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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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야기

2020. 8. 15.

박화옥(朴華玉) (음1908.5.25 - 1950.8.16)은 박혁거세 왕의 61세손이다. 박승재 님과 안동 김씨의 3남으로 쌍둥이 아들 중 동생이었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1908년 운봉에서 태어나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으나 6.25 사변 중 1950년 뜻을 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 하였다.

교사를 하기까지

자녀교육을 중시하는 가풍에 따라 기옥(琪玉)과 화옥(華玉) 쌍둥이 형제는 일찍이 대처(大處)로 나가 공부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수재만 들어갈 수 있었던 전주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형제가 나란히 합격하여 서로 경쟁하고 의지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전라선 철도가 놓이기 전이었으므로[1] 쌍둥이 형제의 짐이 적지 않아 방학 때면 머슴이 말에다 이불짐과 먹을거리, 책 보따리를 싣고 동행하여야 했다.

인물이 번듯한 쌍둥이 형제는 교직에 나란히 들어갔고 모두 30대 젊은 나이에 교장으로 진급하여 운봉 큰집은 인근지역에서 '쌍둥이 교장 댁'으로 불렸다고 한다.

결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는데 쌍둥이 형은 1남 6녀를 둔 반면 동생은 5남 2녀를 두어 대조적이었다.[2] 게다가 동생인 화옥 님은 전주 등 도시 지역에서 근무한 반면 형 기옥 님은 삼례 등 시골 학교에서 봉직하였다.

 

아래 1967년 친척 결혼식 사진에서 맨 뒷줄 왼쪽부터 세번째가 박경용(3남), 박상용(차남), 그리고 고인의 미망인 윤후남, 그 아래 왼쪽이 박기옥(쌍둥이 형님), 아기 안고 있는 박섭용(장조카)과 시숙인 박규홍, 박기승 님이다.

 

그 때문인지 화옥 님이 전주 근교의 용진초등학교장으로 있을 때 6.25가 발발하였는데 1차 검거 대상이었다.

원리원칙주의자이던 박화옥 교장은 해방 이후 혼란기에 좌익 사상을 가진 교사와 학생들을 엄하게 다스렸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6.25의 참극

필자(훤일)가 어렸을 때 해마다 추석이면 아버지(내옥 님)는 산을 여러 개를 넘어 용진초등학교[3]가 내려다 보이는 산까지 필자를 데리고 성묘를 다니셨다.

철이 들 때까지 자세한 말씀은 아니 하시고 슬픈 표정으로 멀리 아래 내려다 보이는 초등학교가 큰아버지(화옥 님)가 교장으로 근무하셨던 곳이라고만 하셨다.[4] 한참 후에 말씀하시기를 6.25가 터지고 공산 인민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그때까지 학교를 지키고 계셨던 큰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은 교사와 학부형이 밀고하여 붙잡히고 말았다. 그 후 큰아버지는 인민재판을 거쳐 전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후 인민군은 패퇴하기 시작했는데 그 직전에 전주 형무소에 갇혀 있던 큰아버지도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끌려나와 9월 27일 아침 집단 처형되었다.[5]

 

국군이 전주를 탈환한 후에 아버지는 큰어머니와 함께 처형 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있다는 곳마다 찾아다닌 끝에 며칠 만에 큰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돌아가신 날은 추석 다음 날인 음력 8월 16일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애정을 갖고 근무하시던 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묻어드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우리 장인은 서울 중부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다. 6.25가 터졌을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똑같이 변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하셨지만, 기지를 발휘한 게 통하였고 무엇보다도 하늘이 도우셨다.

64년 만의 진혼곡

2014년 9월 26일자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1950년 추석 '全州의 학살'··· 64년 만에 진혼곡

1950년 9·28 수복은 전주에 참극(慘劇)을 안겼다. 북한 인민군과 좌익은 그해 7월 20일 전주 점거 후 형무소에 수감했던 우익 인사 1500여명 중 500여명을 집단 학살한 뒤 패퇴했다. 참살된 인사들은 전북의 제헌 및 2대 국회의원 6명과 공무원·경찰관·판사·언론인·종교인까지 대부분 지역사회 지도자들이었다. 학살은 인민군 패주 직전인 9월 26일 밤부터 27일 사이에 이뤄졌다.

