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말 감동의 말들

둘리 2014. 9. 26. 13:23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세 가지를 본다.

가장 먼저 인간됨됨이를 본다.
진보, 보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진실하고 양심적이며 인간적인가가 이념보다 더 원초적인 이념이며, 정치보다 더 원칙적인 정치이다.
 
두 번째는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지를 본다.
학력이나 지식이 아닌 지혜...
일자무식의 사람도 지혜로운 현자가 있고, 서울대를 나와도 개차반이나 똘아이 천지다.
허공의 바람을 느껴도 깨달음이 있고~
길섶의 풀들을 만나도 이치를 느끼는 사람~
지혜는 학력과는 다른 본능적 감성과 이성이다.

세 번째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본다.
이것은 '철학(哲學)'의 두 가지 관점이다.

'가치관'은 철학의 범주 기준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입체좌표(Coordinate, Matrix)이며, 윤리학(Ethics)이기도 하다.

'세계관'은 철학의 방향이자 운동성의 기준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벡터(Vector)이며, 이데올로기(Ideology)이다.

즉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을 어떻게 깨닫고, 어디에 위치시키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아나가는 것이 '철학'이다.

배우든 못 배우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산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로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을 먼저 이루고 난 다음 진보는 진보답게, 보수는 보수답게 하라.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게 '한 몸뚱이의 두 날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그노티 세 아우톤)" 이 말은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ㅡㅡㅡ (출처 : 낮달 정정현님 스톨) ㅡㅡㅡ


■ 역설적인 지도자의 십계명

1. 세상 사람들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라.

2. 당신이 선행을 하면 생색낸다고 하여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을 행하라

3. 당신이 성공을 하면 그릇된 친구와 원수도 생길지 모른다. 그러나 성공하라.

4. 오늘 좋은 일을 해도 내일이면 허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일은 하라.

5. 정직하고 솔직하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직하고 솔직해라.

6. 대의를 품은 이가 졸장부에 의해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을 크게 하라.

7. 세상 사람들은 약자 편을 들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러나 소수의 약자를 위해 투쟁하라.

8.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탑을 계속 쌓아 올리라.

9.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도 공격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도움을 주라.

10. 당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세상에 주고도 발로 차일 수 있다. 그러나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라.
 
ㅡㅡㅡㅡㅡ (켄트 케이스) ㅡㅡㅡㅡㅡ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 명언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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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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