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펜보이 2007. 6. 22. 14:38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룹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어느 핸가 조간을 받아들고 이런저런 기사를 훑다가 ‘사평역에서’와 마주쳤다.  시를 잊고 산지 하도 오래여서 운율도 잊은 채 무심코 읽어 내려갔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시라기보다는 소설과 같은 아주 평범한 산문체의 도입부였다.  그러나 셋째 줄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에 이르는 순간 접어두었던 내 감성의 촉각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거기서부터는 더 이상 읽혀지지 않았다.  바짝 긴장하여 한 소절씩 아주 천천히 시어를 낱낱이 짚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운율에 실어 음유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감동이 온 몸을 휘감아 돌았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가 주는 감동에 흠뻑 젖어들 수 있었다.  폭포수와 같은 감성의 꽃비를 맞고 난 기분이었다고 할까.  단지 시 한 수에 그처럼 황홀한 기분에 취했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그렇다.  ‘사평역에서’는 시라는 아름다운 언어의 연금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을 증거하고 있었다.

  ‘사평역에서’는 한마디로 촘촘히 그려나간 한 폭의 서정적인 수채화 같은 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떤 정경을 묘사한 수채화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인가.  눈 내리는 시골 기차역 마지막 밤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정경이 훤하게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시골 기차역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던 나로서는 곧바로 시가 지시하는 그 상황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시골 역에 대한 추억이 있든 없든 ‘사평역에서’는 누구라도 시가 제시하는 현실적인 상황을 상상의 공간에서 조합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 실제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깊은 밤 시골 기차역 대합실에는 양철 연통을 직각으로 세워 밖으로 빼낸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톱밥난로에 지치고 언 몸을 녹이며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막차를 타야하는 공통의 목적에 순응한다.  그러면서도 서로간 말이 없다.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누구는 광주리를 옆에 끼고 팔다 남은 굴비 사과를 만지작거리는가 하면 누구는 기침을 해대고 또 누구는 담배를 피워 문 채 저마다의 상념에 젖어 있다.  저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사연 많은 인생이지만 서로를 모르기에 할말을 가슴에 눌러둔 채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잠시 세상일을 잊고 창밖에 내리는 ‘눈꽃의 화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시가 지닌 힘은 서정적인 이미지에 있다.  굳이 시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시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정경이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숨겨진 의미를 애써 찾으려 할 필요 없이 간명한 시어들만으로 능히 그 상황을 그려낼 수 있다.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삶에 시선을 둔 채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하나 하나의 사연이 이 시를 견고하게 응집시킨다.  어떤 사연이 있건 간에 막차를 탄다는 것은 삶의 마지막 줄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처럼 고난의 삶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건만 지금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다.  강퍅한 삶 가운데서도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가슴이 그만큼 따뜻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  눈 오는 겨울 밤 시골 기차역 대합실에서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시는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언 가슴을 녹여주고 싶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는 시어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다.  삶에 지친 나머지 톱밥난로의 온기에 끌려 졸고 있는 모습을 맥없이 사위는 그믐달에 비유하는 그의 감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는 언 손을 불에 녹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언 손을 불빛에 녹인다’고 표현하면 언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이 없다.  이처럼 어느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 어휘의 선택 및 배열에 의해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에서 호명(이름을 부르는)이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인상은 아주 강렬하다.  ‘이름 부른다’는 구체적인 상황묘사를 ‘호명’이라는 한자어로 바꿈으로써 감칠맛 나는 시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산다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게 되면 누구든 지난 시절을 뒤돌아보게 된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픈 심정이 즐겁고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시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손에 쥘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면서 다만 마음속으로 나직하게 불러볼 뿐이다.  그러면서 문득 가슴이 아리고 목이 메인다.

  따뜻한 난로 불빛에 몸과 마음이 녹자 문득 현실 저 너머로 사라져간 과거의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삶이 버겁다고 느낄 때 그리운 순간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사평역은 어쩌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역 이름인지 모른다.  작가 자신에 상상이 조합해낸 이상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 시를 감상하며 사평역을 현실에서 찾고 싶어할 것이다.  도대체 어떠한 역이길래 이렇듯 아름다운 시심을 불러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일상적인 호기심이 발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평역을 현실에서 구하려하지 말자.  어차피 시란 현실의 승화라는 내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단지 시가 지시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사평역의 정경을 가슴속에 담아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 하자. (신항섭)

 

<여기에 소개되는 글은 월간지 "책 읽는 사람들"에 4년에 걸쳐 연재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절반은 "나를 울린 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