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련 논문

펜보이 2007. 9. 14. 09:57

 한국적인 구상회화의 계보

 

 신항섭(미술평론가)

 

 

<한국적 사실주의 - 정물화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유화가 시작된 것은 1세기를 넘지 못한다. 1910년대 후반, 일제치하라는 어두운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도쿄 유학을 통해 서양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온 소수의 화가들이 교편을 잡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서구미술교육이 도입되기에 이른다. 당시 일본 미술교육은 파리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기법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화단에서는 인상파 및 야수파 그리고 사실주의 경향의 화풍이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일본 유학파가 이끄는 한국화단은 자연히 그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더구나 조선미술전람회라는 관제 공모전에서 유화부문은 일본 유학파들의 경연장이나 다름없었고, 그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한국화단에서 초기 유화의 경향은 대략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유형의 화풍이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의 사실주의는 표면적으로는 아카데믹한 교육의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구의 아카데미즘 교육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해부학을 통해 숙달되는 인체소묘로부터 사실적인 묘사력 및 구성으로 완성되는 서구의 아카데미즘 교육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미술교육이란 단지 정확한 눈과 손의 재능에 의탁하여 숙련시키는 묘사력 중심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일본 교육 또한 해부학을 기초로 하는 소묘작업을 중시하고 있음에도 전체적인 교육과정에서 볼 때 서구의 아카데미즘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렇듯이 교육방식의 미흡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재능에 따라 서구적인 아카데미즘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한 작가들도 없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는 이쾌대이다. 정확한 묘사력 및 비례감각 그리고 서사시적인 구성의 인물화는 한국적인 아카데미즘 회화의 정점을 이룬다. 특히 ‘군상’은 타고난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구성 및 내용에서 한국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아카데미즘의 전범으로 기록될만하다. 그러나 이쾌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한국화단에서 진정한 사실주의는 확립되지 못하였다. 물론 인상주의가 순수미학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한 이래, 사실주의는 이미 진부한 표현양식이 되고 말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변질된 아카데미즘 교육방식을 채택한 한국미술교육으로서는 사실주의의 부활을 꿈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실주의미학은 과학과 손을 잡은 테크놀로지아트와 같은 현대미술이 주도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그 추종자들을 증식해가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회화가 존재하는 한 그 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것은 분명하다. 

단적으로 말해 도상봉(1902-1977)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실주의 회화는 내용이 없는 단순히 눈앞에 놓인 소재 및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는데 그쳤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전한다는, 즉 시대상황을 반영해야 한다는 사실주의 정신을 외면한 채 탐미적인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일제치하라는 억눌린 사회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자유정신 및 자주정신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진정한 아카데미즘 교육이 부재함으로써 사실주의 미학의 재현이 불가능했던 데 있다. 사실주의미학에서는 표현양식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내용이 중요하다. 실제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조형적인 원칙과 함께 시대상을 정확히 꿰뚫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화단 상황으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놓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상봉(1902-1977)은 사실주의의 형식미학만을 받아들인 경우이다. 소재 및 대상을 통해 구현되는 조형적인 아름다움, 즉 순수미학을 탐닉하였다. 정물 인물 풍경에 두루 능숙한 필치를 구사했는데 특히 독자적인 미적 감각이 반영된 정물에서 성가를 높였다.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조선백자와 꽃 그리고 소품을 배치한 정물화에서는 품격이 높은 정신세계를 구현하였다. 시각적인 부드러움으로 상징되는 특유의 묘사기법은 내면적인 깊이와 더불어 격조 높은 동양적인 정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소재가 가지고 있는 품위 및 정신적인 깊이를 추구함으로써 시각적인 즐거움을 소거한 사유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응성(1916-1979)은 전래의 전통기물 및 과일 따위를 소재로 한 정물화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인물과 정물에도 능했으나 뚜렷하면서도 명석한 형태해석을 보여주는 정물화에서는 개별적인 조형미를 실현하였다는 평가이다. 무엇보다도 소재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냉철한 객관적인 이해가 반영된 이지적인 형태해석은 감각적인 세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형태의 윤곽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독자적인 명암기법을 활용함으로써 고전적인 정서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 형태의 명확성과 고전적인 기품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해석의 사실주의를 이룩한 것이다.

