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윤은...

사랑하는 것들과... 고전음악, 풍란들..., 그리고 사진...

Chopin - Nocturne + Sh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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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

2021. 6. 3.

 

'쇼팽의 녹턴(프랑스어: Nocturne) 또는 야상곡(夜想曲)은 

폴란드의 작곡가인 프레데리크 쇼팽이 1827년에서 1846년까지 작곡한 21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스물한 개의 녹턴은 피아노 연주회에서 자주 연주되며 완벽한 작품으로도 손꼽힌다. 쇼팽은 아일랜드의 작곡가인 존 필드가 창조한 녹턴(야상곡)을 더욱 확장시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다.

 

녹턴 1번부터 18번까지는 쇼팽의 생전에 출판이 완료되었으나 19번부터 21번까지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19번부터 21번까지는 쇼팽이 폴란드에 있을 때에 작곡되어 1번보다 작곡 시기가 앞선다. 심지어 21번은 쇼팽이 녹턴이라는 어떠한 표기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870년에 처음 출판된 때부터 지금까지 쇼팽의 녹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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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19 Nocturnes (Ivan Moravec/piano)

 

'https://youtu.be/kHXxWfSAxik

'00:00 – Op.9 No.1 in Bb Min

05:37 – Op.9 No.2 in Eb Maj

10:03 – Op.9 No.3 in B Maj

16:28 – Op.15 No.1 in F Maj

20:55 – Op.15 No.2 in F# Maj

24:55 – Op.15 No.3 in G Min

29:31 – Op.27 No.1 in C# Min

34:47 – Op.27 No.2 in Db Maj

42:04 – Op.32 No.1 in B Maj

47:09 – Op.32 No.2 in Ab Maj

52:40 – Op.37 No.1 in G Min

58:57 – Op.37 No.2 in G Maj

1:04:37 – Op.48 No.1 in C Min

1:10:47 – Op.48 No.2 in F# Min

1:17:44 – Op.55 No.1 in F Min

1:22:40 – Op.55 No.2 in Eb Maj

1:26:54 – Op.62 No.1 in B Maj

1:33:59 – Op.62 No.2 in E Maj

1:39:30 – Op.72 No.1 (posth.)

 

'이반 모라베츠
이반 모라베츠(Ivan Moravec, 1930년 11월 9일 ~ 2015년 7월 27일)는 체코의 피아니스트이다.

모라베츠는 서양 고전 음악계에서는 비교적 변방인 체코 출신의 숨겨진 피아니스트이다.

지명도는 낮지만 실력은 지명도와는 반비례로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50년대부터 세인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차곡차곡 자신만의 음악적 경력을 쌓아왔으며,

흙 속의 진주와 같은 음악을 음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이반 모라베츠는 1930년 11월 9일,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나 피아노는 에르나 그륀 펠트(Erna Grünfeld)로부터 비교적 늦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20살 때인 1950년 프라하 음악원에 입학하여 체코의 피아니스트이자 저명한 선생님이었던 빌렘 쿠르츠의 딸, 일로나 스테파노바 쿠르조 바(Ilona Stepanova-Kurzova)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하던 그의 팔에 이상이 생겨 5년 동안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했다.

그 후 1957년 가까스로 재기하여 프라하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 연주를 들은 미켈란 제리(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가 그를 아레초(Arrezzo)의 여름 마스터 클래스에 초대하여 친히 그를 가르쳤다.

1958년 모라베츠의 유럽 연주여행은 대단한 성황을 이루어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빛냈다.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리코딩한 것이 대단한 호평을 얻어 조지 쉘의 지휘로 미국 데뷔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그 후 미국  뉴욕을 시작으로 미국 순회연주를 하였고, 유수의 레이블과 녹음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그후 1964년 조지 쉘의 초청으로 클리블랜드 교향악단과 다시 협연하였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모라베츠의 인기는 대단해서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그는 체코 작곡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쇼팽,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작품들도 그의 주요한 리사이틀 레퍼토리이다.

그밖에 브람스, 슈만, 라벨, 프로코피에프, 프랑크 등의 작품에서도 그의 광범한 음악적 해석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가 사망하기 전인 2015년까지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과 독주자로서, 협연자로서 활동했으며 프라하에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의 연주의 특징은 템포의 설정과 프레이징 취급의 독특함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페달링 효용도 절묘해서 그의 음감의 날카로움과 다양성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템포는 낭만파의 작품에서 극히 느리다.

그러면서도 이완된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은 소리 하나하나가 깔끔하게 연마되고 명료한 타건으로 울려 나오기 때문이다.

또 작품에 따라 미묘한 뉘앙스를 살리는 솜씨는 특히 드뷔시의 작품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상당수의 앨범들을 녹음하였고, 현재도 뛰어난 명연의 앨범들을 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투르 노프스키의 지휘와 빈 음악협회 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8번 - 비창>, <제14번 - 월광>, <엘리제를 위하여> 결합반, 역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 열정>, <제27번>, <제32번의 변주곡> 결합반, 드뷔시의 <베스트 앨범>, 역시 드뷔시의 <피아노 리사이틀>, 쇼팽의 <전주곡 24곡> 등이 대표적인 호연반으로 꼽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를 가장 빛낸 앨범은 역시 쇼팽의 <야상곡 집> 일 것이다.

명반 중의 명반으로 알려진 모라베츠의 앨범이다.