그로부터 꼭 64년이 흐른 26일 이 인사들의 억울한 희생을 기리며 그때 아픔을 돌이키는 작은 행사가 열린다. 희생자 유족 일부와 전북 각계 인사 100여명이 이곳 묘역에서 '6·25 애국 인사 희생자 추모식'을 갖는다. 이영국 한국자유총연맹 전북도지부장은 "대한민국과 해방 전북의 터를 닦은 애국 인사들에 대한 추념을 64년이나 미룬 것은 죄악"이라며 부끄러워했다.

1950년 9월 26일은 추석이었다. 참극은 그날 밤 9시쯤 시작됐다. 간수들이 한 사람씩 불러 감방동 밖에 모이게 했다. 전선에 손목이 묶여 대오를 이룬 우익 인사들은 형무소 담장 밖 화장터와 기와 공장 마당 등 3곳에서 삽과 괭이, 몽둥이 등으로 집단 타살됐다. 시신들은 미리 파둔 구덩이에 던져져 흙으로 덮이기도 했다. 숨이 붙어있던 일부 생존자는 인민군이 떠난 뒤 도망쳐 참극 현장을 증언했다.

 

국군과 미군, 경찰은 28~29일 전주를 수복했다. 시신들을 유족이 수습해 가는 가운데 미군이 현장에서 헤아린 시신은 360여구였다. 형무소에서 2~3㎞쯤 떨어진 전주경찰서 유치장과 완주군수 관사 방공호, 예수병원 부근 채석장에서도 시신 60여기가 발견됐다. 전북도와 전주시는 훼손돼 가족을 찾지 못한 시신 175구를 형무소 부근에 합동 안장했다가 1976년 효자공원 묘원으로 옮겼다.

시신을 찾은 유족들도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인민군은 패주하며 "곧 돌아온다"고 했다. 전쟁은 2년 9개월 더 이어졌다. 전북에서 산으로 숨어든 공비 토벌은 1954년 말에야 끝났다. 완주갑 제헌의원으로 희생된 류준상씨의 차남 희창(78) 씨는 "어머니와 이모가 40리를 걸어 들것에 모셔온 선친의 시신을 바깥채 툇마루에 모시고 소리내 울지도 못했다"고 했다.

가장을 잃은 유가족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유족들은 저마다 추석 전날 밤 남편과 아버지 제사를 모셔왔다. 그리고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이철승(92)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의 부친도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됐다. 해방 직후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좌익에 맞섰던 아들을 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이사장은 "지난 60여년 가파른 세월 속에 모두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만시지탄(晩時之嘆)이지만 이제라도 추모제를 열어 다행"이라며 "추모제가 건국을 기념하고 바른 국가관을 세우는 일에 작은 주춧돌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전북 각계 인사들은 추모 사업을 이어가기로 했다. 향토사학자 이인철(85) 씨는 "전문 조사를 통해 비극의 실체를 규명하고 시신을 못 거둔 채 흩어진 유족들을 찾아 그 후손이 기리게 하겠다"고 말했다. 추모식은 육군 35사단 군악대가 진혼곡과 조총(弔銃)을 울리고 무용가 변은정 씨가 살풀이를 하는 가운데 1시간여 동안 진행된다.

Note

1] 전라선 철도의 전주-남원 구간은 1931년 10월 1일 개통되었다.

2] 화옥 님의 장남(회용)과 차남(상용)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3]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상삼리 1088번지가 학교 주소이다.

4] 화옥 님의 묘소는 운봉의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쌍둥이 기옥 형님의 묘소와 마주 보는 자리에 모셨다.

5] 북한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또 다른 사례가 2018년 3월 밝혀졌다. 6.25 당시 불온분자라고 붙잡힌 서울과 개성 지역의 공무원, 경찰, 기독교인 2천여 명은 1950년 9월 인민내무군 316연대 2대대 인민군에 의해 평양 쪽으로 끌려갔다. 병 들어 걷기 어려운 사람 약 200명은 대열 뒤로 옮겨져 사살되었다. 마침내 1800여 명은 대동강을 건너갔으나 어느 작은 마을의 언덕 아래서 1950년 10월 8일 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약 1천명이 총살되었다. 그들은 2개의 큰 구덩이에 묻혔고, 나머지 1천명도 다음날 새벽 같은 방식으로 처형되어 1개의 구덩이에 묻혔다. 한국전 당시 미 후방기지사령부(Korean Communications Zone) 작성 '한국전쟁 범죄 사례 141번에 대한 법적 분석(KWC 141)'. VOA Korea, [특파원 리포트] "북, 민간인 2천명 학살" 미군 보고서 입수, 2018.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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