박득순(1910-1991)은 정물 인물 풍경에 두루 능숙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정물에 쏟은 애정이 각별하다. 그 역시 조선백자와 민속기물 그리고 과일 따위의 소재를 선호하면서 구성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였다. 정확한 형태묘사력 위에 감도는 은은하면서도 깊이를 느끼게 하는 색조는 물론이려니와 소재들의 조화로운 관계는 화면을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간다. 그런가 하면 비단결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하게 안착하는 형태미 속에서 배어 나오는 탐미적인 아름다움은 특별하다. 이는 선명한 형태미보다 내적인 깊이를 중시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보여지는 사실 너머에 자리하는 정서적인 깊이를 지향하는 작품 경향이다.

김형근(1930)은 사실주의 회화를 보다 현대적인 이미지로 재해석함으로써 정물화 부문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그 역시 전통적인 도자기 및 민속기물을 중심으로 유리병이나 꽃 따위의 일반적인 정물의 소재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시점 기법의 소재배치라든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는 형태의 부분적인 재해석, 그리고 실제보다 맑고 선명한 색채이미지를 통해 현대적인 세련미를 추구한다. 덧붙여 정물의 배경에 신비주의적인 도교사상이 가미된 환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정물화의 표현방식을 다양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공간미학이라는 동양화의 여백개념을 적극적으로 응용, 사실주의 조형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손수광(1943-2002)은 토기 목기 마른 과일 및 박제물고기 따위의 차가운 이미지의 소재를 선호하는 가운데 치밀한 묘사력을 구사하였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은 이들 소재의 선택은 물상이 가지고 있는 표면질감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소재의 배치방식에서 일렬종대를 이룬다던가, 또는 배경을 추상화하고, 소재를 공중에 띄우는 식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면서도 치밀한 형태묘사와 공간의 활용에서는 동양적인 정서를 반영하고자 했다. 이렇듯이 사실적인 조형개념을 따르면서도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개별적인 정물화의 영역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구자승(1941)은 현대적인 미적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정물화의 현대화라는 과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또한 도자기 토기를 포함하여 전래의 생활기물과 유리병 화병 과일 꽃 따위의 보다 현대적인 소재를 즐겨 다룬다. 그러나 그의 정물화는 화면 중심에 소재를 집중시킨다던가, 일렬횡대로 늘어놓는 식의 소재에 눈 높이를 맞추는 수평구도라는 새로운 조형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특히 화면 중앙에 소재를 집중시키면서 공간을 넓게 확보하는 구도는 사유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뿐더러 극렬한 형태해석에 의한 사실성은 도회지적인 현대인의 정서를 자극한다.

김재학(1952)은 정확한 눈과 극명한 사실적인 묘사력을 겸비하고 있다. 그 또한 여러 장르 중 정물화에서 남다른 미적 감각을 발휘한다. 사진보다도 명확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묘사함으로써 소재가 무엇이든지 화면은 시각적인 긴장감으로 넘친다. 이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명암기법보다 한층 밝아진 명도 및 채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시각적인 즐거움에 응답하는, 즉 순수미에 대한 찬양이다. 그 또한 도자기 및 토기 따위의 한국적인 소재를 즐기는데, 이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기물이야말로 정물화의 소재로서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사실주의 회화는 정물화에서 뚜렷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특정 화풍이나 인맥으로 형성되는 계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소재는 물론이려니와 동양적인 정서로 상징되는 여백의 미, 즉 ‘정적이면서도 정신적인 깊이를 중시하는 회화적인 이상’이라는 선명한 목표를 공유한다.

