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벽루와 알함브라 궁전 (박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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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편지글

2020. 8. 15.

한벽루(寒碧樓)는 전주천이 승암산(僧岩山, 중바위) 밑에서 시내 방향으로 꺾어지는 곳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벽루는 이성계가 왜구를 무찔렀던 남고산(南故山)을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었고 그 아래는 물이 깊어 하동(河童)들의 물놀이터였다.

그러나 전주 시가지가 확장되고 전라선 철도가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옛 철로는 남원 방면 외곽도로로 건설되었다. 그 결과 한벽루 코 밑으로 큰 교량도로가 생기고 전주천 상류에는 상수도 취수장이 들어서게 되어 하천 수량이 급감하고 말았다.

바로 '도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전주천이나 주변풍광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던 필자로서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서글픈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2012년 초 스페인을 여행하던 필자는 스페인의 고도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방문하였을 때 웬지 센티멘털한 감개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내 고향 전주에 있는 한벽루를 떠올렸다.[1] 

 

* 스페인 남부의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을 여행할 때면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2] 궁전(Palace of Alhambra)을 빼놓지 않고 들르게 된다.

‘알함브라’ 하면 트레몰로 기타 주법으로 유명한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부터 연상되기에 그곳에는 뭔가 애잔함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고 꼭 찾아봐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2012년 초 어느 날 아침 일찍이 찾아간 알함브라 궁전에는 스페인 남부지방을 780년간 지배했던 무어인 지배자(Nasrid Sultan)들이 좋아했던 모든 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북 아프리카 사막에서 살던 그들이 천국의 것으로 동경했던 물이 분수대로, 연못으로, 목욕실로 사방에 넘쳐 났다. 궁전의 벽과 천장 곳곳에는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알함브라 궁전의 어느 방 앞에 “Washington Irving … 1829”라 쓴 팻말이 붙어 있었다. 바로 영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립 반 윙클”을 쓴, 미국의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워싱턴 어빙이었다.

호기심 많던 그는 1829년 세비야에서 노새를 타고 여러 날 여행한 끝에 알함브라 궁전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스페인 기독교인들(Reconquista)이 무어인들을 몰아낸 뒤 한동안 스페인 왕국의 하계별궁으로 사용되다가 오랫동안 방치된 끝에 분수도 끊어지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목격하였다.

 

워싱턴 어빙은 이 곳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알함브라에 얽힌 슬프고 아름다운 전설과 역사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겼다.

무어인들이 지상낙원으로 건축했던 석류알처럼 붉은 난공불락의 성채는 아라곤 왕과 카스틸라 여왕의 협공에도 끄떡없었다. 그러다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던 1492년 성 안에서 일하던 집시가 기독교군과 내통하는 바람에 그만 허무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로 축출 당하고 난 뒤 궁안의 모스크를 성당으로 수축하는 등 스페인 왕의 하계별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대륙 개척이 본격화되면서 정치는 마드리드로, 경제는 신대륙 무역항 세비야로 중심이 이동했다.

알함브라 궁은 어느 사이에 집시와 부랑자, 박쥐와 올빼미가 주인이 되고 말았다. 성안의 가치있는 문화재들이 마구 훼손되고 있었다.

 

워싱턴 어빙은 이러한 사실을 그의 여행기에 담았다.

그리고 런던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1831년 뉴욕에서 아라비안나이트 비슷한 “알함브라 이야기”(Tales of the Alhambra)[3] 책을 펴냈다.

그리하여 알함브라 궁전이 서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 곳을 찾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스페인 정부는 서둘러 이교도(무어인)의 궁전을 복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UNESCO 세계 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 1984 & 1994)으로 등재되어 하루 방문인원을 제한하는 스페인 제일가는 이그조틱한 문화유적3)이 된 것이다.

 

내 고향 전주에서도 이렇게 잊혀질 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문득 한벽루가 떠올랐다.