모라베츠의 쇼팽은 잘 정제되어있고 투명하다.

때문에 여러 면에서 미켈란젤리와 유사하지만 모라베츠의 음악에는 쇼팽이 가졌음직할 병적인 섬세함이 있다.

녹턴 연주에서도 모라베츠는 악보에만 구애받지 않고 숨겨진 쇼팽의 정서를 읽어내고 있다.

예측이 불가능한 자유로운 루바토, 섬세하게 빛나는 아티큘레이션 그리고 그만이 가지고 있는 소노리티 등 모라베츠의 연주는 프랑소와의 병적인 환상, 루빈스타인의 절제된 미덕과도 그 괘가 다른 연주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프랑소와 연주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안개 자욱한 여름밤이 프랑소와의 연주라면 모라베츠의 연주는 투명한 한여름 밤을 보여준다.

 

모라베츠의 연주는 몽환적인 한 여름밤에 남극의 투명한 겨울바다를 연상시킨다.

녹턴과 같이 잘 알려져 있고 많은 연주자들이 도전한 곡을 매너리즘에 젖지 않고 연주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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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pin : Nocturne op. 9 no. 1 in B flat minor (Rubinstein)

https://youtu.be/ZtIW2 r1 EalM

Chopin's first nocturne op. 9 no. 1 in B flat minor played by Rubinstei

 

 

''녹턴(프랑스어: Nocturne,Nocturne, Nocturne, 라틴어:Nocturnus)[1] 또는 야상곡(夜想曲)은 주로 밤에서 영감 받은, 그리고 밤의 성질을 띄는 악곡의 장르다. 역사적으로 녹턴은 중세시대 아침예배나 정시과 (결혼식을 거행하는 시간) 때 쓰였던 오래된 단어다.

 

역사

녹턴이라는 명칭은 18세기 때 저녁 파티에 주로 연주하던 곡을 일컫는다. 가끔 모차르트의 quadraphonic Notturno in D, K.286에서 보듯이 이태리어 Notturno를 일컫기도 했다. 당시 밤과 연관성은 크게 없었지만,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주로 밤에 연주했던 세레나데 같은 곡이었다.

녹턴은 19세기 때 주로 피아노 독주용 음악으로 번창하였다.

아일랜드 출신 작곡가 존 필드가 최초로 야상곡을 작곡했다. 존 필드는 주로 아르페지오와 칸타빌 레식 멜로디, 그리고 기타 같은 반주 스타일을 반영한 야상곡을 작곡하였고, 최초 야상곡 작곡가이기 때문에 '녹턴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야상곡 작곡의 선구자는 존 필드이지만,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야상곡 작곡가는 21개 야상곡을 작성한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이그나 레이 바흐는 “다섯 번째 녹턴”이라는 19세기 때 제일 유명했던 야상곡을 작곡했지만, 지금은 거의 잊힌 작곡가다. 훗날 야상곡 작곡가 가운데 이름 알려진 작곡가들은 가브리엘 포레,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에릭 사티(1919), 프랜시스 풀랑크(1989), 피터 스쿨 트롭 등이다.

 

벨라 버르토크는 '밤의 악장'이라는 피아노 야상곡에서 자연의 소리를 흉내 냈다.

예를 들자면, 새의 지저귀는 소리나 다른 숲 곤충 소리 외에도,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고독한 느낌까지 드는 멜로디로 곡을 형성하였다.

미국 작곡가인 로웰 리버만은 11개 야상곡을 작곡하였다.

 

20세기 대표적인 야상곡을 더 꼽자면 마이클 글렌 윌리엄스, 새뮤얼 바버, 로버트 헬프스가 작곡한 야상곡이 있다.

또 다른 야상곡은 펠릭스 멘델슨이 작곡한 오케스트라용 [한여름 밤의 꿈](1848) 연주음악, 클라세 데부시가 작곡한 오케스트라와 합창용 야상곡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바이올린용 야상곡 (Violin Concerto No.1, 1948)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야상곡은 피아노 독주용 외에도 다양하게 작곡되었다. 하지만, 이들 야상곡을 보면 쇼팽과 존 필드가 작곡한 야상곡과 느낌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야상곡은 종종 평온하고, 표현력이 풍부하고 서정적이고, 간혹 우울하거나 음침한 느낌을 주로 주지만, 많은 야상곡을 보면 이 외에도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데부시 두 번째 오케스트라용 야상곡 "페테스"와 카롤 시마노 우스키의 "Nocturne and Tarantella" (1915), 그리고 카이코 스루 사 푸르지 소랍지의 "Symphonic Nocturne for Piano Alone" (1977-78) 같은 예는 매우 활기차고 흥이 돋는 느낌을 준다.

 

녹턴이라는 단어는 후에 미술분야에서도 쓰였다.

제임스 아봇 맥닐 휘슬러는 자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타일의 그림을 "녹턴 페인팅 painting"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드뷔시 야상곡들은 휘슬러 그림에 영감을 받았다.

