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펜보이 2007. 9. 2. 11:41
 


  슬픈 식욕


  서안

 


  그녀는 조선족이라고 한다

  얼굴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로 출신성분이

  정확히 간파되고 만다


  전국을 떠다니며 산다고 한다

  잔뿌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허공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그녀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

  아랫배가 왜 부풀어오르는지

  지퍼가 벌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슬픔을 배가 부르도록

  먹어본 적도 있다 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배를 채우는

  슬픈 식욕의 힘으로

  공중부양하는 것을 믿느냐고도 물어왔다


  온몸 가득 바람을 불러들여

  부레옥잠이 되고 싶다는 여자    

  빚을 갚기 전에

  땅에 발붙일 수 없노라고

  보랏빛 눈물 흘리며

  천형天刑을 받고 있다 말하는 여자


  허공에서 지느러미를 퍼덕이며

  배가 터지도록 세상의 온기를 퍼먹고 있는

  식욕이 슬픈 풍어風魚 한 마리


  세상살이 중에서 가장 슬픈 일 중의 하나는 온전한 거처 하나 없는 것이리라. 거처가 없다는 것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살게 돼 있는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눈과 비바람을 피하여 피곤한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곳이 없는 인생은 이리저리 물결에 밀려 떠돌아다니는 부평초와 매한가지다. 떠돌아다니는 삶이 고단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데 있다. 떠돌아다니는 삶은 일체의 인간적인 관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떠돌아다니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집이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한 채 유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강제적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든지, 또는 생활환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타지를 전전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중국 및 러시아의 조선족들의 삶이 그렇다. 일본치하에서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옮겨간 조선족들이야말로 슬픈 운명의 소유자들이다. 엄연히 조국이 있는데도 남의 나라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설움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조선족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국에 왔지만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외국 국적을 가진 동포들을 외국인과 동일시하는 정책으로 인해 조국에 와서도 대접을 받기는커녕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로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서안나 시인의 “슬픈 식욕”은 조국에 와서도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한 조선족 여인의 비참한 삶을 통해 유랑의 슬픔 그 실체를 탐조한다.

  ‘그녀는 조선족이라고 한다/얼굴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그녀의 말 한 마디로 출신성분이/정확히 간파되고 만다’

  그렇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중국동포들이 있다. 그들 대다수는 이른 바 3D삼디라는 근로현장에서 힘겹게 일하고 있다. 그들에게 조국은 단지 고용주에 지나지 않는다. 열악한 근로조건을 무릅쓰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힘겨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 여성들은 대다수가 산업체의 근로현장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권에서 함께 한다. 그 중 상당수는 아예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고 그밖에는 식당이나 다방 따위의 서비스업종에서 일한다. 그리고 소수는 술집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인의 눈에 비친 여성은 아마도 주로 남성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누구든 적어도 겉으로 보아서는 조선족 여부를 판별할 수 없다. 역시 같은 얼굴을 가진 동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조선족들의 언어구사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어 일단 말을 나누게 되면 가부를 쉽사리 간파할 수 있다.

  ‘전국을 떠다니며 산다고 한다/잔뿌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허공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그녀/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아랫배가 왜 부풀어오르는지/지퍼가 벌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여자로서 ‘전국을 떠다니며 산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시사한다. ‘잔뿌리’는 큰 줄기를 지탱해 줄 수 없다. 단지 영양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처럼 허약한, 그러면서도 삶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가 되는 ‘잔뿌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허공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상태는 거의 절망적인 것이다. 누가 잡아주는 이 없으니 허공이라도 움켜쥐어 떠다니는 상황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절규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 아랫배가 부풀어오르는 일은 정상적이 아니다. 음식을 거르는 일이 많아도 아랫배가 부풀어오르는 현상은 어쩌면 원하지 않은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굶주린 나머지 헛배가 부른 것이 아니다.

  ‘슬픔을 배가 부르도록/먹어본 적도 있다 했다/쓰레기통을 뒤지며 배를 채우는/슬픈 식욕의 힘으로/공중부양하는 것을 믿느냐고도 물어왔다’

  거처가 없으면 슬프듯이 배가 고파도 슬프다. 배고픔을 슬픔으로 채우는 이 역설이야말로 조선족 여인이 처한 극한적인 상황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과 인격마저 팽개친 채 걸인으로 전락, 쓰레기통이라도 뒤져야 하는 삶에 대한 욕구는 슬프고도 처절한 것이다. 식욕은 삶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한 식욕이 강한 나머지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공중부양, 즉 저절로 몸이 솟구쳐 오르는 일조차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온몸 가득 바람을 불러들여/부레옥잠이 되고 싶다는 여자/빚을 갚기 전에/땅에 발붙일 수 없노라고/보랏빛 눈물을 흘리며/천형天刑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여자’

  그처럼 고픈 배를 채우는 데는 차라리 바람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먹지 않고도 이리저리 떠다닐 수 있는 부레옥잠이라도 되어 생을 부지하고 싶다는 것이다. 빚을 갚지 않고서는 결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정도이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착하면서도 허약한 이에게만 나타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현재의 삶이란 하늘이 내린 벌이나 다름없다는 자각 속에서 착한 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그녀가 떠돌이로서 살게 만드는 근원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착하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세상에 대한 체념적인 슬픔은 보랏빛 눈물이 된다.

  ‘허공에서 지느러미를 퍼덕이며/배가 터지도록 세상의 온기를 퍼먹고 있는/식욕이 슬픈 풍어風魚 한 마리’

  빚을 갚기 전까지는 스스로 온전히 땅에 발조차 붙이지도 못하고 사는 신세가 되어 있다. 사는 것이 결코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냉담하고 무심한 세상인데도 지느러미를 퍼덕이며 세상에 목마른 손길을 건네는 풍어는 참으로 나약하고 슬픈 존재이다. 그렇다. ‘공중부양’한 풍어는 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녕 풍어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온기, 즉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따뜻한 인정이다. 세상을 향해 보내는 이보다 더 슬픈 메시지가 또 어디 있을까.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