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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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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들 이야기

20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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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를 가장한 예지자,
‘유로지비’로 산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만 69년에서 닷새 모자라는 소련(1922~1991)의 역사를 통틀어 국가와 체제를 대표 하는 세 작곡가-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그리고 아람 하차투리안-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존재였다. 그가 인민의 베토벤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작곡한 교향곡, 특히 5번과 7레닌그라드는 소비에트의 영광과 승리를 찬양하는 걸작으로 선전되었다. 그는 과연 열성을 바쳐 당과 공산주의 이념에 헌신했나? 그의 예술적 삶과 개인적 삶은 만족스러운 것이었을까?

유윤종 동아일보 문화전문기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인민의 베토벤은 소련을 사랑했는가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질문에 붙는 의문부호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 1936년 소비에트의 당 기관지 프라우다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제목의 악명 높은 평론을 게재했다. 기고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이 글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해 위대한 지도자스탈린이 내린 준엄한 판결을 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만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작곡가의 예술적 생명은 물론 자연인으로서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자신이 정 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조적 응답이라고 부른 교향곡 5번이었다.

그리고 1941, 나치 군대가 소련을 전면 침공했다. 포위된 고향 레닌그라드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7레닌그라드를 썼다. 악보는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되어 서방으로 공수되었다. 각 나라의 지휘자와 악단들이 이 작품의 초연권을 확보하기 위해 앞을 다투었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는 영양실조로 바싹 마른 연주자들이 이 작품을 연주했고, 연주는 생방송되었다. 점점 볼륨을 키우며 광폭해지는
1악장의 주제와 변주는 나치 침략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저항의 목소리로 인식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소비에트와 공산주의를 대변 하는 작곡가로 위치를 확고히 한 듯 보였다. 소련의 대조국(大祖國) 전쟁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송곳 앞에 서 있는 듯한 불안한 삶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1948년 당의 결의로 형식적이고 반민중적 경향을 가진작곡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진행되었다. 이른바 즈다노프 비판이라고 불린 이 사태에서도 주공(主攻)은 쇼스타코비치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고, 이듬해 뉴욕으로 연주 여행을 다녀오기까지 했다.

1953, 스탈린이 죽었다. 쇼스타코비치뿐 아니라 전 소련 인민에게 안도의 한숨을 가져다주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작곡가를 떠받친 지반이 단단해지지는 않았다. 1962년 쇼스타코비치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옙투셴코의 시를 가사로 교향곡 13바비야르를 썼고, 이는 새 지도자 흐루쇼프의 분노를 불러왔다. 작곡가는 다시 몸을 웅크려야 했다.

여기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다. 그러나 질문은 남아 있다. 자신의 대교향곡과 체제를 찬양한 영화에 붙인 음악 들을 이용해 쇼스타코비치는 체제를 찬양했는가? 그것이 살아남기 위해서였을지언정, 그의 음악들은 소비에트에 대한 애정과 충성을 표현했는가?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 영문판 책 표지

 

 

이에 대해 의심하는 목소리는 그의 생전에도 있었고,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목소리를 포함해 소련 내부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에 공식적으로 불을 붙인 것은 그의 사후 출간된 솔로몬 볼코프의 책 증언(1979)이었다.



한 사람에게만 털어놓은 내면, 그 뒤의 진실 공방
볼코프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학부 졸업 후 음악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그가 불과
16세 때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8번 초연에 부쳐 쓴 글은 작곡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5년 뒤인 1965, 그는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쇼스타코비치 음악 페스티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행사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베냐민 플레이시만의 오페라를 비롯해 자기 제자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볼코프는 회상한다. 그러나 유대인 작곡가가 유대인 음악가를 다룬 이 오페라에 대해 소련 문화부는 비난을 퍼부었고, 이를 계기로 쇼스타코비치와 볼코프 사이에는 짙은 유대감이 형성된다.

볼코프는 레닌그라드의 젊은 작곡가들에 대한 책을 쓰면서 쇼스타코비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작곡가가 구술하고 음악 학자가 정리하는 형식이었다. 이 서문은 당국에 의해 대부분 삭제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볼코프는 노경에 접어드는 작곡가의 회상을 정리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가 모스크바의 음악지 소비에트 음악편집자가 되면서 두 사람은 늘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쇼스타코비치의 아파트와 잡지 사무실은 같은 건물이었다.

