스와의 친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주로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지만 나름 작곡활동도 했으며 (생애 초반에는 피아노 협주곡등을 작곡하면서 다양한 작곡활동을 보였지만 후술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사정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다.)

현재 그녀의 작품들이 발굴되어 종종 연주되고 있다. 생애 후반에는 음악 교육자 및 평론가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反바그너성향으로 유명하다.


19세기 독일의 피아니스트·작곡가.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을 포함한 관현악곡, 실내악곡, 가곡 등을 작곡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오스트리아 빈의 악우 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840년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하고도 음악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작곡을 하는 등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1983년 조엔 치셀이 남긴 전기 <클라라 슈만>이 출판되었다.


2. 생애

클라라 슈만은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5세부터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일찌감치 음악적 재능을 보여서 10살이 되기도 전에 소녀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다. 11살때인 1830년부터 서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연주여행 당시 파리에서 바이올린의 대명사 니콜로 파가니니를 만나서 그와 협연을 하기도 했으며 프레데리크 쇼팽은 그녀의 연주를 듣고 감탄해서 친구였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클라라 비크를 극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이 때는 슈만과 결혼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클라라 비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연주뿐만 아니라 작곡에서도 능력을 보였는데, 17세인 1836년에는 그녀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이 당시 최고의 음악가중 한명이었던 펠릭스 멘델스존의 지휘(피아노는 물론 클라라 본인)로 초연되기도 했다.

클라라의 인기에는 빼어난 미모와 우아하고 기품있는 태도도 한몫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14살경부터 9살 연상의 로베르트 슈만과 사귀기 시작했으며 평생동안 슈만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다른 연애를 할 기회는 없었다. 클라라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슈만과 연인으로 지냈으며 결국 1840년 21살의 나이에 슈만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슈만 항목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결혼한 후 슈만 부부는 서로 음악적 동반자로서 큰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특히 클라라는 남편이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결혼 당시 클라라가 이미 유럽 클래스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유명인사였던 반면, 슈만은 북독일 지역에서만 좀 알려진 무명 작곡가에 가까왔으며 출판 사업 등을 벌이느라 나이 30이 될때까지 벌어놓은 돈도 거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문란한 사생활로도 악명이 높았다.
(슈만 항목에도 있지만 슈만은 이미 20살경에 매독에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그의 정신병도 매독에 의한 합병증으로 보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클라라의 부모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 결혼이 제대로 유지가 될수 있을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클라라와 슈만은 정말 금슬이 좋은 부부였으며 클라라는 자신의 유명세를 활용해서 유럽 각지에서 남편의 작품을 연주했고, 덕분에 슈만의 음악성이 본격적으로 인정받으면서 부인에 버금가는 유명인사가 될 수 있었다.

클라라는 음악적인 동반자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내조를 통해 남편의 작곡 활동을 도왔다. 특히 슈만은 작곡할 때에 굉장히 예민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집안일은 모조리 그녀의 몫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집안 일을 떠맡은 상황에서도 연주활동과 작곡활동도 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였다. 결혼 전에 엄친딸이었다가 결혼 후에는 슈퍼맘의 삶을 살았던 것인데,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건강체질이었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했다.

1844년에는 당시 13살의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을 만났으며 이후 클라라는 평생동안 요아힘과 자주 협연을 하였다. 또 1853년에는 당시 20살이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났으며,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재능과 열정을 간파하고 그를 유럽각지에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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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슈만과 함께)

하지만 남편 로베르토 슈만이 1854년 2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서 자살을 시도했으며,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1856년 사망할 때까지 정신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녀는 가장 역할을 할 수 없는 남편을 보살피는 한편 아직 어린 7남매를 길러야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남편이 쓰러진 이후에는 더 이상 작곡활동을 하지 않는다.