얼마 전 전주에 갔을 때 아련했던 옛날의 추억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교동 한옥 마을에서 향교를 지나 전주천으로 나갔을 때 그곳에 자리했던 한벽당이 4차선 육교(한벽교)와 둘레 길에 포위되다시피 하여 간신히 옛 누각만 남아 있음을 보았다.

본래 한벽루(寒碧樓)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이 자신의 집 근처에 지은 별장이었는데, 전주천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쳐 백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갑다 하여 ‘한벽당(寒碧堂)’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주천변 바위 위에 솟아 있던 한벽당을 찾아가는 길은 옹색하게도 한벽교 밑으로 내려가야만 했고, 누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도 山川은 온 데 간 데 없고 차들이 쌩쌩 다니는 길뿐이었다.

최근 들어 전주천이 생태하천으로 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옛날 한벽루에 올라 멀리 남고산성을 바라보거나 그 아래 전주천에서 멱을 감던 일은 도저히 머릿속에서도 재연(replay)할 길이 없었다.

 

도시계획 상으로 남원으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코스 밖에 책정할 수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비슷한 일은 80여 년 전에도 있었다. 1920년대 말 일제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철도 전라선을 설계할 때 이성계 장군이 자기네 조상(왜구)을 섬멸하고 황산대첩 전승축하연을 벌였던 오목대를 깔아뭉갤 계획을 구체화했다. 오목대로 가는 산세를 끊고 한벽당 옆에 굴을 뚫어 이곳에 충만해 있는 조선인의 정기를 흩어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어렸을 적에 기적을 울리며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가 한벽루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일제는 철도 터널 공사를 하면서 한벽루에 붙어 있던 별당을 헐어버렸다. 그 당시 연기를 뿜으며 지나가는 증기기관차를 오목대 옆 아치형 육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일제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나오는 이씨조선 건국신화를 조롱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기차는 터널을 통과하기 직전에 기적을 울리게 마련이므로 옛날 시인묵객이 그러했듯이 한벽루에서 목전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며 고요한 사색을 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주고등학교의 교가 가사에도 나오다시피 옛날에는 전주천에 맑은 물이 항시 흘러 내렸다.

한벽루 주변이 이렇게 초라해진 것은 전주 인구가 증가하면서 상류 상수원에서 취수가 늘어남에 따라 전주천의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벽루 바로 밑에 인공보를 설치하여 한벽당 위 전주천의 수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전주천은 정부가 4대강 사업에서 배제된 지방 주요하천 살리기 일환으로 실시한 ‘고향의 강’ 시범사업에 선정되어 수백 억원의 예산을 들여 정비사업을 벌이고 있다 한다.

주로 한벽루 상류지역에 여울과 소, 가동보를 설치하여 쉬리와 수달이 서식할 수 있을 정도의 1급수로 수질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벽당이란 말 그대로 맑고 시린 물이 흘러내리길 기원해본다.

위 사진의 인공보를 예고없이 낮추는 바람에 2012년 11월 1일 상오 아래 사진의 징검다리를 건너던 유치원 원아들이 물에 휩쓸려 익사할 뻔한 사고가 일어났다.

 

알함브라 궁전은 이 궁전을 세운 무하마드 1세가 천상의 낙원(celestial paradise)을 만들고자 한 염원에서 비롯되어 궁전 전체에 수도와 분수, 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궁전을 복원함에 있어서도 안정된 수량을 확보하여 옛날 무어인들의 방식으로 분수와 물의 흐름을 재현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 정원에 있는 돌사자 입에서 분수가 나오게 하는 것은 현대 기술로도 복원이 쉽지 않은 듯이 보였다.

 

전주역이 교외로 이전한 후 수십 년 전에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다니던 철로는 한옥마을 둘레길로 바뀌었다. 그래도 한벽당 앞에 남아 있는 오모가리[4] 음식점은 옛날 일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우리들의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한벽루 아래 전주천은 하동(河童)들의 유명한 물놀이터였다. 조금 더 올라가면 각시바위, 서방바위가 있었는데 그곳은 물살이 급해서 종종 익사사고가 나는 위험 수역이었다. 그 대신 한벽당 아래는 전주천이 중바위(僧岩山) 아래서 굽이를 틀기에 점프도 할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었다.

