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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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야기

2020. 8. 15.

은성덕 (殷成德, 음1916.09.04 - 2002.07.26)은 박혁거세 왕의 61세손 박내옥 (朴萊玉) 님의 부인으로 1916년에 태어나 2002년 9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평생 박봉의 남편을 도와 자녀교육에 힘썼다. 고인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나라가 봉건사회에서 민주사회로 발전하고, 또 식민지배하에서 독립을 맞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치른 후 정치적인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제개발을 완수한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경제발전의 과실을 따먹고 자란 젊은 세대 특히 젊은 여성들은 감히 고인의 일생을 운위하기 힘들 것 같다. 어떻게 스물도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9남매를 낳아 기르며 쪼들리는 살림에 조카들까지 4-5명씩 거느릴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오늘날의 핵가족(核家族) 시대에는 이혼사유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

이러한 세대간의 격차는 비단 우리 경제와 사회가 발달한 때문인 것으로 치부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사고방식이 급격히 서구화(西歐化)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1]

고인의 생애

은성덕 님은 1916년 음력 9월 4일 은치황(殷致黃) 님의 3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나셔서 1934년 박내옥 님과 결혼하신 후 4남 5녀를 훌륭하게 키우셨으며, 1994년에는 회혼례를 올리시고 1996년에 혼자 되셨다가 사흘 전에 양력 기준으로 당신이 태어나신 9월 4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2]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천수(天壽)를 다하고 돌아가신 한 노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대사를 살고 가신 한국 여인의 인생역정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고인은 봉건주의의 잔재와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여자로 태어나신 까닭에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으실 수 없었으나, 당신의 공부에 대한 열성을 아홉 자녀에게 고루 베푸셨습니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자녀들이 한 번도 수업료를 못내 학교에서 쫓겨온 적이 없었으며 고인은 빚을 내서라도 공납금을 제 때 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자녀들을 공부하라고 다그치거나 치맛바람을 날리신 게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 슬하에서 아들 사위 포함하여 박사 교수가 세 사람씩이나 배출된 것입니다.

 

고인은 6·25 동란과 보릿고개의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도 한 가정의 주부로서 자녀는 물론 고인에게 생활을 의탁해온 일가 친척들이 끼니를 거르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3] 평생 월급쟁이를 하신 부군의 수입을 탓하지 않으시고 알뜰히 저축도 하시고 필요하면 빚을 내가면서라도 가계를 꾸려나가셨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고 거의 빈몸으로 상경하여 나중에는 서울의 부촌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성경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항아리'(열왕기상 17:16)와 같은 기적이 고인의 살림살이 속에서 거의 매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이 마련하신 재산으로 병원비를 충당하고 자손들에게 골고루 선물을 주신 것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고인은 당신의 이름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덕(德)을 베푸셨습니다.
물론 자녀들에게는 당신의 건강(健康)과 자립(自立)정신을 물려주셨거니와 일가 친척과 이웃들에게 재물과 인정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6·25 사변 당시 고인의 집은 일가친척의 피난집결소 같았지만 한 번도 불평을 하신 적이 없었고, 1950년대에는 시골 사는 조카들이 공부를 하러 찾아왔지만 본디 식구가 많은 집에서 모두 품어 안으셨습니다. 말년에도 불우이웃 돕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며, 언제나 받을 생각을 아니하시고 나누어주기부터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인처럼 부지런하고 헌신적이며 경제적으로 주모있게, 베푸는 생활을 한다면 어떠한 경제적·사회적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인이 떠나신 것을 아쉬워하는 까닭은 오늘날에는 이처럼 훌륭한 덕목과 믿음을 가진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로 떠나시는 고인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자문을 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무시듯 평온한 모습으로 소천(召天)하신 고인은 이미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으리라 확신하오며[4] 삼가 고인의 일생을 소개 말씀드렸습니다.