대신 연주활동은 상당히 활발히 했는데, 죽기 5년전인 1891년까지 유럽 각지에서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1874년에는 미국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클라라는 연주회 횟수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1830년부터 계산하면 무려 1300회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남편의 피아노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초연을 했으며 남편이 사망한 후부터는 전술한 요아힘과 함께 자주 콘서트 투어를 다녔는데, 특히 요아힘과는 240회에 달하는 콘서트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작품을 비롯해서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파 작곡가들과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등 낭만파 초기 거장들의 작품을 주로 연주하였으며 제자이자 친구였던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도 자주 연주하였다.(클라라가 생애 마지막 연주회에서 연주한 곡도 브람스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원래 관현악곡인데 2대의 피아노용으로 편곡)이었다.)
 반면 프란츠 리스트 등의 작품은 자신과 음악적 경향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주하지 않았다.

1875년경 클라라는 오른팔에 신경통 증상이 생겨서 약 2년정도 연주활동을 쉬어야 했다. 한동안은 글씨도 쓰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 이후에도 이 증상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고 평생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77년 베를린 복귀연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에도 왕성한 연주활동을 했다.

1878년에는 프랑크푸르트의 호흐 콘세르바토리(Hoch Conservatory)의 교수로 부임했으며 1892년 은퇴할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뛰어난 음악 교육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교수가 된 이후 그녀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서 여생을 보냈다.

한편 브람스와의 관계도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다. 로베르트 슈만이 정신병 증세로 자살하려고 투신했을 때 슈만 부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이 바로 브람스였다. 특히 클라라는 이 때 막내 펠릭스를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는데, 브람스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클라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평생지기가 되었다. 브람스는 계속 클라라와 슈만의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그녀에 대한 감정을 키워갔으며 이러한 그의 감정은 당시에 작곡된 작품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클라라는 14세 연하의 브람스와 친분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연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1896년 클라라는 프랑크푸르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76세. 그녀의 유해는 본(Bohn)의 알터 프라이도프(Alter Friedhof) 묘지에 묻혀 있는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클라라를 연모했던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은 다음 해 독신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파일:external/welltempered.files.wordpress.com/schumannclara.jpg
(만년의 모습)

3. 연주자로서 클라라 슈만

최근까지도 클라라 슈만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21세기 이후 그녀의 작품들이 발굴되서 종종 연주되고 있다. 그녀가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고 주로 생에 초반에 작곡된 것들이지만 나름 작곡가로서의 그녀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 측면에서 클라라는 여성 특유의 우아함과 섬세함 못지 않게 기교와 힘도 뛰어난 연주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클라라 비크 시절인 16세경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보면 3악장 내내 옥타브가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강한 손가락 힘이 필요하다. 또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이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2번같은 작품들이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중 하나였던 것을 보면 웬만한 남성 피아니스트에 뒤지지 않는 힘과 체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주경력 초기에는 나름 비르투오조 경향을 보였던 것 같지만 성장한 이후에는 리스트나 탈베르크로 대표되는 기교주의를 배격하는 대신 감성과 표현력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주자가 되었으며 이와 같은 클라라의 연주성향은 자신의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클라라의 연주는 가급적 악보에 충실하고 절제된 연주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자기 색채를 많이 가미하고 상황에 따라 폭주하는 당대의 기교파 피아니스트들과는 분명 구별되는 점이며 이런 측면에서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녀가 괜히 70이 넘어서도 연주활동을 하고 평생 1300번이 넘는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과도하게 내세우지 않는 클라라의 연주법은 협연이나 실내악 연주에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실내악 연주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녀의 1300회의 연주회 가운데 절반 가까운 연주회가 협연이었으며 특히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는 약 240회에 달하는 협연을 했다.

한편으로 클라라는 피아노 독주자가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치는 '암보(暗譜) 연주'를 본격 도입한 연주자이기도 하다. 클라라가 최초의 암보 연주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그녀의 암보 연주를 매우 이례적인 일로 보도하고 있고 이후 암보 연주가 유행한 것을 보면 클라라가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정한 엄친딸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

4. 작품 성향

그녀의 작품 목록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링크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이 피아노 작품이며 피아노 협주곡 한곡, 소나타 1곡(미발표), 피아노 3중주 1곡 외에 가곡 등이 있다. 생애항목에 이야기했듯이 현존하는 그녀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으며 남편이 쓰러진 후에는 사실상 작곡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 소수의 작품만 살펴봐도 작곡에 대한 그녀의 재능과 잠재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많은 클래식 팬들과 전문가들은 클라라가 가족을 뒷바라지하느라 작곡에 대한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