 

 

 

대표적인 야상곡 작곡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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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 녹턴, Op.9 2번 (Chopin - Nocturne, Op.9 No.2)

https://youtu.be/22 p4 qhnMZSc

'이 곡은 쇼팽 녹턴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곡으로, 매우 감미롭고 꿈같은 Eb장조 멜로디가 마음을 울리는 곡이죠... ㅠㅠ

쇼팽이 20~21세 때 작곡하였으며, 곡이 발표될 당시에는 선율이 평범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곡명: 녹턴 내림마장조, Op.9 2번

작곡가: 프레데릭 프랑수아 쇼팽

프로그램: NWC 2.75, BMsynth

사운드 폰트: Orchestra Soundfont 2 COMBO

Name: Nocturne in E flat major, Op.9 No.2

Composer: Frédéric François Cho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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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nocturne)

쇼팽의 야상곡 중 대표작인 Op.9 no.2

 

19세기에 주로 피아노를 위한 성격 소품으로 개발되었다. 1814년 최초로 야상곡 집을 펴낸 아일랜드의 작곡가 존 필드로부터 비롯된 이 양식은 21곡(표제가 있는 것 19, 표제가 없는 것 2)의 야상곡을 남긴 프레데리크 쇼팽에 이르러서 그 절정에 달했다.

쇼팽의 야상곡은 즉흥곡·전주곡과 마찬가지로 낭만 소품에 해당하지만 이것들보다 기법적으로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는 더욱 친숙하고 서정적인 시적 느낌을 담고 있다.

 

독일에서 야상곡(Nachtstück) 양식은 로베르트 슈만부터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1922)을 작곡한 파울 힌데미트에 이르는 작곡가들을 매료시켰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클로드 드뷔시는 야상곡이라 이름 붙은 3편의 주옥같은 관현악 소품들을 작곡함으로써, 매우 성공적으로 이 양식을 관현악에도 확장시켰다. 그 후 20세기에 벨라 버르토크는 〈야외에서 Out of Doors〉의 4악장과 현악 4중주 4번의 3악장 같은 작품들 속에서 스산한 분위기의 매우 개성적인 야상곡 양식을 발전시켰다.

 

18세기 말 실내 합주를 위한 가벼운 모음집인 이탈리아의 노투르노(notturno)는 19세기의 서정적인 야상곡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세레나데나 카 사치오네(cassazione : 18세기에 야외에서 연주하도록 만들어진 기악의 한 형식)처럼 적어도 노투르노는 처음에는 보통 야외에서 야상곡처럼 연주되도록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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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 - 녹턴 13번 Op. 48 No. 1 (Chopin - Nocturne 48-1) + Sheet

'https://youtu.be/qR4 F6 HVbyTU

'쇼팽 - 녹턴 13번 Op. 48 No. 1

F. Chopin – Nocturne No. 13 in C minor, Op. 48, No. 1

One of the most beautiful chopin pieces

sheet : https://imslp.simssa.ca/files/imgl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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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녹턴(프랑스어: Nocturne) 또는 야상곡(夜想曲)은 

폴란드의 작곡가인 프레데리크 쇼팽이 1827년에서 1846년까지 작곡한 21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스물한 개의 녹턴은 피아노 연주회에서 자주 연주되며 완벽한 작품으로도 손꼽힌다. 쇼팽은 아일랜드의 작곡가인 존 필드가 창조한 녹턴(야상곡)을 더욱 확장시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다.

 

녹턴 1번부터 18번까지는 쇼팽의 생전에 출판이 완료되었으나 19번부터 21번까지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19번부터 21번까지는 쇼팽이 폴란드에 있을 때에 작곡되어 1번보다 작곡 시기가 앞선다. 심지어 21번은 쇼팽이 녹턴이라는 어떠한 표기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870년에 처음 출판된 때부터 지금까지 쇼팽의 녹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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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녹턴의 특징

쇼팽의 녹턴은 필드가 이전에 작곡한 것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쇼팽은 녹턴 전곡에서 오른손이 서정적인 가락을 마치 노래하듯 연주하는데, 이는 필드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유사하다. 오른손의 감미로운 멜로디는 감정의 깊이를 더하여 청자로 하여금 더욱 심취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또한 오른손에 맞추어 왼손은 아르페지오의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쇼팽은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를 발전시켜 나갔다.

쇼팽은 페달의 사용범위를 넓혀 비극의 여운이 오래 남아있는 듯한 느낌을 제공한다. 이로써 감정표현의 수준이 한 층 심화되었고 극적인 멜로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쇼팽은 고전 작품의 리듬을 가져오기도 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 아리아를 모방한 부분도 있는데, 프란츠 리스트는 쇼팽이 빈첸초 벨리니의 벨칸토 아리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또 쇼팽은 텐션을 만들기 위해 대위법을 사용함으로써 음악의 드라마틱함을 더욱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팽은 이 작품들에서 고전 오페라의 영향, 자유로운 리듬, 구조와 멜로디의 깊이를 보여준다.

존 필드가 세운 곡의 구조적 토대를 기반으로 모차르트의 소리를 구현함으로써 고전주의 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을 한 데로 묶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로써 쇼팽은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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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쇼팽의 녹턴은 다양한 조성과 빠르기를 취하고 있으나 대부분 세 도막 형식(A-B-A)과 유사한 형식을 보인다.

녹턴 2번부터 마지막인 21번까지 드러난 주제음과 곡의 마지막까지 주제에 조금씩 장식적인 음을 가미해 변화를 시도하는 방법이 택해있다.

