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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 박씨 行祚 할아버지 자손들의 살아온 이야기

나의 꿈 (박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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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야기

2020. 8. 15.

나의 꿈은 여든이 넘은 어느 이민자의 꿈이 어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박혁거세 왕의 62세손 박섭용(朴燮鏞, 1928.12.6 - 2016. 4.12)은 운봉 박씨 집안의 종손(宗孫)이었다. 그는 1978년 5월 미국 로스안젤레스로 이민을 떠나 홍균, 양선, 계연 등 1남 2녀를 UCLA 등 명문교에 진학시키고 새 땅에서 기반을 잡게 한 다음 은퇴하였다. 그럼에도 항시 집안의 종손임을 잊지 않고 고향 운봉을 그러워하는 글을 여러 편 동창회지 등에 기고하였다.
아래 소개한 글도 그 중의 한 편이다.

 

다음 사진은 2012년 여름 미국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중에 아들 내외, 두 딸, 사위, 손주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나의 꿈

친애하는 S형에게,[1]

“나는 꿈이 있네”라 하니 1963년 미국 워싱턴DC에서 행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연설 같네만 아주 단순한 꿈일세. 그것은 소수민족의 인권을 찾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 조상의 뿌리를 찾아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고향 땅을 가봤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일세.

그 시기는 2012년 여름이라네. 이 꿈을 이루려면 첫째, 내가 2112년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고, 둘째, LA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가서 자동차로 다섯 시간 정도를 달려 고향에 다녀올 정도의 건강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지.

왜 2012년이냐? 마야 달력으로 2012년에 종말이 온다는 풍설을 믿어서가 아닐세. 나에게는 올해 쉰이 된 외아들이 있고 손자가 둘인데 16세, 13세라서 적어도 큰손자가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한국으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일세. 이민 2세로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라고 다를 바 없지.

운 봉

인생의 황혼기에 처한 우리 연배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애착, 추억은 요즈음 젊은 사람에 비하면 남다른 점이 있지만, 나의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네.

내 고향 운봉(雲峰)은 춘향전으로 유명한 남원에서 지리산 쪽으로 50리, 여원재(女院峙)라는 큰 고개를 아흔아홉 고비를 꼬불꼬불 돌고돌아 올라가면(지금은 남원-운봉간 직선화된 도로가 뚫려 남원에서 시내버스도 다니지만 내 기억이 그렇다는 말이네) 해발 550m의 드넓은 분지형 고원지대가 나오지.

앞으로는 해발 1,000m가 넘는 덕두봉, 배래봉, 세걸산 등의 아름다운 연봉(連峰)이, 뒤로는 그보다는 낮지만 고남산 등이 둘러싸 사면이 마치 아름다운 병풍을 둘러친 듯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지. 나는 그곳 읍내 서천리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다네.

서천, 동천, 북천의 지명이 말하듯이 이곳은 낙동강의 발원지로서 사방의 계곡물이 산내(山內)의 실상사(實相寺) 앞을 지나 산청, 진주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지. 남쪽으로 50리 가량 내려가면 유명한 화엄사가 있는 전남 구례 땅이고 경상도 쪽으로 팔량치(八良峙)라는 고개를 넘어가면 경남 함양 땅이네.

1년 농사를 지으면 3년을 먹고도 남는다는 비옥한 논과 밭이 지천이여서 농사를 지어 유복하게 사는 가운데 인심이 따뜻하고 후하기가 이름난 고장이었네.

 

또 이 고장은 앞에 쓴 대로 사방이 큰 고개로 둘러싸인 하늘이 내린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신라와 백제가 서로 뺏고 뺏기기를 거듭했다고 하지.

고려 말 우왕(禑王) 6년(1380년) 9월 이성계 장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 고장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를 대파하여 지금도 그 현장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서 있지. 일제가 파괴한 것을 그 자리에 복원한 것이라네.

우리 어렸을 적에 ‘옛날이야기’처럼 들은 전설이 있지. 적장 아지발도(阿尺拔都)는 왜구를 이끌고 승리를 거듭하며 운봉까지 쳐들어 왔다네. 그 자는 20대임에도 몸집이 크고 괴력을 지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 게다가 온몸을 철갑으로 무장하여 공격할 곳이 없었다 하네. 이성계 장군은 퉁두란(佟豆蘭)이라는 수하 장수와 짜고 자기가 적장의 투구를 화살로 맞힐 때 반사적으로 입을 벌린 적장의 목을 퉁드란이 활로 쏘아 쓰러뜨렸다 하네. 오합지졸이 된 왜구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흘린 피가 큰바위를 적시어 붉게 물든 피바위가 지금도 전해져 온다네. 또한 전투가 한밤중까지 계속되어 달이 서산에 기울자 이성계 장군이 신통력을 발휘하여 지는 달을 다시 끌어 올렸다고 하는 ‘인월(引月)’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네.

또 다른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 오지. 임진왜란 때 진주를 거쳐 함양까지 치고 올라온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운봉을 거쳐 남원성을 공략할 참이었지. 그런데 아지발도처럼 될까 두려워 가토 기요마사가 문경새재 쪽으로 우회하는 바람에 운봉과 남원은 정유재란 때까지 5년간 병화(兵禍)를 면할 수 있었다네.