현존하는 클라라의 작품을 보면 전형적인 독일 낭만주의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결혼 전 클라라 비크 시기의 작품에는 멘델스존과 쇼팽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한편으로 당시 유행했던 비르투오조(virtuoso) 스타일의 작품도 있는데, 클라라가 1834년경에 작곡한(출판은 1837년) 벨리니 주제에 의한 콘서트용 변주곡(op. 8)를 보면 당대의 유명한 작품이나 유행가/민요 등의 선율을 주제로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는 변주곡이나 환타지 등을 작곡했던 당대 1급 피아니스트들의 작곡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벨리니 주제에 의한 콘서트용 변주곡(op.8)

하지만 '클라라 슈만'이 된 후에는 이런 기교주의적인 성향을 버리고 좀더 구성과 표현력을 중시하게 되는데, 이는 당연히 남편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결혼하기 2년전에 작곡된 d단조 스케르초(op. 10)에서 이미 슈만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결혼 이듬해에 작곡된 c단조 스케르초(op. 14)에서는 좀더 명확하게 슈만 풍의 스타일이 드러나고 있다. 남편이 쓰러지기 1년전인 1853년에 작곡한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op. 20)을 위의 벨리니 변주곡과 비교해서 들어 보면 음악성향의 변화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로베르트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op.20)

당연하겠지만 슈만 부부는 음악적으로 정말 밀접했다. 단적인 예로 위에 인용된 슈만 변주곡의 제 6변주에 사용된 부점 리듬 등에서는 남편의 영향이 그대로 느껴진다. 또 1845년에는 클라라가 대위법을 활용한 작품(3개의 전주곡과 푸가 op. 15)을 썼는데, 똑같은 시기에 남편도 오르간을 위한 6개의 푸가(op. 60) [엄밀히 말하면 오르간이 아니라 페달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다만 오늘날 페달피아노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오르간으로 연주한다]나 피아노를 위한 4개의 푸가(op. 72)와 같은 대위법을 이용한 작품을 남겼으며 같은 사람이 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작곡 스타일도 매우 유사하다. 분명 함께 대위법을 공부하고 함께 작품을 썼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처럼 클라라 슈만의 작품은 훌륭한 작곡가였던 남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지만 남편의 아바타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고 나름 자신만의 음악적 특징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인지 음악적 표현에 치중했던 남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아니즘이 두드러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대의 다른 기교파 피아니스트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클라라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40년을 더 살았으며 브람스같은 대작곡가들과 지속적으로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계속 작곡을 했다면 남편과 확실히 구별되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이 쓰러진 후 작곡을 중단해 버렸으니 아쉬울 따름.

한편으로 그녀는 소녀 피아니스트 시절에는 나름 리스트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지만 클라라 슈만이 된 이후 리스트를 멀리했으며 나중에는 그를 굉장히 싫어했다. 클라라는 악보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식으로 연주하는 리스트의 연주 스타일을 경멸했으며 화려한 기교와 장식음으로 점철된 그의 작품성향도 싫어했다. 그녀는 남편이 리스트와 친교를 맺는 것을 반기지 않았고 슈만이 리스트에게 자신의 C장조 환타지(op. 17)를 헌정하려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결국 헌정하기는 했다). 1870년에는 리스트의 주도로 성대하게 거행된 빈 베토벤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았으나 참석을 거절했다.

또한 클라라는 바그너를 리스트보다 더 싫어했다. 바그너에 대한 태도는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증오나 혐오에 가까왔는데, 바그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해 '내가 이제까지 들었던 음악 중에 가장 역겨운 음악'이라는 저주를 했을 정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오페라에 대해 끔찍하다거나 타락했다는 표현을 쓰면서 비난을 했으며 안톤 브루크너를 비롯한 친바그너 성향의 음악가들도 도매금으로 싫어했다. 바그너 본인이 생애 내내 격한 찬반을 몰고 다닌 작곡가이긴 했지만 정숙한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던 클라라가 자신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바그너에게는 거친 언사를 퍼부었던 것은 당대에도 화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브람스가 리스트나 바그너의 음악성향을 따르지 않고 고전파 시기의 음악에 심취했던 것도 클라라 슈만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다.