7번과 8번 녹턴(작품번호 제27번)부터는 쇼팽이 2개씩 묶어 출판하였다. 빠르기는 렌토, 라르게토, 안단테, 알레그레토가 대체적으로 사용되어 느린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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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녹턴, Op. 9 No. 1, 2, 3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에는 호평과 혹평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러나 처음에 비판을 한 비평가들이 시간이 지나며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쇼팽이 1849년에 사망한 후 녹턴은 각 곡마다 인기가 천차만별이었으나 Op. 9, No. 2와 Op. 27, No. 2의 인기가 특히 높았다.

 

쇼팽의 생전과 사후에 생존해있던 많은 작곡가들은 쇼팽의 녹턴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이 고유한 작품에 표출되기까지 이르렀다.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바그너와 같은 작곡가들은 쇼팽이 자주 사용하던 단순한 멜로디 작곡 기법과 방식을 차용하였고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 프란츠 리스트와 같은 작곡가들은 쇼팽의 녹턴에 숨어있는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로써 쇼팽이 작곡한 스물한 개의 녹턴이 낭만시대의 음악가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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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 녹턴 Op.48 1번 (Chopin - Nocturne Op.48 No.1)

'https://youtu.be/lGpbyc54 LtE

이번 곡은 쇼팽의 13번째 녹턴인 Op.48의 1번 곡입니다!

쇼팽의 작곡 인생에서 원숙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때 발라드 3번과 환상곡 Op.49를 작곡함)에 만들어졌으며, 도입부, 트리오, 그리고 재현부(Doppio Movimento)로 나뉘어 있는 곡입니다.

개인적으로 녹턴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이네요 ㅎㅎ

곡명: 녹턴 Op.48 1번

작곡가: 쇼팽

프로그램: NWC 2.75, BMsynth

사운드 폰트: Sal-Stein-Uprights-Detailed-V3.0

Name: Nocturne Op.48 No.1

Composer: Frederic Francois Chopin

Program: Noteworthy Composer 2.75, BMsynth

Soundfont: Sal-Stein-Uprights-Detailed-V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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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Nocturne Op.48 No.2 By Arthur Rubinstein (14/154)

https://youtu.be/O5X4 XDrs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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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Nocturne Op.55 No.1 By Arthur Rubinstein (15/154)

'https://youtu.be/e3 yrEEM5 j_s

 

 

 

'''쇼팽 녹턴 C#단조 (유작) http://youtu.be/m5 qeuVOIbHk (피아노 아슈케나지)
쇼팽은 진실된 사람이었다. 그는 허세를 싫어했고, 과장된 칭찬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쇼팽은 다른 피아니스트를 입에 발린 말로 추켜세우는 사람도 아니었다. 안느 벨르빌(Anne Belleville)은 쇼팽이 극찬한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바르샤바에서 그녀의 연주를 들은 쇼팽의 말. “여기 피아노를 가볍고도 우아하게, 매우 잘 치는 벨르빌이란 프랑스 여자가 있습니다.” 쇼팽은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하여, 10여 년이 지난 1840년 왈츠 한 곡을 헌정했다.

왈츠 F단조 Op.70-2 http://youtu.be/euLyQCJmCfs (피아노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이 곡을 벨르빌에게 헌정하며 쇼팽이 쓴 편지.

“이 조그마한 왈츠는 당신을 위해서 쓴 것입니다. 나는 이 왈츠를 당신이 갖고 있기 원할 뿐,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이 왈츠를 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음악 하나에 마음 한 조각을 담아서 오직 한 사람에게 준, 순수한 정성이 느껴진다.

이 곡은 쇼팽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작’으로 남았다.

누군가에게 헌정했는데,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해서 쓴 곡이기 때문에 ‘유작’으로 전해진 곡은 또 있다. 매혹적인 선율에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노래한 녹턴 C#단조. http://youtu.be/m5 qeuVOIbHk (느리게, 풍부한 표정으로, 피아노 아슈케나지) 1830년, 고향을 떠난 직후 빈에서 작곡하여 누나 루드비카에게 보낸 곡이다.

선율이 몹시 아름다운 이 곡은, ‘노래하는 악기’인 바이올린 독주곡으로도 널리 연주된다.

쇼팽 자신은 이 곡을 ‘녹턴’이라 부르지 않았다. 출판업자가 “녹턴이라 해야 악보가 잘 팔린다”라고 누나 루드비카를 설득한 결과 ‘녹턴’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쇼팽 시절에는 ‘녹턴’이 인기 있는 장르였다는 것.

‘녹턴’은 보통 ‘야상곡’으로 번역하는데, 가톨릭 기도서에서는 ‘밤에 봉헌하는 미사’를 뜻한다고 한다.

꿈꾸는 듯한 선율에 밤의 매혹적인 상념을 담은 세 도막 형식의 독주곡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고전시대의 ‘세레나데’나 ‘노투르나’와는 관계가 없다.

   
 
 
쇼팽 녹턴 1번 C#단조 Op.9-1 http://youtu.be/WnFs85 pLmj4 (피아노 루빈슈타인)
이유를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이 곡이 가장 ‘전형적인’ 녹턴이라고 생각해 왔다. 저녁 시간의 달콤한 서정을 이렇게 매혹적으로 표현한 곡이 없는 것 같다. 감상에 잘도 빠지던 중학 시절, 저녁때면 불을 끈 채 어둠 속에서 이 곡을 몇 번이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표지에 밀로의 비너스상이 있는 파란 색깔의 LP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아르투어 루빈슈타인의 연주다.