전주교대부속 초등학교 부근 방천(防川)가에 있는 집에 갈 때에도 전주천에서 모래를 채취해서 달구지에 실고 가는 조랑말을 따라 내려가면 되었다.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린 뒤에는 으레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 등장했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주천에서 빨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광목을 세탁하여 자갈 위에 널어 말리는 풍경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 전주천은 그 폭이 매우 넓다고 생각되었는데 지금은 청계천 만하게 보이는 것은 서울에서 오래 살아서일까, 아니면 그만큼 몸이 자란 탓일까 의문이 든다.

여름철이면 전주천 얕은 물에 ‘ㅅ’자 모양으로 돌을 쌓고 그 끝에 어항을 묻은 다음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물고기를 쫓아가 잡던 일을 지금은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 동안 전주시가 북쪽으로 넓게 확장되고 발전하였지만, 전주천 주변에서도 거센 도시화의 바람에 눌려 소박하였던 옛 추억이 사라지는 것은 못내 아쉽게 생각된다.

 

한편 생각해보면 세월이 흐르면서 산천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옛일은 추억과 함께 묻어두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오늘 일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

알함브라 궁전에서도 후대에 축조한 기독교식 카를로스 5세 건물(밖에서는 사각형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원형)이 부조화를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새로 만든 주변시설에 압도되어 한벽루의 모습은 옛날과 비길 바 없이 되어 버렸지만 많은 돈 들여 알함브라 궁전을 찾아가 보는 것 못지않게 한벽루를 찾아가서 옛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치 분수대 물소리를 연상케 하는 스페인의 기타 음악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아름다울지라도 우리에게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하는 정지용의 “향수”가 훨씬 더 우리의 정서에 맞듯이 말이다.

 

한벽루에서 멀지 않은 중바위 치명자산에는 멀리서도 보이는 십자가가 높이 세워진 천주교 성지가 있다.

1784년(정조 8년) 호남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여오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유항검과 그의 일가족이 안타깝게도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세계 유례가 없는 순교자 동정부부(童貞夫婦)[5]로서 기림을 받고 있다.

이들이 순교하였던 남문 밖 처형장에 유서 깊은 전동성당이 들어선 것처럼 한벽루 역시 형색은 초라해보일지라도 우리의 추억 속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맑은 물 흐르던 전주천의 한벽루도 거기서 멀지 않은 중바위 승암산(루갈다山) 순교비와 함께 우리의 가슴 속에 길이 남아 전주를 지킬 것이다.

 

* 필자의 또다른 스페인 여행기는 이곳을 클릭

Note

1] 이 글은 필자가 속한 전주북중45회/전주고48회 동창들의 회갑기념문집 [어제는 오늘에 답하고 오늘은 내일에 묻는다](2012)에 수록된 글이다.

2] 알함브라는 영어식 발음이며 현지 스페인어로는 알람브라라고 부르는데 ‘붉은 것’이라는 뜻이다. 궁전 외벽이 붉은 빛이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3] 워싱턴 어빙의 「알함브라 이야기」는 생명의 나무에서 2007년 두 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원서도 호주 아델레이드 대학 도서관이 제공하는 e북 형태로 온라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 오모가리란 민물고기와 시래기를 넣고 매운탕을 끓이는 뚝배기를 지칭하는 전라도 사투리이다.

5] 유중철(요안)ㆍ이순이(루갈다) 부부는 결혼은 하였지만 신앙심으로 동정을 지키며 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들의 독실한 삶을 그린 평화방송의 TV드라마가 2012년 6월 바티칸에서 처음으로 공식 상영되어 화제가 되었다. 평화신문, 2012.6.17자 [1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