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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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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학 산책

20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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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한
고귀한 불씨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서양예술사에서 꾸준히 사랑 받아온 소재다. 프로메테우스를 주제로 한 회화··소설·음악 등은 시대를 거쳐 오며 한 시대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이기도 하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예술가들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예술적 재료로 삼아 왔을까.
정이은 음악학자

빈 베토벤 광장에 위치한 베토벤 동상의 프로메테우스(1880년 제작)


서양 문화의 뿌리, 그리스 로마 신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신화들은 서양 문화의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우리의 단군 신화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다채로운 은유와 상징으로 풀어내듯,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들 또한 옛 유럽인이 상상한 세상의 기원, 인류의 탄생, 영웅들의 이야기 등을 다룬다. 이들 신화는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오비디우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서사시인들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버전의 신화들을 접하게 된다.

기독교 사상이 지배했던 유럽의 중세에 고대 신화는 이교도 신들의 이야기로 여겨졌고, 당연하게도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문화를 이상으로 삼았던 르네상스 시기에 접어들며 신화의 이야기는 회화와 조각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들에게 지식을 배우는 것은 곧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쓰인(이후 라틴어로 번역된) 글들을 읽고 내용을 숙지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예술가들, 특히 미술가들이 자신들을 금전적으로 후원해 주는 이들의 고대적 취향을 반영해 신화를 소재 삼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술이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후 수백 년 동안 고대 신화를 소재로 했던 것에 이어, 음악에서는 17세기부터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과 함께 신화가 음악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화를 예술의 소재로 삼는 현상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 이후, 당시 사회의 최상위 계층이었던 귀족 계층이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세력의 자리에서 밀려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신화의 지위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새 시대에, 특히 음악 분야에서 새롭게 조명을 받은 신화가 있었으니, 바로 프로메테우스 신화다.


프로메테우스, 인간을 구제할 방법을 찾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거인) 신족에 속하는 신이다. 제우스가 올림포스를 다스리던 시절, 프로메테우스는 이아페투스Iapetus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은 먼저 생각하는 자’,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나중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판도라의 남편이 된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메테우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꿰뚫어 보는 예지의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 신족과 올림포스 신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에서 자신이 속한 티탄 신족이 패배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적군이었던 제우스를 도와 올림포스 신족의 승리를 일궈 냈다. 제우스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서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땅에서 사는 온갖 네 발 달린 짐승들과, 이들을 다스리고 신을 섬기는 인간을 만드는 일이 었다.

어느 날 인간들은 제우스 신에게 바칠 제사 음식을 놓고 논란을 벌인다. 소의 가죽과 뼈를 바칠 것이냐, 아니면 소의 고기와 기름을 바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인간을 창조한 프로메테우스가 계략을 짰다. 맛있는 고기 부분은 거칠어 보이는 가죽에 싸고, 먹을 수 없는 뼈다귀는 빛깔 좋은 기름으로 싼 다음 제우스 신이 직접 고르게 했다. 사실 이것은 제우스의 권위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가죽에 싸놓은 고기는 분명 먹음직스럽지 않게 보였을 것이고, 기름으로 싼 뼈는 겉만 그럴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지혜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손한 마음을 눈치 챈 제우스는 크게 화를 냈고, 인간에게는 벌을 내렸다. 도토리는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아 인간들은 직접 따서 먹어야 했고, 과일은 익지 않아 계속 보살펴야 열매를 맺었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는 노동에도 굶주림에 떠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내린 이 같은 고통에서 인간을 구제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가 생각해낸 묘책은 제우스의 상징이자,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제우스의 벼락에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벼락에서 불씨를 훔쳐내 인간에게 가져다주었다. 불을 통해 인간의 삶은 바뀌었다. 고기는 익혀 먹을 수 있었고, 농기구·무기 같은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낸 대가로 영원히 벌을 받아야 했다. 다른 네 발 짐승이 아닌, ‘인간에게 불씨를 전해주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우스는 인간들이 장차 이 불로 올림포스산을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광야의 맨 끝에 있는 캅카스산 암벽에 쇠사슬로 묶어두고, 매일 독수리(제우스의 상징)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내렸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매일 밤 계속 자라나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독수리의 먹잇감이 되었다.


신화에서 새 시대의 인간상찾아낸 예술가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커다란 예술적 영감을 받았던 사람들은 우선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장면에 주목했다. 아마도 이 장면은 프로메테우스 신화 속에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일 것이다. 바로크 화가들의 주된 관심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프로메테우스의 신체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그림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신체는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꿈꾸던, 잘 다듬어지고 이상적인 육체가 아니었다.

루벤스, ‘쇠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1611-12)

 

루벤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쇠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1611-12)는 독수리가 그의 육체를 파먹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다(그림 참조). 날카로운 발톱은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을 짓누르고 그의 간은 바깥으로 나와 있다. 제우스의 상징인 독수리는 금방이라도 푸드덕 거릴 듯한 기세로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예술적 관심이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서 표현성의 드라마로 나타났다면, 18세기 후반부터 프로메테우스는 모든 예술 장르에서 창조적 예술가의 상징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괴테를 필두로 바이런 경, 소설 프랑켄슈 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1818)의 작가인 메리 셸리가 그대열에 섰다. 음악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볼프 등이 새 시대의 프로메테우스 상에 공명하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들 예술가는 왜 당시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소재였던 프로메테우스를 다시금 꺼내 들었을까?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어떤 면이 19세기 예술가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결국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괴테, 바이런, 셸리, 베토벤 등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 가는 세기의 전환기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이다. 이 시기는 계몽주의의 바람이 프랑스 대혁명으로 불타오르고, 혁명의 정신이 유럽인을 각성시키던 때였다. 신분제도의 유리 벽에 막혀 있던 이들에게 혁명은 분명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꾸게 해주었을 것이다.

바로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인간상을 발견했고, 프로메테우스와 자신들을 동일시했다. 또한 그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신이 만든 질서에 저항하고 반역한 것처럼, 금지된 것에 도전하는 계몽주의적 욕망을 통해 새 시대의 인간상이 성취된다는 신화의 테마에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도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건넨 불은 자유를 향한 의지의 상징이었고, 신화의 세계를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하는 일이었다.

19세기 예술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베토벤은 프로메테우스의 자유를 향한 투쟁을 자신의 예술적 투쟁과 동일시했다. 베토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먼 과거의 신화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지금’, ‘여기’, ‘에게 벌어지는 일로 받아들였다.

베토벤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작곡한 1801년으로부터 1년 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고, 같은 해에는 프로메테우스란 주제를 가지고 다시 변주곡과 푸가’(op. 35)를 작곡했다. 그리고 이 주제는
1805영웅 교향곡피날레 악장의 주제로 사용된다. 1802년 신체의 문제를 깨닫고 존재의 기로에서 있던 베토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분명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그 불을 밝히고 있었다.

1880년 빈의 베토벤 광장Beethovenplatz에 세워진 베토벤 기념비에는 오늘도 프로메테우스가 한켠에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고 있다(첫 번째 사진 참조). 베토벤이 우리에게 음악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라면, 우리는 예술을 향한 그의 투쟁에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 이 글은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202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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