쇼팽 녹턴 Db장조 Op.27-2 http://youtu.be/E_2 PjSzZO9 o (피아노 루빈슈타인)

이 곡 또한 전형적인 녹턴이라 할 만하다. 어린 내게 Db장조라는 ‘희한한’ 조성도 신기해 보였고, 멜로디 선이 조금 뒤틀려서 흘러가는 게 절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단조로 변하는 대목은 열정적이었고, 후반부에서 차분히 노래하는 대목은 정다운 대화처럼 들렸다. 이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모습을 TV에서 본 일이 있는데,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쇼팽 녹턴 2번 Eb장조 Op.9-2 http://youtu.be/Nu48 Z45 ibxQ (피아노 루빈슈타인)

쇼팽의 녹턴 중 가장 유명한 곡이다. 그냥 ‘쇼팽의 녹턴’ 하면 이 곡을 가리키는 걸로 이해된다.

따뜻하고 달콤한 선율, 곁에서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에 작곡을 시작, 파리에 도착한 뒤 완성했다. 그가 파리의 살롱에서 인기를 누리는데 큰 보탬이 된 곡이라고 한다.

쇼팽의 녹턴은 순수한 터치로, 지나친 감정에 빠지지 않고 연주하면 절대 진부하지 않다. 쇼팽 음악의 본질, 특히 선율과 장식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도록 잘 이해하고 연주하면 살롱 스타일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명곡 해설 라이브러리, 쇼팽>, 음악세계, p.160)

쇼팽은 21곡의 녹턴을 작곡했는데, 초기 녹턴들은 더블린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존 필드의 녹턴에서 자극을 받아 만들었다.

왼손이 화음으로 반주할 때 오른손이 우아한 선율을 노래하는 쇼팽 녹턴의 특징은 존 필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쇼팽의 녹턴은 형식과 내용에서 존 필드의 작품을 뛰어넘고 있다. 존 필드가 보여주지 못한 열정을 담고 있으며, 표현 방식도 매우 다양하다. 평론가 하네커의 말. “쇼팽은 필드가 창안한 형식을 한층 발전시켜 극적인 숨결과 정열과 웅장함을 부여했다.”

   
▲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 녹턴이라는 피아노 소품 양식을 고안하여 그가 작곡한 20곡 가까운 녹턴은 쇼팽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또 쇼팽에 의해서 정교하고 세련된 피아노 소품으로 완성됐다. ⓒ 네이버
 
쇼팽의 녹턴에 직접 영향을 미친 존 필드(1782~1837)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모차르트와 실력을 겨룬 바 있는 거장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의 제자였다.

장사에 능했던 클레멘티는, 팔려고 진열해 놓은 피아노 앞에서 필드가 하루 종일 연주하게 했다. 키 크고 창백한 피아니스트 존 필드의 경력은 피아노 판촉사원으로 시작된 셈이었다.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20살 되던 해인 1802년부터 파리, 빈, 페테르부르크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두며 인기 절정의 연주자로 우뚝 섰고, 일생의 절반을 러시아에서 보냈다.


1831년 쇼팽이 처음 파리에 나타났을 때 존 필드의 명성은 따를 자가 없었다. 쇼팽은 자기가 필드와 비교되는 것을 자랑스레 얘기한 일이 있다. “내게서 배운 학생들은 내가 필드만큼 훌륭하다고 얘기해요.” 이 무렵 쇼팽의 연주를 들은 존 필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병실의 재주꾼에 불과하군.” 쇼팽의 음악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첫인상을 거칠게 내뱉은 걸로 보인다.

아무튼, 당시 사람들은 필드의 연주를 평하며 ‘꿈꾸는 듯한 비애’가 서려 있고,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취향(taste)’을 갖고 있고, ‘불변의 우아함과 섬세함, 감정적 표현’이 뛰어나고, ‘벨벳 위의 진주’처럼 흘러간다고 극찬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존 필드는 쇼팽과 같은 독특한 음색과 섬세한 다이내믹을 갖고 있었던 걸로 여겨지며, 이런 의미에서 “쇼팽을 예고하고 있었다”라고 볼 수 있다. (해럴드 숀버그 <위대한 피아니스트>, 나남, p.147) 그는 게으르고, 예의 없고, 음주벽이 심했다고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소명은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종의 자리에서 목사와 나눈 대화.

“신교도입니까?”
“아니요.”
“가톨릭이시군요.”
“상관하지 마세요.”
“캘빈파(Calvinist)입니까?”
“아니요, 저는 캘비 니스트(Calvinist)가 아니라 클라브 새 니스트(Clavecinist, 피아니스트)입니다.”

쇼팽의 녹턴이 존 필드의 녹턴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필드는 훗날 자신의 녹턴이 무시당하는데 반해 쇼팽의 녹턴이 인기가 높은 것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럴드 숀버그, 같은 책, p.147) 존 필드의 녹턴, 같은 아일랜드 출신 피아니스트 존 오코너의 연주로 들어보자. 아늑한 분위기에서 부담 없이 들을 만한, 가벼운 살롱 음악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3yIp6t-0lMA&feature=share&list=PL9D2736529BA73225

다시 쇼팽의 녹턴. 쇼팽의 음악은 어떤 장르의 곡이든 조국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담고 있는데, 녹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향수>라는 별명이 붙은 G단조 Op.37-1. http://youtu.be/9 PB3 bYaWosM 거장 루빈슈타인의 연주, 첫 음에서 목이 멘다.

