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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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야기

2020. 8. 15.

박내옥(朴萊玉) (음1912.05.16 - 1996.08.25)은 시조 박혁거세 왕의 61세손으로 1912(壬子)년 7월 1일 운봉에서 태어나 1996년 10월 7일 세상을 떠났다.

1932년 전주고등학교(全州高普) 졸업 후 금융조합에 입사하여 무주, 남원 등지에서 근무하였다.

1946년부터 주로 미국의 원조물자인 의약품을 취급하던 전북약품(주)에서 재직하였고, 1975년 농업용 비닐을 제조 판매하는 서울일신화학(주)의 감사 직에서 정년퇴임하였다.

평생 회계업무를 담당하였기에 기록 남기기를 좋아했으며, 은퇴 후에는 등산과 여행 등으로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내고 기독교의 믿음을 자손들에게 전하였다.

1934년 학교동창인 은성룡의 소개로 당시 무주군청의 재무과장이던 은치황(殷致黃)의 장녀 은성덕 (殷成德)과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었으며, 슬하에 仁善, 太鏞, 烜庸, 淑姬, 烜璋, 貞姬, 恩姬, 烜日, 瓊姬 등 4남 5녀를 두었다.

유택(幽宅)은 부부 묘가 나란히 경기도 용인군 모화면 용인공원묘지(특311호)에 있다.

 

* 1983년 장초에 장남, 차남과 손녀딸들의 세배를 받았다.

회고담

사람은 일생 동안 적어도 세 차례의 고비를 겪는다고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지난 80 평생을 돌이켜볼 때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생각이 든다.[1] 많은 동포들이 고생하였던 8.15 해방과 6.25 사변 중에 생사(生死)의 기로를 헤매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행운이랴!

지금 돌이켜볼 때 내가 가정을 이룩하고 나서 봉착했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애로였다. 평생 월급쟁이를 하였으니 큰 돈 만질 기회도 없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많은 식구를 먹이고 가르치기가 결코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억에 남는 가장 힘든 시기는 우리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온 뒤의 5년간이었다. 1966년 해방후 20년간 봉직했던 전라북도 약품회사가 사실상 영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지금은 전북 지역 약사회로 변신하였지만, 본래 미국의 의료 구호물자를 주로 취급하는 회사였던 만큼 더 이상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손아래 동서가 경영하는 회사(일신화학)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있었으므로 나는 경리를 총괄하는 감사 직책을 맡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 가족의 상경

동서(林五淳)는 일본 중앙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정읍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적도 있으나 일찍이 50년대부터 사업에 투신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미원 그룹의 임대홍씨와 일가가 되기도 하지만 천성이 근면·성실하여 착실하게 사업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처음에는 방산 시장에서 미원 도매상으로 출발하였는데 내가 상경할 무렵에는 비닐 등으로 취급 상품을 다양화하고 있었다. 그후 비닐류 제조업에도 착수하여 품질 개량과 기술 개발에 주력하였다. 때마침 농촌 비닐 하우스가 크게 보급되면서 농가 소비자들로부터 크게 호평을 받아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지금도 일신화학의 "학(鶴)표 비닐" 하면 물방울이 맺히지 않는 농업용 비닐로 유명하다.

 

1966년 10월 1일 여느 사람 같으면 정년 퇴직을 고려할 만한 나이에 나는 동서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새로운 생을 개척하기 위해 3녀 정희양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내는 가산을 정리하는 대로 뒤따라오기로 했다.

일단 거처는 훤용군이 직장(중소기업은행)에 다니면서 자취하는 신촌 집으로 정했다. 그 동안 전주에서 편안히 살다가 물가 비싸고 인심 각박한 서울에서 생활을 하려니 어려움이 한 둘이 아니었다. 우선 전주에서는 앞뜰에 채마밭도 있는 내 집을 지니고 살았으나 서울의 집값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비싸 전주 집을 처분하더라도 셋방 얻기에 급급할 정도였다.

1966년 11월 아내가 이삿짐은 철도화물로 부치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매만 전주에 남겨놓고 서울로 왔다. 우선 주거부터 안정되어야 했으므로 집값이 비교적 헐한 신흥 개발지인 동대문구 전농동에 15만원을 주고 방 두 칸 짜리 셋방을 얻었다. 이내 방 하나를 추가로 얻었으므로 주인은 안방 하나만 쓰고 우리에게 집을 모두 내어준(주객전도) 격이었지만, 그때 민식이네 집에서 서울에서 생존해 나갈 전의(戰意)를 불태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서울서의 내 집 마련

당시 서울에서의 내 집 마련이 초미의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3남 훤장군이 연세대학교에 다니다가 군에 입대하였고 4남이 고등학교, 5녀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학비 걱정은 없었다. 아우들의 도움으로 3녀 정희양, 4녀 은희양도 취직을 하게 되었지만 그럴 듯한 내 집을 장만하기에는 가용자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월급날이면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몇 년이 고비'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그때 아내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말하자면 차관을 얻어 공장을 짓듯이 잘 사는 아우들로부터 돈을 빌려 집부터 장만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공직에 있던 아우들은 형님의 형편을 딱하게 여긴 나머지 흔쾌히 15만원과 5만원씩 내놓았다. 좀더 여유가 많은 처제는 50만원을 빌려주고 부족액은 사채를 주선해주었다. 그리하여 125만원을 주고 덕화여상 앞의 단독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다.