 

* 고인이 적어 놓은 복음 찬송 가사

In Memory of Mother

The late Eun Sung-Deok was born on September 4, 1916 (by lunar calendar) to the late Eun Chi-Whang, who had served as a magistrate of counties of Chonbuk Province, as his eldest daughter. She got married the late Park Nae-Ok in 1934, and brought up four sons and five daughters. They celebrated the 60th anniversary of marriage in 1994. In 1996, she was parted from her husband by death. After six years, she followed him to the Heaven.

We are gathering here not only to pay the last honors to a woman but also to look back our past and the roots of the Korean society represented by her life.[5]

She could be educated only up to the level of elementary school because she was a woman living under the Japanese occupation. So she had an aspiration of higher learning by encouraging her children to study further as far as they could.

 

While my father had hard times financially, the expenses for education were the first and foremost item of all living expenses. So her children had never been ousted from schools owing to unpaid tuition fees, which was usual in the 1950s and 1960s in Korea.

She had never told children to study hard, nor affected their school lives, but three of children and sons-in-law have become scholars and professors.

She was responsible for the living of her family as well as relatives during the economic hardship following the Korean War and economic depression. At that time, a number of relative students stayed at her house, but she was never claiming for expenses even though she was not paid because she understood their financial situation.

 

* 1958년 여름 은성덕 님(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은 전주에서 가까운 변산해수욕장에 부군 박내옥 님(뒷줄 맨오른쪽)의 직장 동료 가족들과 해수욕[6]을 다녀왔다.

Also she was never discontented with small income of her husband, a life-long salaried man. She saved as much as she could, and borrowed money from the rich relatives if necessary.

When she moved to Seoul to educate children, she could lease only a small room. But in the course of her life, she managed to secure improved dwelling houses for family, finally at the most prestigious residential area in Seoul.

It was like a miraculous jar of flour which was never used up (1 Kings 17:16) in her life time. Even in her last days, she paid her hospital expenses and could distribute handsome amount of money to her descendents.

As her name "establishing virtues"(성덕/成德) indicated, she gave graceful benefits to others. She gave the robust health and self-reliance spirit to her children. She provided shelter like residence and food to her relatives in the economic hardship.

In this context, we are reminded of a conventional saying.
That is, "A beautiful wife makes you happy for three weeks, a intelligent wife ensures you three-year happiness, a good wife guarantees three-decade happiness. But a wife of wisdom makes three generations happy and comfortable."[7]

I think so, and Mother was the very example of that kind of woman.

Note

1] 이 글은 고인의 4남 박훤일이 영결식장에서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고인의 경력을 낭독한 글이다.

2] 고인의 유택(幽宅)은 부부 묘가 나란히 경기도 용인군 모화면 용인공원묘지(특311호)에 있다.

 

3] 고인은 6·25 동란 직후 비상한 사업수완을 보이셨다. 당시 부군의 수입이 연 2회 지급 받는 식이어서 고인은 가을에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다락에 쌓아놓았다. 봄이 되면 쌀을 팔고 햇보리를 사서 부족한 양식을 보충하였는데 전쟁 직후라 춘궁기에는 쌀값도 크게 오르게 마련이었다. 당시 우리집 식구는 학교 다니는 조카들 포함 14명에 달하였지만 고인의 수완 덕분에 끼니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4]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고인이 즐겨 부르시던 찬송이다. 당신의 삶이 그 가사와 꼭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5] 이 글은 미국에 사는 한국말을 잘 모르는 손주들과 그 배우자들에게 집안 내력을 알려주기 위해 박훤일이 영역한 것이다.

 

6] 전북약품회사는 전후 미국의 원조의약품을 관내 약국에 배급하는 일을 하였다. 1950년대만 해도 취급 물량이 상당하여 재정이 넉넉한 편이었고 여름철이면 임직원 가족이 단체로 하계연성을 가기도 했다.

7] 그리스의 음악가 야니(Yanni)는 그의 모친이 어려운 살림에서도 피아노를 사주어 그가 건반 연주자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에게 꿈을 주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또 아낌없는 사랑과 마음에 평강을 주신 어머니를 위해 야니는 "Felitsa"를 가는 곳마다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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