눈물을 머금은 채 우수에 잠겨 끝없이 걸어가는 쇼팽의 모습이다. 중간 부분(링크 2분 34초부터)에서는 아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간다. 이 곡에 표현된 내면의 목소리와 절제된 슬픔, 이미 존 필드와 비교할 수 없는 쇼팽만의 개성이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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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Frédéric(-François) Chopin

 

출생 : 1810. 3. 1, 바르샤바 근처 젤라조바볼라
사망 : 1849. 10. 17, 프랑스 파리
국적 : 폴란드/프랑스

요약 낭만주의 시대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피아니스트. 피아노 협주곡, 마주르카, 폴로네즈, 연습곡, 야상곡 등 많은 피아노곡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7세에 작곡, 출판을 했고, 8세에 공개 공연을 했다. 16세에 엘스너에게서 교육받으면서 낭만주의를 접했다. 쇼팽은 음악적으로는 감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새로운 기교 넘치는 운지법을 개발했다. 또한 낭만주의를 추구했지만 낭만적인 치장보다는 고전적 순수함이 있었다. 쇼팽의 대표곡으로 자주 연주되는 곡으로는 〈연습곡〉 Op.10·〈야상곡〉 제2번 op.9·〈폴로네이즈〉 제6번 '영웅' op.53·〈즉흥 환상곡〉 op.66 등이 있다.

쇼팽

Frédéric Chopin by Bisson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피아노 협주곡과 55곡의 마주르카, 13곡의 폴로네즈, 24곡의 전주곡, 27곡의 연습곡, 19곡의 야상곡, 4곡의 발라드, 4곡의 스케르초를 포함한 피아노 소품들로 유명하다.

 

뛰어난 상상력과 섬세한 장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음악에 있어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인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젤라조바 볼라의 스카 르벡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스카 르벡 집안의 가난한 친척과 결혼했다. 쇼팽이 태어난 지 8개월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바르샤바에 있는 학교의 프랑스어 교사가 되었으며 쇼팽 자신도 1823~26년 그 학교에 다녔다. 가족 모두가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아기의 쇼팽도 항상 그의 어머니나 누나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6세 무렵에 이미 그는 그가 들었던 것을 재현하려고 하거나 새로운 선율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다음 해 그는 61세의 보이체크 (아달베르트) 지브니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브니는 당시 유행하던 근대의 기교파 작곡가들과 바흐, 모차르트 및 베토벤의 가치를 비교·고찰하는 명민한 감각을 소유했던 다재다능한 음악가였다.

 

쇼팽은 어려서부터 개인의 저택에서 열리는 저녁 음악회에 초청되었고 8세에 공공 자선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공개 연주를 가졌다.

3년 후 의회 개회를 위해 바르샤바에 온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그는 새로운 종류의 오르간인 에올로 멜로디 콘(지방 음악가가 고안)으로 즉흥 연주를 했다. 신동으로서의 명성은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7세에 그는 폴로네즈 G단조를 작곡하여 출판했으며 곧 그가 작곡한 행진곡이 콘스탄틴 대공의 마음을 끌어 대공 자신의 군악대가 행진할 때 이 곡을 쓰도록 했다.

 

그밖에 폴로네즈·마주르카·변주곡·에코 세즈(활기찬 스코틀랜드 춤곡)·론도(주요 부분이 반복되는 음악 소품) 등을 계속 작곡했으며 그 결과 그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그를 새로 설립된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그 음악원의 교장은 폴란드의 작곡가 요세프 엘스너였는데 쇼팽은 그에게 여러 해 동안 음악이론을 배웠다.

 

쇼팽에 있어 엘스너는 최상의 선생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낭만주의적 경향의 작곡가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쇼팽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단순한 제도적 교육의 테두리에 가두 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의 활기찬 음악생활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보다 폭넓은 음악적 경험을 필요로 했다. 재정적 보조 요청에 대한 정부의 거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쇼팽의 헌신적인 부모는 그를 빈으로 보낼 수 있는 돈을 구했다.

 

엘스너의 소개로 쇼팽은 곧바로 빈의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에게 갔으며 하슬링거는 쇼팽이 선전을 위해 무료로 공개 연주회를 갖는다는 조건으로 그가 작곡한, 모차르트의 〈라 치 다렘〉 주제에 의한 변주곡들을 출판할 것에 동의했다.

빈에서 새로 사귄 다른 친구들도 그의 무대 출연을 주장했고 그 결과 쇼팽은 1829년 8월에 2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지나치게 섬세한 터치로 청중들에게 약간의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그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환영 인파의 광적인 소란 속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소란은 그가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감으로써만 완전히 진정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1829년 9월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의 매력적이고 인기 있는 젊은 성악도인 콘스탄티아 글라드 코프 스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시기의 그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은 사람의 목소리(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포함된 것)로, 아름다운 선율과 현란한 장식이 있는 야상곡과 시적인 기교를 보여주는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의 서정 악장들도 이때에 작곡되었다. 1830년 3월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연주로 성인으로 바르샤바 데뷔를 했다. 그는 이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콘스탄티아를 추억하여 작곡했다고 고백했다.