정리하자면 클라라는 단순히 명 작곡가 슈만의 아내, 당대의 유명 연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 슈만의 사후에도 브람스를 비롯한 고전적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버팀목이자 대모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19세기 내내 지속된 바그너, 리스트 등 후기 낭만파 진영과의 경쟁에도 보이지 않는 주역이 되었다. 이 점에서 클래식 음악사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가족 관계


남편 로베르트 슈만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

1. 마리 슈만(Marie Schumann, 1841–1929)
2. 엘리제 슈만(Elise Schumann, 1843–1928)
3. 줄리 슈만(Julie Shumann, 1845–1872)
4. 에밀 슈만(Emil Shumann, 1846, 몇달만에 사망)
5. 루트비히 슈만(Ludwig Schumann, 1848–1899)
6. 페르디난트 슈만(Ferdinand Schumann, 1849–1891)
7. 유진 슈만(Eugenie Shumann,1851–1938)
8. 펠릭스 슈만(Felix Schumann, 1854–1879).

아들들은 모두 불우한 생을 살다가 살아서 20세기를 보지 못하였다. 큰 아들 에밀 슈만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차남 루트비히 슈만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정신병 증상이 나타나서 이후 여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삼남 페르디난트 슈만은 그래도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결혼도 하고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았으나 말년에 마약 중독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그나마 페르디난트는 슈만의 아들중 유일하게 결혼해서 자식을 얻었으며, 덕분에 슈만 가문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었다]
막내 펠릭스 슈만은 나름 똑똑해서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으며 결국 24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6.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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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화폐유로화로 통합되기 이전인 1990년대, 지폐 100마르크화에 클라라의 초상이 쓰이기도 했다.
  • 클라라는 말년에 브람스와 주고받은 편지를 태워버리려고 했는데, 다행히 장녀 마리가 극구 말려서 이 편지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편지를 없애려고 했던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 위인전기나 음악 칼럼을 보면 클라라와 슈만의 사랑과 결혼생활, 그리고 브람스와의 관계에 대해 낭만적으로 덧칠된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이 실려 있다. 클라라가 남편을 적극적으로 내조하면서 그의 작곡활동을 도왔다고 하는데, 사실 내조는 정말 좋게 표현한 것이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일방적인 희생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위 항목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클라라는 가정일에 무관심한 슈만때문에 자신의 음악 커리어를 상당부분 희생해야 했다. 클라라 본인이 자신의 처지를 딱히 문제삼지 않았고 남편의 명예를 생각해서 불만을 표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런 점들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다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클라라는 자식들에게 음악을 권하지 않았다. 차녀 엘리제와 막내딸 유진만 음악선생으로 일했을 뿐이며 다른 자식들은 모두 음악과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았다.



'



로베르트 슈만의 명성에 묻힌 천재음악가, 클라라 슈만


우리는 “슈만과 클라라”라는 이름을 한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자 큰 스캔들을 불러왔던 주인공들이라 클래식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클라라와 나의 인연은 훨씬 깊다. 그 이유는 독일에서 6년간 살았던 동네 이름이 클라라 슈트라쎄 (Klara strasse)였기 때문이다. 주소를 쓸 때마다 읊어 대던 이름이었으니 어느새 클라라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대학원 1학기에 만난 나의 첫 리포트 과제가 슈만의 가곡이었다. 그것은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작곡된 곡이었는데, 공부를 하며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또 첫 과제라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클라라는 원래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슈만의 스승이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로서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인정받아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그랬던 그녀가 9살 연상에 그것도 무명이던 음악가 슈만과 결혼을 하려 하였으니, 딸의 장래를 염려하였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지금이야 작곡가로서 슈만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의 슈만은 피아노 실력은 클라라보다 못하고 작곡가로서도 아직 무명이던 시절이었다. 

