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 열차표 (박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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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야기

2020. 8. 15.

2등 열차표를 샀다면 목적지까지 당연히 2등칸을 타고 가야 한다.
예순이 넘어서 지난 생애를 돌이켜 보니 나는 2등 열차표를 사가지고 1등칸에서 편하게 여행을 해왔던 것같다.
나의 재능이나 실력에 비해 과분할 정도로 복을 누리고 살았다.[1] 경제학에서는 소비자의 만족도(효용)가 그가 지불한 가격에 비해 큰 것을 소비자잉여(consumer's surplus)라 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Amazing Grace)로 그 많은 잉여를 누려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은 생애는 미처 내지 못한 승차요금을 지불하듯이 나누고 봉사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크리스천으로서의 믿음이 뜨뜻미지근할 적에 실제로 2등 열차표를 들고 1등칸에서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유럽을 종단하는 만원열차에서 그것도 처자까지 데리고 차장의 검표를 무사히 통과하여 편하게 여행을 하였으니 말이다.

나중에 그러한 일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2]

전혀 예상치 못한 절박한 상황에서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주님이 즉각 내 곁에 오셔서 꼭 필요한 도움을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귀한 말씀이 어떻게 값없이 나한테 주어졌을까 생각하면 꼭 기적 같기만 하다.

 

1986년 암스테르담 유학 시절 Zandam 풍차마을에서

암스테르담 유학 시절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은 우리 가족이 해외 생활을 하면서 절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기는커녕 네덜란드에 단기여행 다녀온 사람 찾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1986년 8월 네덜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고 암스테르담 대학교로 첫 해외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홀몸이 아닌 처자까지 동반하고 가는 만큼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우리 식구가 거처할 아파트를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학교 학생과장(Registrar)이 난색을 표했으나 나는 무작정 처자를 데리고 암스테르담 가는 KLM 비행기에 올랐다.[3]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암스테르담은 당시 유례없는 주택난으로 인해 집없는 사람이 빈 집에 들어가 버티는 '스쿼팅' (squatting)이 만연해 있었다. 마침 암스테르담 북쪽 교외(Purmeland)에서 어느 가톨릭 신부님이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공부하러 떠나시는 바람에 우리가 체재하는 기간만큼 비게 된 널찍한 아파트가 신문광고에 나왔다. 그래서 학생과장이 이 신문광고를 보자마자 연락을 하여 우리가 그곳에 당도하기 바로 전날 기적(last minute Miracle) 같이 조건에 맞는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었다. 거실이 널찍했고 창밖으로는 푸른 숲과 기차길의 전원풍경이 펼쳐졌다. 대형 컬러 TV와 세탁기(신부님의 배려로 중고 드럼 세탁기를 구입)도 있었다. 큰 슈퍼마켓도 바로 이웃에 있어 전혀 불편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식구는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4] 하신다는 말씀에 의지하여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클라이맥스(絶頂)을 이룬 사건이 1986년 말 크리스마스 무렵에 일어났다. 아내가 임신 막달이 되자 집으로 조산원을 불러 해산을 하는 네덜란드 방식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귀국을 서두르는 한편 그 전에 마지막으로 베를린에 사는 처사촌 언니를 보고 가기로 하고 베를린行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들른 KLM 항공사에서는 집사람의 항공권이 일정을 바꿀 수 없는 할인 티켓이므로 새로 표를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만일 KLM 항공사에 먼저 들렀더라면 서울로 돌아가기에 앞서 돈 많이 드는 베를린 여행은 포기하였을 것이고, 처형과의 운명적인 만남이나 베르린에서의 둘째 아이 해산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3년 전인 1986년 12월 크리스마스 직후 베를린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파독 간호사 2기인 처형이 우리에게 솔깃하지만 실로 엄청난 제안을 해 오셨다. 남매를 대리고 외롭게 살고 있던 처형이 몇 년간 쓰지 않은 휴가일수가 많이 남아 있다면서 "해산구완을 해줄테니 베를린에서 애 낳고 가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못 이긴 척하고 그 집에 처자를 맡겨 놓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나로서는 만삭의 아내 홀로 귀국시키는 것도 문제였지만, 교포가 1명도 살지 않는 암스테르담 교외에서 나 혼자 해산구완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한 일도 없이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었다. 아내는 서베를린 스티그리츠 병원(Stieglitz Hospital)에서 임상병리사로 근무하던 처형 덕분에 무사히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출산 및 산후조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둘째의 가족관계등록부에는 출생지가 서백림시 스티글리츠 병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 1986년 말 베를린 장벽 위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우리 불쌍한 애자 처형 . . .
그 동안 일가친척도 없는 이국 땅에서 처형은 이혼한 남편으로부터 모진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매를 키우며 꿋꿋하게 홀로 살고 계셨다. 그러던 처형과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몇 년 후 암으로 돌아가신 그분이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한없는 위로를 받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쥬리히-암스테르담 기차여행

대학교 다닐 때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의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기 [죽음의 수용소에서](Search for Meaning: Logotherapy)를 열독한 적이 있다. 처음 읽을 때에는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난 것이 별로 실감나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이 전해주었던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5]는 메시지가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해외생활에 서툴렀던 내가 어느 추운 겨울 한밤중에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유럽 대륙종단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위기에서 구해 주셨던 것이다.