 

1830년 11월 말 빈에서 쇼팽은 대중의 취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하슬링거가 자신의 작품을 계속 출판하는 모험을 주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아무도 다투어 그를 연주회에 초청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더 많은 공부를 하려 했을 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도 없었으며 이미 그의 부모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경제적 부담을 주었다는 것도 알았다.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항해 봉기했다는 소식은 모두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돌아와 싸움터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빈 사람들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인 민족적 갈등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는 곧 보다 이상적인 환경을 찾아 파리로 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여권 발급이 늦어지는 지루한 기간 동안 그는 애국적인 시에 곡을 붙이거나 〈스케르초 B단조〉 작품 20과 〈혁명 연습곡〉 작품 10·12와 같은 격렬한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결국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해 바르샤바가 러시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절망으로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1831년 9월 말경에 파리에 도착한 그는 그 규모와 함께 '화려함과 추잡함, 미덕과 악덕'의 극치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곧 폴란드 밖의 그 어디에서도 혈족의 끈끈한 유대감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빈에 있는 친구의 소개로 파리의 연주 무대에서 성공한 인물들과 사귈 수 있게 되었지만 쇼팽은 곧 많은 폴란드 이주민들과 프란츠 리스트, 엑토르 베를리오즈, 펠릭스 멘델스존, 빈센초 벨리니를 포함한 보다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과 첼로 연주자 오귀스트 프랑콤에게서 정서적인 동질감을 발견했다. 파리에서 먼저 부딪힌 문제는 직업과 재정적인 문제였다.

 

카미유 플레옐의 살롱에서 1832년 2월에 있었던 데뷔 연주와 음악원 대강당에서 5월에 있었던 연주 이후, 그는 건반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극단적인 섬세함으로 인해 보다 큰 공간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부합할 수 없음을 알고 낙심했다. 그러나 금융업을 하는 부유한 로트 실드 가족과 만나게 됨으로써 갑자기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우아한 매너와 세련된 옷차림,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인 쇼팽은 연주가·음악교사로서 파리의 대저택에서 가장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곡으로는 놀랄 만큼 시적인 2권의 연습곡집 〈발라드 G단조〉·〈즉흥 환상곡 Fantaisie-Impromptu〉, 쇼팽의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등 작은 소품들이 있다.

 

1835년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기억할 만한 해였다.

쇼팽은 보헤미아의 카를스바드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서 오랜 폴란드 친구인 보드 진스키 일가를 만났는데 그는 그 집안의 딸인 매력적인 16세의 소녀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쇼팽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문을 들은 보드 진스키 부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크게 상심한 쇼팽은 친구 플레옐과 함께 영국으로 짧은 여행을 했는데 파리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1836년 가을 리스트와 그 밖의 문학하는 친구들과 함께 쇼팽은 선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오로르 뒤팽 혹은 뒤드방 부인)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그의 정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마리아에 대한 애정, 파리 사람들의 소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였지만 1838년 가을, 결국 그의 도덕적인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고지식한 것으로 생각하는 상드와 그녀의 아이들인 모리스, 솔랑주와 함께 겨울을 보내기 위해 마요르카 섬으로 갔다.

 

그들은 팔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조촐한 별장을 빌려 목가적이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얼마 안 가서 행복한 생활은 끝나고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가 결핵이라는 소문이 별장 주인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그곳에서 쫓겨났으며, 멀리 떨어진 발데모사의 마을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프랑스 영사의 배려에 그들 자신을 맡겨야만 했다.

추위와 습기, 영양실조, 게다가 그들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의심과 제대로 된 연주용 피아노의 부재는 쇼팽의 작품 활동에 지장을 주었으며 그의 위태로운 병세를 더욱 악화시켰다.

 

상드는 즉시 그곳에서 떠나야만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1839년 3월 초에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며 훌륭한 내과의사의 도움으로 쇼팽은 불과 3개월 만에 충분히 회복되었고 파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파리 남쪽으로 290km 정도 떨어진 노앙에 있는, 상드가 좋아하는 시골집에서 1839년 여름을 보냈다.

 

쇼팽 역시 처음에는 장미꽃이 피고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는 한적한 정원에 매혹되었지만 자신이 전원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1841년 4월 첼로 연주자인 친구 프랑콤과 메조소프라노 폴린 비아르도가 함께 출연하는 연주회에 앞서 계획된 플레옐의 저택에서 파리 귀환을 알리는 반(半) 공개 연주회에 초청되어 파리로 돌아왔고, 또한 튈르리 궁에서 루이 필리프 왕을 위해 연주회를 열도록 부탁받기도 했다.

이 연주회를 통해 경제적인 대가를 얻었지만 정신적인 압박은 너무나 컸다. 그는 안정된 수입원을 얻기 위해 다시 개인교습을 시작했다.

피아노 레슨에서 그는 손목과 팔의 유연한 움직임을 강조했으며, 아름답고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만드는 것을 가장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아 민첩한 손놀림을 위해 과감하게 비전통적인 운지법을 사용하게 했다. 점차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으며 출판업자를 상대하는 솜씨도 능숙해짐에 따라 그는 좀 더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다.