훗날 볼코프의 책에 담긴 말들을 실제로 쇼스타코비치가 했다는 확고한 증거는 없다. 노작곡가는 내가 죽은 후에’ ‘서방에서구술 내용을 발표하도록 부탁했다고 볼코프는 말했다. 그는 증언을 속기로 적었는데, 작곡가가 녹음기 앞에서는 경직되곤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증언속 내용에 대한 신뢰성은 미국 인디애나 대의 맬컴 브라운을 비롯한 관련 학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의 아들인 지휘자 막심은 1981년 서방으로 망명한 이후 볼코프의 책에 담긴 내용은 진실이 맞다고 증언했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옛 지인들도 소련 붕괴 후 대체로 증언의 진실성에 힘을 실어주었다.

풍자로 관습과 억압을 조롱한 광대
작곡가의 삶은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다면적일 수밖에 없다. 소련 시절을 살았거나 그 이후에도 볼셰비즘 체제에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쇼스타코비치는 잘못된 노선을 한때 걸었으나 당의 영도에 따라 자세를 바로잡은작곡가일 것이다. 또는 변함없이 공산당에 충성했으나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한때 오해를 샀던예술가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보는 시각은 소수에 그친다.

남은 것은 그가 당과 이념을 이용해 개인의 영달을 추구한 기회주의자거나 내면의 강한 자아와 예술혼을 권력에 의해 간섭당한 나머지 속절없이 뒤틀린 희생자로 보는 시각일 것이다. 겉모습에서부터 신경과민이 드러나는 이 소비에트 대표 작곡가의 진실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핵심을 러시아 민족의 고유한 관념인 유로지비юродивый에서 찾는다.

유로지비란 바보인 척하는, 바보처럼 처신하는 예지자(叡智者)이며, 풍자를 사용해 관습과 억압을 조롱하는 광대와 같은 존재다. 유로지비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풍자 대상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피한다. 볼코프에 의하면,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을 러시아 음악 역사상 두 번째 유로지 비로 간주했다. 첫 번째는 벼룩의 노래가 증명하다시피 무소륵스키였다.

쇼스타코비치의 목숨을 구원한 교향곡이자, 그의 가장 대중적인 성공작 교향곡 5번은 유로지비로서의 작곡가의 삶을 가장 잘 대변한다. “아무것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나의 교향곡 5번을 감상할 수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론 이해하고 있었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있었다. 교향곡 5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알고 있었다.”

미국의 음악 칼럼니스트 MT 앤더슨의 책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2015)은 더욱 직접적인 표현으로 작곡가의 말을 전한다. “(이 곡은) 누군가 몽둥이로 내리치면서 너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 너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당신은 휘청거리면서 일어나 앞으로 행진하며 그 말을 중얼거린다. 얼간이가 아닌 다음에야 이것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스탈린이 이미 파괴했고, 히틀러는 마무리만 했다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은 볼코프 이후의 증언과 문헌들을 더 이용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레닌그라드에 초점을 맞춘다. 거듭 반복 변주되면서 음량을 키워 가는 첫 악장의 이른바 침공주제는 본디 독일군의 침입과 관계가 없었다. 작곡가 자신에 의하면 이 곡은 스탈린이 이미 파괴해 놓았고 히틀러는 그냥 마무리만 하면 되었던한 도시에 대한 음악이었다. 작곡가는 이 곡을 하나의 레퀴엠(진혼곡)’으로 보았고, 이를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들을 답답해했다. 히틀러가 범죄자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스탈린이라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전쟁 전 소련에는 이미 고문당하고 총살당하고 굶어 죽은 사람이 수백만이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과 스탈린과 흐루쇼프를 지나 브레즈네프의 집권기까지 살았다. 그에게는 스탈린의 모욕을 상쇄할 만한 명예와 포상이 주어졌다. 만족할 만한 삶이었을까. 볼코프는 노거장이 말년에 한 말을 이렇게 전한다. “나는 오류의 수정보다는 복권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것도 새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결혼을 반대한 황제가 그 결혼은 무효임을 선언하노라. 그러므로 여인은 처녀로 간주될 것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나는 처녀가 된 기분은 들지 않는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197589일 세상을 떠났다.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이 공연된 바로 그날이었다.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MT 앤더슨 지음 /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546/ 22,000









증언
솔로몬 볼코프 지음 / 김병화 옮김 /
온다프레스 / 656/ 25,000











※ 이 글은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발행하는 월간 2019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구독 문의 158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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