1967년 여름 이삿날이 내 생일과 겹쳤으나 서울에 온지 반년만에 내 집을 마련한 것은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총각으로 생계를 떠맡다시피 한 차남 훤용군과 월남 파병을 자원했던 3남 훤장군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아들·딸들이 내어놓는 월급과 월남에서 부쳐오는 전투수당 등으로 아내가 계를 들어 사채와 아우들로부터 빌린 돈부터 갚고 처제의 돈을 순차로 갚아나갔다. 키울 때는 힘들었으나 아이들이 장성하고 보니 가세를 일으키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 3남 훤장은 1967-68년 월남 백마부대에서 복무했다.

발 뻗고 살 집이 생기자 이제는 방이 어둡고 좁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차에 수유리 변두리에 새로 지은 집이 크고 밝은 게 맘에 들어 1971년 초 섣달 그믐날 이사를 감행하였다. 은행 융자금 60만원을 끼고 200만원에 도봉구 번동에 집을 장만한 것이었다.

1978년 6월에는 다시 신창동의 큰 집으로 이사하였다. 마침 호주에서 귀국한 훤장군이 함께 살자고 하여 집을 키우게 된 것이다. 그 이듬해 10월에는 훤장군이 분양 받은 압구정동 한양 아파트로 같이 이사하였으므로 서울의 이름난 부촌(富村)으로 주민등록을 옮기게 되었다. 상경 이후 우리의 고생은 어지간히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그 동안 훤용군을 비롯한 온 가족들이 부모와 뜻을 합쳤기에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가호하심이 없었던들 우리 가족이 그렇게 짧은 시일내에 기반을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더욱이 1975년 따로 모아둔 재산도 없이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 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아버님

우리 아버님은 만년 소년이시다.[2]
비록 팔십이시라고는 해도, 머리가 하얗게 새셨을지라도 환하게 웃으실 때의 그 미소는 정말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다. 나도 노년에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어머님과 시댁 식구들을 통해 들은 아버님의 생애를 유추해볼 때 힘들고 고된 나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소년과 같은 마음으로 사셨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노년의 아름다운 웃음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버님은 한편으론 화도 잘 내신다. 마치 소년처럼 그것도 매우 급하게.
급하신 만큼 거두어들이시는 것도 빠르다. 그러니 화를 내신 만큼의 효과는 거두지 못하시는 것 같다. 화를 내시고는 너무 일찍 후회하시고, 그것을 만회하려고 꽤 애쓰시는 것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긴 아버님의 불같은 화내심 때문에 나도 영진 아빠와 인연을 맺게 되지 않았는가. 삼십이 넘도록 장가갈 생각을 않는 막내 아들에게 내신 화는 결과적으로 우리 내외를 묶어준 끈이 되었으니까.

우리 아버님은 여성을 존중하는 '페미니스트'시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인연으로 맺어진지 어언 십 년. 곁에서 지켜본 아버님은 그야말로 '어머님 숭배자'이셨다.
젊어서부터 쭉 그렇게 살아오신 것은 물론 아니셨겠지만 노년의 삶은 완전히 '아내를 위한, 아내에 의한' 것이었다. 평생 고생시킨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의 자연스러운 결론이기도 하리라.
'남자는 하늘'이라는 대발이 아버지(?) 같은 친정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로서는 그러한 아버님의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것이 '가정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아버님 나름대로의 소신으로 그렇게 지내시는 것 같다.
평생을 인내하며 살아오신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노년의 삶은 철저한 페미니스트의 그것으로 비추어진다.
이런 면에서 며느리인 나는 남 몰래 안도의 숨을 쉬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일 테니까.

우리 아버님은 우리 가족의 중심이시다.
비록 팔십을 넘으셨다고는 하나 우리 가족의 중심에서 버팀목이 되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아홉 남매가 부모님을 구심점으로 실족하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의 큰 축복이 있을까.
아버님과 어머님의 따뜻하신 사랑과 관심이 배후에 있는 한 우리는 항상 마음 든든하다.

 

* 1989년 뉴욕 주재원 시절 뉴저지 집에 오신 부모님께 미국 구경을 시켜드렸다. 

Note

1] 박내옥 팔순문집 [아버지 朴萊玉의 八十平生], 1992.

2] 넷째 자부 신소희, "아버님, 우리 아버님",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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