 

1986년 12월 23일 우리 가족은 눈 덮힌 스위스의 이곳저곳 여행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쥬리히 역에서 표를 구입하고 가지고 있던 스위스 프랑화는 빅토리녹스 칼 같은 선물을 사는 데 다 써버렸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스위스의 바덴바덴 역에서 발 디딜 틈 없는 로마 발 암스테르담 행 심야열차로 옮겨 탔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 . 불과 몇 시간 전 우리가 거닐었던 쥬리히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거리 풍경에 비해 비집고 앉을 틈조차 없는 만원 열차 속은 마치 천국의 발코니에서 지옥의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여행자가 그리도 많은데 심야에 침대칸 예약도 안하고 가족을 데리고 가는 내 자신의 무모함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엄마 등에 엎힌 아이는 칭얼대며 울고 2등칸은 입석마저도 자리가 없었으므로 1등칸으로 갔다.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기에 집사람과 아이를 거기 앉히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얼마 후 독일 국경을 통과하자 독일철도의 차장이 열차표를 검사하러 왔다. 호주머니에는 1등칸 차액요금을 낼 만한 돈도 없었고 틀림없이 쫒겨날 판이었다. 그러나 이 한밤중에 어느 역에 내릴 수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마음씨 좋은 차장을 만나 처자식만이라도 편히 가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처럼 애타게 간절히 기도한 적도 없었으리라.

* 밤늦은 시간 아기 업고 가는 만삭의 아내를 위해 무조건 좌석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내 차장이 우리 칸에 들어와 불을 켜고 표를 보자고 했다. 손전등까지 켜고 표를 들여다보던 그가 아무 말 없이 "당케"하며 표를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갔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차장의 눈을 멀게 하셨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열차표(오른쪽 사진)를 갖고 다니면서 어느 글자보다도 크게 인쇄돼 있는 2등칸 「2 Kl」자를 보며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혜를 되새기곤 한다.[6]

그 후에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 앞길을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7]고 후렴구절 노래 부르듯이 기도하며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

철들고 난 뒤 성경과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있었다. 중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음에도 前期 고등학교에 실패한 것은 자존심 상하고 몹시 창피한 일이었다. 한없는 좌절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서울 대광(大光)고등학교의 교감 선생님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 학교에 들어왔음을 일깨워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어 주신다"[8]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자칫 빗나가기 쉬운 사춘기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귀한 말씀과 믿음을 얻게 해주셨으니 大光에서 보낸 3년은 참으로 귀한 시절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던 대학에도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으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善을 이루어 주셨음에 틀림없었다.

Note

1] 필자는 전무후무하게 산업은행에서 해외유학을 유럽과 미국으로 두 번이나 다녀 왔다. 그리고 누구나 선망해 마지 않던 뉴욕 사무소에서 3년을 근무했다. 그 당시 조사업무를 맡아 하면서 L 뉴욕 재무관, H경제신문 K 뉴욕 특파원의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 경험을 살려 국제거래법 전문서적을 출간한 후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에서 매 학기 강의를 하였고, 마침내 법학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2000년 경희대 법과대학의 전임교수가 될 수 있었다.

2]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마태복음 7:7.

 

3] 네덜란드 정부에서는 학교 등록금 외에도 월 700길더의 (1인)생활비와 왕복 KLM 항공권을 그것도 비즈니스 클래스로 지급하였다. 부족한 생활비와 여행비는 은행 급여로 충당했다.

4] By day the LORD went ahead of them in a pillar of cloud to guide them on their way and by night in a pillar of fire to give them light, so that they could travel by day or night. 출애굽기 13:21.

 

5] This poor man called, and the LORD heard him; he saved him out of all his troubles. 시편 34:6.

6]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온누리 교회의 하용조 목사님한테서도 들었다. 6.25 발발 전 목사님 가족이 38선을 넘기 위해 밤길을 걸을 때 앞에서 북한의 내무서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지시로 식구들이 황급히 논두렁 아래로 납작 업드려 숨었는데 내무서원이 그 앞을 통과할 즈음 반대편을 향해 코를 푸는 바람에 다행히 아무도 들키지 않았다고 하셨다.

 

7]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8]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로마서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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