 

 결혼을 하기위해 여자 친구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스승이던 사람과 법적 공방까지 벌인 사람은 슈만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사랑을 쟁취한 커플이어서 그런지 그들의 사랑은 몇 세기가 지나도 음악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슈만은 원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법대에 입학했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망이 커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비크의 제자로 피아노 기술을 연마하던 중 손가락 부상으로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작곡의 길로 들어선다. 작곡을 하면서 음악 비평과 글을 써 음악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브람스와 쇼팽 그리고 슈베르트의 음악적 가치를 처음 알아보았던 사람도 슈만이었다. 음악적 재능은 물론 지적인 능력까지 갖춘 그는 오늘날까지 음악계의 지성으로 손꼽힌다. 

 

 클라라도 결혼 후에 작곡을 하여 몇 개의 가곡집과 피아노 소품 등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보수적이었다. 여성의 가장 큰 미덕은 남편을 잘 섬기고 아이를 기르는 것이 다인 시대였기에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지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작곡 보다는 피아노 연주와 가르치는 일에 집중 하였던 그녀도 결혼 생활 후에 찾아온 삶의 변화를 때때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던 것 같다. 자신의 연주보다는 가족의 안위에, 그리고 남편의 음악적 활동을 위해 내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를 살면서도 감출 수 없었던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성과 독보적 활동은 몇 세기가 흘러서야 선구적인 여성음악가로서 재조명 되고 있다. 

 

 그들은 8남매를 두었고, 젊은 나이에 매독과 우울증을 앓던 슈만은 정신병으로 힘든 노년을 보내다 결국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그의 곡을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한 사람은 클라라 슈만이었다. 






클라라 슈만 평전/낸시 B. 라이히 지음/강자연·하인혜 옮김/경북대 출판부 펴냄   

클라라 슈만 평전클라라 슈만 평전

클라라 슈만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녀는 위대한 음악가이자 로버트 슈만(자신의 남편이자 독일 낭만파 음악의 대명사), 요하네스 브람스(독일 작곡가)의 창조적 음악 파트너였다. 클라라는 천재적인 음악인이었으나 어머니로서는 지독하게 불우한 운명을 감당해야 했다. (이 책은 1985년 초판에 이은 재판이다)

◇ 천재적 재능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조제핀 비크 슈만(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년~1896년)은 독일의 피아니스트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음악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녀 피아니스트의 명성을 얻었다.

슈만은 클라라 보다 9살 많았지만, 두 사람이 만났을 당시 클라라는 슈만이 올려다보기 어려울 만큼 명성 높은 피아니스트였다. 유명한 직업연주가로서 재능과 경력을 골고루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젊고 아름다웠다.

클라라 슈만클라라 슈만

두 사람이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슈만이 비록 작곡과 평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불투명한 미래를 가진 노총각 일 뿐이었다. 클라라가 끝내 고집을 부리자 아버지 비크는 클라라가 그때까지 연주로 벌어들인 모든 돈을 신용관리 할 것이며 슈만과 결혼한다면 그 돈을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압박했다.

◇ 아버지의 결혼 반대와 소송

슈만과 클라라의 끊임없는 호소에도 아버지는 결혼을 반대했고, 두 사람은 결국 '자신들의 결혼을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통해 부부로 인정받았다. 1840년이었다. 훗날 평론가들은 이 해를 '가곡의 해'라고 불렀는데, 슈만이 결혼하던 해에 180여곡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슈만 29세 때로버트 슈만 29세 때

당시 슈만이 작곡한 모든 가곡 속에는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녹아 있었다. 결혼 이듬해인 1841년에 슈만은 교향곡, 협주곡, 실내곡 등을 작곡했고,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슈만에게 클라라는 그야말로 끊임없는 영감을 주는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러시아, 빈 등으로 연주여행을 했으며, 클라라는 남편 슈만으로 하여금 많은 걸작 가곡을 낳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 정신질환 앓는 남편 보호치료

슈만은 결혼과 함께 엄청난 도약을 이루었지만, 클라라는 연주인생을 대부분 접어야 했다. 슈만은 클라라를 언제나 자기 곁에 있도록 했고, 게다가 슈만은 자신이 클라라보다 못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슈만은 신경 쇠약기 동안 예술적·경제적·심리적으로 아내 클라라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클라라는 수많은 어려움을 강인한 책임감으로 돌파했다.