 

쇼팽에 대해 모성애적인 태도를 갖게 된 상드는 매년 여름(1840 제외) 그를 노앙으로 데려가 신선한 공기를 쐬며 휴식하게 했다. 폴린 비아르도와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 등 절친한 친구들도 초대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1844년에는 쇼팽의 누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쇼팽은 〈환상곡 F단조(1840~41), 〈바르카롤 레〉(1845~46), 〈환상 폴로네즈〉(1845~46), 〈발라드 A♭장조〉(1840~41), 〈발라드 F단조〉(1842), 〈소나타 B단조〉(1844) 등과 같은 소품과 그밖에 보다 규모가 큰 작품 등 자신의 작품 중 상당수를 노앙에서 작곡했다. 노앙에서 평온을 되찾았고 완벽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음악적 아이디어를 보다 길고 복잡하게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심지어는 대위법을 보강하기 위한 음악적 논문을 구하러 파리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화성 어법은 훨씬 대담해졌는데 그러면서도 감각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그는 평생토록 감각적 아름다움을 좇았으며 묘사적 제목이나 '표제'에 대한 암시 수법을 아주 싫어했다. 쇼팽이 좀 더 안정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노앙에서 보낸 여름 생활들을 훨씬 잘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오히려 상드와의 긴장된 관계로 인해 점차 우울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1847년 여름 더 이상 노앙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듬해에 결국 상드와 헤어졌다. 둘은 재결합을 원했으나 자존심 때문에 이러한 바람은 끝내 무산되어 버렸다.

상드와의 결별이 가져다준 정신적 파탄과 1848년 2월 16일 플레옐의 저택에서 있었던 연주회(새로 작곡한 첼로 소나타를 프랑콤과 함께 연주함) 이후 불과 며칠 사이에 파리에서 발발한 혁명으로 인해 낙담한 쇼팽은 그를 숭배하는 44세의 스코틀랜드인 제자 제인 스털링의 초청을 수락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해 부활절과 8월 사이에 3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놓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우아한 방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필하모닉 협회에서 제안한 직책을 포함한 모든 고정 직책에 대한 제의를 거절하고는 런던 순회 레슨과 파티 참석에 열을 올렸다.

토머스 칼라일, 찰스 디킨스, 제닌 린드와 같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예술을 단지 신분의 상징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많은 외국인들과의 접촉에서 오는 긴장을 조금은 경감시켜 주었다. 그러다가 한여름에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스코틀랜드로 탈출해서 에든버러, 글래스고 및 스털링 근처에 있는 스털링 귀족 가문의 몇몇 친척 집에서 쉬었다.

 

그러나 점점 쇠약해지고 향수병에 시달려 스털링의 헌신적 애호에 보답할 수 없다는 난처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면서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었다. 3주 동안 런던에 돌아와 있으면서 그는 폴란드 난민을 위한 자선 무도회에서만 연주했으며 11월 24일 파리로 돌아왔다. 다음 해 봄 건강이 악화되자 의사는 보다 맑은 공기를 위해 샤요 교외로 나갈 것을 권했고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으로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나이 든 그의 어머니까지 2,000프랑을 보내왔다.

 

1849년 8월에는 누이가 찾아왔으며 파리 중심부의 넓은 새 아파트로 돌아온 후 마지막 남은 몇 달 동안 보고 싶어 하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남은 생을 보냈다. 쇼팽은 폴란드 사제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고 자신의 미완성 악보를 파기할 것과 그의 장례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도록 유언했으며 그의 마지막은 평온했다. 장례식은 10월 30일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식후에는 애도객들이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까지 그의 관을 뒤따랐다.

 

1년 후 깨진 리라를 들고 슬퍼하는 뮤즈를 조각한 기념비가 제막되었을 때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이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비록 폴란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아 엘스너를 실망시켰고, 파리 귀족들의 응접실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폴란드의 망명 애국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를 낙담시켰으며, 규모가 큰 학구적인 업적으로만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성 비평가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가치는 보다 통찰력 있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의 다른 비평가들은 절묘한 기교와 조화된 놀라운 독창성에 감탄했다. 오늘날 그는 인간 내면의 은밀한 곳을 보는 통찰력과 피아노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신비롭고 새로운 음향의 발견으로 인해 불멸의 음악인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그는 개성적인 선율을 만들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드문 재능을 가졌지만 결코 감상적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비록 그 본질에 있어서는 낭만적이었지만 쇼팽의 음악에는 낭만주의의 치장이 전혀 없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고전적 순수함과 신중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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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의 녹턴

No. 조성 작품번호 출판연도 작곡 연도 첫 부분 연주

1 내림나단조 Op. 9, No. 1 1832 183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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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로비누
2 내림마장조 Op. 9, No. 2 1832 183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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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골드스타인
3 나장조 Op. 9, No. 3 1832 183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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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치아 프라티
4 바장조 Op. 15, No. 1 1833 183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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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올림바장조 Op. 15, No. 2 1833 1830–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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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단조 Op. 15, No. 3 183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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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구레빅
7 올림다단조 Op. 27 No. 1 183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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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라장조 Op. 27 No. 2 183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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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장조 Op. 32 No. 1 183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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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림가장조 Op. 32 No. 2 183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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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단조 Op. 37 No. 1 184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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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장조 Op. 37 No. 2 184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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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구레빅
13 다단조 Op. 48 No. 1 184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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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 폴크너
14 올림바단조 Op. 48 No. 2 184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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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 폴크너
15 바단조 Op. 55 No. 1 1844 1842–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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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림마장조 Op. 55 No. 2 1844 1842–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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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장조 Op. 62 No. 1 184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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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마장조 Op. 62 No. 2 184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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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단조 Op. 72 No. 1 1855 18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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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존스턴
20 올림다단조 P 1 No. 16 187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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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둔
21 다단조 P 2 No. 8 193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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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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