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박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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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야기

2020. 8. 15.

박혁거세의 61세손 박내옥 (朴萊玉, 1912 - 1996)은 옆에서 지켜보았을 때 그야말로 '어머님 숭배자'이셨다.
젊어서부터 쭉 그렇게 살아오신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노년의 삶은 완전히 '아내를 위한, 아내에 의한' 것이었다. 평생 고생시킨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의 자연스러운 결론이기도 하리라.[1]

아내에게 쓰는 편지

요즘 나는 팔순(八旬)에 즈음하여 당신이 아니었던들 내 인생이 어찌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소.[2]
소심하고 성미 급한 나와는 달리 당신은 성질이 온유하고 말이 없으며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소. 우리 생애의 고비마다 당신과 힘을 합쳤기에 4남 5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이만큼 여유있게 지난 생애를 돌이켜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이것은 당신의 타고난 품성 뿐만 아니라 훌륭하신 부모 밑에서 가정교육을 잘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하오.
돌아가신 장인 어른(殷致黃씨)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소! 어려운 시절에 하급 공무원으로 출발하셨지만 각고면려의 노력으로 전북지방 군수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푸셨지요. 1932년 6월 내가 무주 금융조합에 입사했을 때 장인 어른은 유능한 무주군청 재무과장으로 또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이름난 분이셨었소.

당신과 인연이 맺어지려고 1933년 여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유학중이던 전주고보 동창 은성용(殷成龍)군이 내 하숙방에서 같이 뒹굴며 재미있게 지냈나 보오. 우리는 처남의 소개로 만나게 되어 그 이듬해 3월 나는 사모관대를 하고 당신은 원삼 족두리를 쓰고 결혼식을 올렸지요.

세월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나는 깨달았소. 당신이 효성 지극한 부모님 슬하에서 가사를 도맡아 하며 동생들을 돌보았기에 나를 만나 고생하면서도 모범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점 말이오.

살림 솜씨

공의(公醫) 도움을 받아 해산한 첫째 딸 외에는 8남매를 당신 혼자 힘으로 낳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되오. 음력 섣달 그믐에 둘째 딸 낳으면서 변변히 몸조리도 못하여 고질적인 신경통을 얻게 된 것 아니겠소. 9남매나 되는 대식구였지만 나의 박봉 때문에 평생동안 사람을 두고 산 적이 없었지요.

하지만 시부모님께 효성을 다하고 시댁 식구들에게도 두터운 우애로 대했음을 잘 알고 있소.
우리가 남원에 살 때에는 우리집이 여관이나 다름 없었쟎소. 운봉에 사시는 부모님이 종종 다녀가시고, 인근지역에서 국민학교 교장을 하시는 형님들이 회의 참석차 남원에 오시면 으레 우리집에서 묵고 가셨으며 남원 장날에는 큰댁 하인들도 다녀가곤 했지요. 나야 부모님, 형님들의 은혜에 보답함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당신이 자진하여 시댁 식구들을 위하였으니 어떻게 감사함을 말로 이르겠소.

 

전주에서도 비록 큰 방 2개뿐인 집이었음에도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들끓었는지 요즘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오. 우리 아이들만 해도 6명이나 되는 터에 전주에서 공부하는 조카들도 3-4명씩 우리집에서 학교를 다녔지요.
6.25 사변 때는 피난온 친인척까지 이에 가세하지 않았소! 해방 전후와 6.25 당시 식량이 얼마나 귀할 때였소. 쌀을 가져오든 말든 우리 식구들과 똑같이 해먹였지요.
당신의 용의주도한 살림살이가 아니었으면 그 많은 식량과 땔감을 어찌 내 힘으로 조달할 수 있었겠소. 지금 돌이켜보아도 참으로 아찔한 생각이 든다오.

당신은 음식 타박 잘하는 내 식성에 맞춰 음식 솜씨도 뛰어났으려니와 바느질 솜씨도 좋았고, 아궁이 고치고 방 도배하는 일까지 모두 일품이었지요.

사업가 기질

수많은 식구에 나의 박봉으로는 내집 마련이 턱없이 어려웠음에도 당신의 결단력과 기발한 아이디어 덕분에 집을 키울 수 있었소. 우리가 전주에서 집 없는 설움을 당할 때 당신이 남문시장에서 듣고 온 정보를 토대로 약품회사 사장의 도움을 받아 비록 미완성이기는 하나 염가로 완산동 집을 마련하였던 일이 생각나오.
그 후에도 집을 옮길 때마다 당신의 예지(叡智)와 결단(決斷)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배짱만으로는 집을 사서 옮긴다는 것이 매번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오.

당신이 사업을 했더라면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하는 여사업가(女事業家)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소.
자녀 교육만 해도 그렇지요. 내 월급만 가지고는 많은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하였으나 당신이 나서서 아이들의 재능을 뒷받침해주지 않았소!

 

당신은 생활비보다도 아이들 학비부터 떼어놓고 나서 살림을 꾸렸지요. 결국 아이들을 최고 학부까지 마치도록 교육시킨 덕분에 지금 제 몫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라 믿소.

당신은 여자답지 않게 도량이 넓고 분수에 맞게 살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사람이었소.
9남매를 키우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짝지워 혼인시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소. 그럼에도 당신은 혼수를 미리미리 준비해두었다가 빚을 얻지 않고도 결혼이란 대사를 치뤘으니 만 입을 가지고도 당신한테 치하를 할 수 없을 것이라 믿소.

다만, 나와 함께 살며 고생을 도맡아 한 덕분에 지금은 80 노구에 신경통과 편두통, 위장병, 담석증 없는 병 없이 병고에 시달린다 싶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 없소.
우리는 다행히 교회에도 같이 나가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찬송드리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부디 마지막날까지 우리 함께 지내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편안한 여생 보내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고 있소.

1992년 6월

萊 玉

Note

1] 넷째 자부 신소희, "우리 아버님", [아버지 朴萊玉의 八十平生], 1992.

2] 박내옥, "아내에게 쓰는 편지",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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