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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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2020. 8. 15.

고재혁 (高在爀)은 넷째집 4남 박훤일의 맏동서이며, 1928년 4월 16일(음 閏2월 2일) 전남 담양군 창평(昌平)면 삼천(三川)리에서 농부가 아니면서 농사를 짓는[1] 아버지(高光韓)의 막내로 태어났다. 2019년 9월 4일(음 8월 6일) 밤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91세.

창평은 장흥 고씨의 집성촌이다. 장흥 고씨는 흔히 창평 고씨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임진왜란의 의병대장이었던 제봉 고경명의 후손들이다.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과 함께 전사한 둘째 아들 학봉 고인후의 후손이 장흥 고씨의 학봉파를 이루고 창평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사진 설명] 1984년 법의 날에 우리나라 법치주의 창달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집안 내력

창평 고씨로 불리게 된 연유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髙敬命, 1533∼1592)의 차남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가 전사한 후 엄마까지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학봉의 아들 5명이 창평의 외가에 와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상월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월봉산 중턱에 자리잡아 차분하게 공부를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 지역의 터주대감이던 언양 김씨가 후손들을 가르쳤는데 고인후가 그 집안과 인연을 맺은 데 이어 그 아들들이 아예 창평에 눌러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창평 고씨 집안에는 두 갈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삼부자의 정신을 본받아 의병을 일으켜 무력을 써서라도 나라를 구하자는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종가 쪽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문을 배워 나라의 일꾼을 배출해야 한다는 고정주 직각의 사고방식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왕조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자 당시 규장각에서 일하던 고경명의 12대손 고정주(高鼎柱, 1863∼1933)는 직각(국립도서관장) 자리를 내던지고 고향인 창평으로 내려왔다.[2]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닫고 상월정에 학숙(學塾)을 차렸다. 첫 학생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고광준과 사위인 김성수,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였다. 그 후 영어 잘 하는 선생을 서울에서 모셔다 영어를 가르치는 영학숙을 세웠다. 영학숙은 학생 수가 늘어나자 장흥의숙으로 발전하고 지금의 창평초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당시의 교과목은 한문, 역사, 영어, 일어, 산술이었다.[3]

고시 양과 합격과 상공부 과장 시절

고재혁은 광주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5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6.25 사변으로 나라가 어수선하였으나 학업에 매진하여 임시수도이던 부산에서 고등고시에 응시하여 제4회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 양과에 합격하였다.

1954년 수복으로 서울에 올라와 수습행정관에 임명되어 상공부에 배치되었고 그 후 상공부에서 근무하면서 전정과장(電政課長), 중소기업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전정과장 시절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등 3사를 통합하기 위해 한국전력주식회사법을 기초하느라 애를 먹었다. 당시에도 고용문제가 복잡하고 어렵게 얽혀 있었으나 전기 3사의 종업원의 고용은 새 회사가 승계한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960년 4월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과도정부를 거쳐 민주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그 당시 상공부 상역국(商易局) 진흥과장으로 있었는데 비료를 일본에서 외상으로 수입하기 위하여 소위 구상무역 문제로 상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행정관을 그만두기로 작정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창평 고씨 가문의 정신이 되살아난 것이다. 5.16 군사혁명 정부의 서슬 시퍼런 위세에 굴하지 않고 부당한 점을 지적하고 사표를 던진 것이다.

변호사 활동

변호사 생활은 큰 기복 없이 비교적 편안하였다. 상공부에서의 업무경험을 살려 중소기업진흥공단 등 경제산업단체의 법률고문과 소송대리인을 맡기도 했다.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나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을 꾀하였다. 그에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맞섰던 전남 목포 출신의 김대중 씨와 그의 라이벌인 김영삼 씨가 그 중심에 있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978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정국이 요동치면서 신군부의 득세와 함께 김대중(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이 터졌고 고재혁 변호사는 본의 아니게 군사법정에서 이 사건의 국선변호인에 선임되었다.[4]

군사법정에서 변호사의 양심에 따라 열심히 변론하였으나 전두환 혁명주체세력의 뜻대로 김대중 씨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대중 씨 외에도 지식인 143인의 시국선언문을 작성한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송건호 한겨레신문 사장 등의 국선변호를 맡았다.[5] 그러나 김대중 씨는 사형, 다른 인사들도 2년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참으로 비통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6]

법률문화의 발전에 기여

세일(世一)합동법률사무소의 구성원으로서 또는 대표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과 대한공증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여 변호사 단체를 위하여 열심히 일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984년 ‘법의 날’에 우리나라 법률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일이다.