고향 선영

이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에 운봉 박씨가 대를 이어 살아온 것은 박혁거세 시조의 40세손인 중화공(仲華公)이 고려 말에 시중찬성사(侍中贊成事)에 올라 운봉군으로 봉군(封君)되고 운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인연 때문일세. 47세손까지는 서울이나 경기 지방에서 벼슬을 하시다 48세손 명신(明信) 선조님이 낙향하시어 오늘에 이르렀지. 내가 62세손이니 실로 15대를 이어온 셈이네.

지금은 각자 생업을 쫓아 객지로 흩어졌으나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운봉 근방에 260호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으니 그야말로 박씨 집성촌(集姓村)이었지.

어릴 때 어른들 따라 추석에 성묘하는 데만 이틀, 사흘이 걸렸고 설날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닌 기억이 있네. 기제사나 생일 같은 잔치가 있으면 음식을 집집마다 나누어 먹었지.

우리 아버지 형제자매가 6남 3녀 9남매인데 그분들이 태어난 생가가 하나같이 내가 태어난 운봉읍 서천리 161번지라네. 물론 나의 동기 5남매도 같은 장소에서 태어났다네.

내가 관리하고 있는 산소는 고조부모님,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부모님 8위일세. 증조부모님, 조부모님, 부모님 모두 내 생전에 돌아가신 분들이고 산소가 다 용산리 가족 묘지에 모셔져 있네. 내가 은퇴한 후 1998년과 1999년 두 해에 걸쳐 타 지역에 모셨던 조부모님을 가족묘지로 이장하고 사초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였으며 고인들의 생애를 비에 새겨 세웠다네. 내가 책임지고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여 앞으로 50년은 잘 보존될 것으로 믿네.

운봉초등학교

그렇다고 미국에 사는 아들과 손자가 멀리 한국에 가서, 그것도 서울에서 여러 시간 달려가야 하는 운봉의 조상님 산소를 성묘 다니며 계속 수호하라고 부탁할 생각은 전혀 없네. 그러나 단 한 번 나,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고향을 찾아가서 내 입으로 그들에게 이곳이 대를 이어 조상님들이 살으셨던 본거지이며 이곳이 그분들이 잠들어계신 뿌리임을 설명해주고 싶다는 말일세.

자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또 하나 있지. 금년에 개교 103년을 맞는 운봉초등학교에는 500년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구루가 서 있지. 그 자리에는 운봉현 동헌(東軒)이 있었고 학교는 옛날 객사(客舍) 자리이네. 우리 증조부님이 운봉군의 예방(禮房) 일을 보셨는데, 1907년 지방 유지들의 뜻을 모아 운봉사립만성학교(雲峰私立晩成學校)를 세우고 스스로 교장이 되어 신문물을 가르치셨네. 우리 어머니가 북천리에서 서천리 박씨 댁으로 시집을 오실 때 “교육위원 댁으로 시집을 간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지. 그 바람에 우리 아버지 형제들은 이 고장에서는 가장 먼저 고등교육을 받아 교육자로, 혹은 고급공무원으로 출세의 길을 걸으셨다네.

운봉초등학교 백주년사를 보면 초대 교장으로 갓 쓴 증조부님 사진(오른쪽)이 올라 있고 그 분이 1912년에 발행한 수업증서의 사진도 실려 있네. 이 학교 교정을 거닐면서 이 학교의 유래에 대해서도 우리 손자들이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네.

2012년 여름이면

2012년 여름이면 큰 손자, 작은 손자 모두 철이 들어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도 머리속에 각인이 될 것으로 믿네.

미국 ABC TV의 유명한 토크쇼를 진행하는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라는 흑인 여자가 있지. 그녀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입에 담을 수도 없으리만치 비참한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유명한 방송인이 되었지. 얼마 전에 사계의 권위자를 시켜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아프리카 어메리칸인 자기의 뿌리를 찾았다고 하지.[2]
마침내 수백년 전 자기의 조상이 노예로 붙잡혀 떠나온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직접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미국 공영방송인 PBS에서 들었네.

내가 만일 2012년 여름까지 살지 못하거나 거동조차 할 수 없어 이 꿈이 실현되지 못한다 해도 할아버지가 이런 꿈을 꾸고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장황하게 ‘꿈 이야기’를 썼네.

서울에 살았더라면 방학 때마다 고향 땅에 데리고 가서 성묘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었을 터인데 이렇게 멀리 이민을 와서 살고 있구먼.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팔순의 노인이 되어 고향 땅에 얽힌 사연,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옛 추억을 반추(反芻)하며 지내고 있지. 너무나도 생생한 고향의 풍광(風光)을 자손들에게 제대로 전수하지 못하고 떠날까 걱정이 되어 두서없이 긴 글을 쓰게 되었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건승하기를 기원하네.

추기(追記)

나는 2013년 8월 아들(홍균)과 딸(계연) 그리고 맏손자(석준)와 함께 한국을 다녀왔다네. 집에 돌아와 며칠 꿍꿍 앓아 누웠지.
그러나 위의 글대로 꿈을 이루었네. 여러 곳에 산재한 작은아버지 어머니의 산소도 모두 돌아보고 왔으니 여한이 없네.
서울 체류 중에는 생질인 신항균 서울교육대학교 총장이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었던 것도 자랑삼아 첨언하네.

Note

1] 박섭용, "나의 꿈", [북악회지], 경복고등학교 동창회, 2010.

2] Henry Louis Gates Jr., Finding Oprah's Roots: Finding Your Ow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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