슈만은 종종 안절부절 못했고 행동이 통제되지도 않았다. 고함을 치거나 적대적인 행동을 보였고, 발작을 일으키거나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고도 한다. 점차 슈만은 언어능력을 상실했고 음식물을 삼키지도 못했다.

슈만은 1831년 매독에 걸린 적이 있는데, 자신은 비소를 먹고 매독이 완치된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에는 매독균이 여전이 체내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증상 또한 다른 정신 질환과 유사했다. 슈만의 말기 질병이 매독 3기 증상이라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죽음이 매독 때문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다.

1856년 7월 29일 슈만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잠시 외출했다가 병원으로 돌아와 남편의 사망했음을 알게 된 클라라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사망한 로버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내가 깊이 사랑했던 남자의 몸 가까이 서 있다. 모든 것이 고요하구나. 로버트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드릴 뿐이다. 그의 침대가에 무릎을 꿇었을 때 너무나도 신성한 감정을 느꼈다.'

◇ 슈만과 브람스 음악 해석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클라라 슈만은 국내는 물론 국외 연주여행을 계속했으며, 리스트에 비견하는 명연주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작곡도 했고, 슈만 및 브람스 음악의 해석자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말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음악학교 교사로 생활하기도 했다.

그녀의 불행은 남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홀로 된 몸으로 2세부터 14세에 걸친 일곱 아이들을 부양했다. 그리고 자식 넷의 질병과 때이른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녀의 생애는 그야말로 영광과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 위대하고 치열했던 한평생

이 평전은 크게 두 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클라라 슈만의 사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녀가 맺은 인간관계, 가족관계 등을 다루어 독자들이 음악가로서 클라라가 성장하게 된 토대나 자양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제2부는 클라라의 음악가적 면모와 그녀의 음악적 성취를 다룬다.

지은이는 "1985년 초판을 쓰던 당시 나는 그녀의 승리와 비극에 치중해 그녀의 삶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용감했던 여인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그녀가 거둔 성취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클라라 슈만의 삶은 위대한 재능, 투쟁, 그리고 생존의 서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독일 100마르크 지폐에는 클라라 슈만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688쪽, 2만9천원.





영화 클라라 슈만



클라라와 슈만과 브람스의 사랑 이야기는 윈저공과 심슨부인의 이야기만큼이나 널리 알려져있어 이제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어쩌면 내가 슈만보다는 브람스를 브람스 보다는 다른 작곡가를 더 좋아하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들의 음악 보다는 다소 왜곡되게 그들의 삼각관계에 더 많은 세인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 같기도 한 거부반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클라라>는 브람스의 숙부의 후손인 헬마 잔더스-브람스가 감독했다. 그러나 사실 사촌끼리도, 같은 형제자매도 서로를 잘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자기 자신도 주관적으로만 볼 줄 알지 철저히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브람스 가문이라고 해서 브람스를 더 잘 이해하고 표현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 속의 브람스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브람스와 슈만과 다소 거리가 멀다. 이 영화에서 브람스는 매우 사교적이고 쾌활한 젊은 청년으로 나온다. 모차르트를 매우 경박하게 표현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이 영화 속의 슈만은 매우 가볍고, 나약하고, 신경질적이고, 부인에게 의존적이다. 슈만과 클라라의 일기와 클라라와 브람스의 편지 그리고 그들의 음악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분석하지만 글이나 음악은 읽고 듣는 사람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천차만별의 이야기가 꾸며지기 마련이다. 읽는 사람의 이해력과 지식과 경험에 의해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 또한 전적으로 작가와 감독의 주관적 해석에 의한 영화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전의 슈만과 브람스와 클라라에 관한 영화나 다큐는 보다 그들의 순수한 음악적 동지로서의 사랑과 음악적 열정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 영화는 브람스와 클라라를 침대까지 끌어들이는 극단으로 묘사하고 있다. 클라라가 일관되게 브람스에 대해 큰아들처럼 사랑할 뿐이라고 편지에다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전의 브람스와 슈만과 클라라에 대한 글과 영화와 음악에 의해 이미 세뇌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들이 나눈 교류는 음악적 동지로서의 존경과 사랑이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물론 슈만이 죽은 후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존경이 사랑과 연민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해도 클라라가 14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4살짜리 소녀 클라라는 9살이나 많은 슈만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낄 정도로 나이든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던 여자였다. 브람스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고 매력적인 청년이라고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사랑을 느꼈을리는 없다고 본다. 클라라는 아주 자그마한 것을 크게 부풀리기 좋아하는 세속적 인간들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일찍 죽은 남편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살려 슈만의 곡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표현했다는 그녀. 클라라!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 속의 클라라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표현되지 못했다.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도 잘 표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특히 막내의 귀여움은 음악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이나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도 오래 전에 슈만과 클라라와 브람스에 관한 영화를 봤었기에 슈만이 이 영화 속의 슈만처럼 다소 경박하고 광기어린 모습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슈만과 클라라는 젊은 청년 브람스의 천재성에 연일 그들의 일기장에 찬사의 글을 썼다고 한다.