그리고 변호사 보수를 둘러싸고 의뢰인과의 사이에 다툼이 빈번히 일어나자 대한변협에 설치된 ‘변호사 보수제도 연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합리적인 기준에 따른 변호사보수규정을 제정하였다. 2008년에는 오랜 기간 공증인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공증제도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법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 나이도 들고 은퇴할 때가 되었다 싶어 2011년 12월 1일 합동사무소를 해산하고 변호사업을 접었다.

가족관계

끝으로 가정 이야기를 하자면 절친한 친구의 중매로 신용우 (申庸雨) 당시 전라북도 지사의 큰 따님인 신옥희(申玉姬)를 만나 결혼하여 해로하고 있다. 둘 사이에 웅석, 범석, 애경, 수영 등 2남 2녀를 두었고 그들이 모두 일가를 이루어 잘 살고 있다.

노년에는 틈틈이 등산과 산책으로 건강을 지켰으며 부인을 따라서 천주교 성당에 다니면서 하느님의 은혜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다.

 

Note

1] 다음에 설명하는 것처럼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책을 읽는 선비를 일컫는다.

2] 전설처럼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동학혁명과 일제 강점기, 6.25 동란을 거치면서도 집안의 반목이 없이 화평하게 지냈다. 민비시해와 을사조약에 비분강개한 녹천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하였다. 군자금이 필요한 고광순이 만석꾼이었던 고정주의 집에 사람을 보내 곳간을 털어가도 고 직각은 이를 모른 체 하였다고 한다. 후일 고광순이 지리산 연곡사의 골짜기에서 전사하고 종가집도 일제의 보복으로 불타버렸으나, 고정주의 집안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오히려 고 직각 형제들은 일제의 자본침탈에 대항하여 근대식 창평상회를 설립하고 잡화를 팔면서 서민들에게 저리로 돈도 빌려주곤 하였다.

3] 이곳에서 공부를 한 창평 고씨의 사람들은 면면이 아주 쟁쟁하다. 고광표(정치인, 사업가), 고재욱(전 동아일보 회장), 고재호(전 대법관), 고재순(의사), 고재정(전 국회부의장), 고재량(변호사), 고재혁(변호사), 고재천(전 전남대 농대학장), 고재필(전 보사부장관), 고재일(전 전남대 법대교수), 고재종(전 전남 교육감), 고정석(전 산업은행장), 고문석(전 한양대 교수), 고윤석(전 서울대 부총장), 고중석(전 헌법재판관) 등이 있고, 타성으로는 이한기(전 국무총리), 김성수(동아일보 사주, 제2대 부통령),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송진우(중앙학교 교장, 동아일보 창간), 이회창(전 국무총리)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회창의 모친 김사순도 경기여고를 나와 친정 동네인 창평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4] 김대중 내란음모사건(金大中內亂陰謀事件) 첫 공판의 재판장은 문응식 소장, 심판관은 박명철ㆍ이재흥ㆍ여운건 준장, 검찰관 정기용 중령 등 6명이었다. 김대중과 23명의 변론을 맡은 변호인은 소종팔ㆍ신호양ㆍ고재혁 등 국선 5명과, 사선 허경만ㆍ강대헌ㆍ이세중ㆍ김기옥 등 모두 10명이었다. 피고인들이 선정하는 변호사는 대부분 당국에 의해 거부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해 선정된 ‘사선 변호사’들이었다.

5] 고재혁 변호사는 송건호 피고인을 위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변론을 펼쳤다. “피고인이 지식인 선언문을 기획한 동기는 계엄해제 후 학원의 혼란과 시국의 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언론인 출신이어서 선언문을 기초했는데 선동적인 표현을 일체 삼갔던 것이다. 피고인의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언론창달에 크게 공헌한 바 있으므로 허물을 탓하기 보다는 이 같은 정상을 참작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란다." 동아일보, 1980.9.12자 기사.

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1980년 전두환 등의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 씨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내란음모를 계획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를 조작해,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5.17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로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미리 잡아가둔 김대중 씨 등이 광주사태를 선동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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