슈만이 브람스에 대해 연적의 마음을 품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슈만은 진정으로 브람스의 재능을 아꼈고 슈만은 진정으로 음악만을 사랑한 예술가였을 것 같다.

 

 

 

 

 

클라라 역의 마르티나 게덱은 집중 훈련을 통해 피아노를 직접연주했다고 한다.

물론 소리는 전문 연주자의 소리였지만 건반 위의 손가락의 움직임은 게덱의 손이었다고 하니 우리나라 배우들이 배워야 할 프로정신이 아닌가 한다.


 

 

 

슈만과 클라라가 성공적인 공연을 하는 동안 브람스는 집에서 피아노로 '헝가리 무곡'을 쳐주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준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헝가리 무곡을 이 영화 속에서 들으니 행복했다. 그러나 도중에 연주가 중단되어 얼마나 아쉬웠던지....

 

 

 

 

클라라가 죽은 후 몇달 뒤 약속대로 클라라를 따라 하늘로 간 사나이 브람스, 그러나 사실 브람스는 간암으로 죽었는데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마치 브람스가 클라라를 따라 자살이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로 영화를 맺는다.

  

 

 

[브람스의 헝가리무곡 제 5번]

 

 

 

 

[영화 <이수> : 잉그리드 버그만과 안소니 퍼킨스]

 

브람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프랑스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영화화 한 <이수 (離愁 : Goodbye again, 1961)>이다.

브람스와 클라라처럼 이 영화 역시 14살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한 젊은 청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영화이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안소니 퍼킨스, 잉글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여서 더 인상 깊게 봤던 영화이기에 두 번 정도 본 것 같다. 가수로서 더 유명하고

에디뜨 피아프의 연인이었던 이브 몽땅도 나온다.

 

 

 

이들의 삼각관계는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와의 이야기와 유사하게 전개되기에 프랑스와즈 사강이 브람스를 염두에 두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창조해 낸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하는 영화이다.

 


 

[브람스 연주회 포스터 앞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잉그리드 버그만]

  

 

[브람스 교향곡 제3번 -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연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 영화의 원제(原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 속에는 브람스 교향곡 제 1번과 제 3번 등이 삽입되었다.

특히 제 3번 3악장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동영상의 5분 52초 쯤 부터 영화 <이수>의 장면이 나온다. 아무 말이나 해서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를 잡고 싶었던 필립(안소니 퍼킨스)은 순간 기둥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오고 황급히 이렇게 묻는다.

"Do you like Brahms?"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 <Goodbye Again>으로 제목을 변경해 개봉하게 된 것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개봉하면 미국인들이 브람스가 누구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브람스 음악을 즐겨듣지 않는 것은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일텐데 문화인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인들이 미국인들을 경시하는 오만 아니었을까?

어쨋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에 힘입어 이 영화가 성공했지만 미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


산들산들 걷기


http://blog.daum.net/oyunhwang/698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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