정물화는 소재선택, 구성, 구도, 색채, 공간 따위에서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가 많다. 이들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자의성이야말로 한국적인 정서라는 공통성으로 귀결하는 요인인지 모른다. 생활관습이나 생활철학 그리고 삶의 정서가 일치할 때 만들어지는 미적 감수성의 일치가 ‘한국적인 정물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한국적인 인상주의와 향토적인 정서>


한국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는 그 출발선에 선다. 인상주의는 서양의 미술이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최초의 미술양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19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 유학생들이 서양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따라서 당시 일본화단은 인상주의 및 후기인상파 그리고 야수파 따위의 화풍이 풍미하는 시기여서 한국유학생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들의 화풍은 인상주의보다는 사실주의 및 후기인상파 또는 야수파경향에 가까운 것이었다. 밝고 쾌활한 인상주의 화풍과 달리 윤곽이 강조된 형태와 탁하게 보이는 명암, 무겁고 어두운 색조로 요약되는 당시의 작품에는 일제치하라는 시대적인 정서가 깃들이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발표되었고, 그 영향은 당시 한국미술계에 그대로 파급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유일한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는 한국서양미술의 보급창구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소수의 작가들에 의해 인상주의 화풍이 소개되기에 이른다. 이때 한국의 인상주의는 외광, 즉 태양의 빛에 노출된 야외사생이라던가, 점묘법, 색채분할 따위의 인상주의 조형적인 개념 중에서 외광파의 입장만을 받아들이는데 국한했다.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강렬한 햇빛이 만들어내는 선명한 색채이미지 및 뚜렷한 음영효과를 중시하는 화풍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순도 높은 색채이미지와는 다른 경향으로 흘렀다. 역시 일제치하라는 어두운 시대적인 분위기 탓인지 모른다.

당시 서구에서는 인상주의를 비롯하여 후기인상파 및 야수파 화풍이 이미 퇴조하고 입체파가 대두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정보교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여건에서 일본이라는 중개지역을 거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미술인구가 극소수였던 당시로서는 새로운 미술운동이 급속히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유학파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미술교사와 스스로의 재능에 자극된 일부 화가지망생들이 선전을 통해 서양미술을 눈에 익히면서 새로운 화풍을 습득해 가는 정도였다. 그리고 유학에서 돌아온 일부 작가들은 개인연구소를 통해 화가지망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전을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이인성(1912-1950)은 인상주의, 즉 외광파의 미학개념이 보편화되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1929년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에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주목의 대상이 되더니 1932년부터 34년까지 연속 특선, 그리고 35년에는 최고상을 수상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1935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마친 다음해 최고상을 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재학시절 에는 전일본수채화회전과 제국미술원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다. 이렇듯이 그는 일찍이 천재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단숨에 화단의 중심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런 대외적인 활동과 더불어 그는 한국 최초로 본격적인 외광파의 조형개념을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강렬한 빛을 매개로 하여 물상의 형태를 선명히 떠올리면서 색채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그의 화법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초기에는 불투명 수채화에서 뛰어난 표현력을 보여주었으며 후기에는 유채화의 비중을 높였다. 또한 부분적으로 평면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는 등 후기인상파의 영역으로 성큼 들어서는 진취적인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도회지적인 감각의 세련된 형태미와 향토적이며 서정적인 정취를 통해 한국적인 외광파로서의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인성보다 먼저 태어난 오지호(1905-1982)는 1931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이래 붓을 놓을 때까지 오직 한국의 자연을 대상으로 한 외광파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오지호야말로 진정 한국적인 인상주의의 실천자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왜냐하면 숩한 기후 탓에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일본적인 정서의 그늘에서 벗어나, 건조하고 일조량이 풍부한 한국의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하여 인상주의 이념을 실현한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태양이 쏟아내는 자연광이야말로 모든 색채의 발원이자 생명력의 근간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빛의 광휘를 찬미했고, 모든 아름다움은 빛으로 충만한 생동감에 있음을 확신했다. 자연의 색채는 빛에 의해 그 생명의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광선이 만들어내는 그 싱싱한 색깔과 생명체의 아름다움에 솔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언제나 관념적인 시각을 벗어나 약동하는 풍부한 자연의 색채를 지향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과 현장성을 중시함으로써 활기가 넘치는 형태미가 가능하였다. 오직 외광파의 미학에 대한 신념으로 한반도의 풍광에 접목시켜 한국적인 인상주의를 완성한 그의 공로는 각별하다.

장리석(1916-)은 일본 다마천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195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그늘의 노인’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일약 세인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이후 힘찬 터치와 간결한 구도의 인물 및 풍경화를 지속하다가 향토적인 제재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하여 낮게 엎드린 초가집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어촌 및 농촌마을의 정경을 간명한 형태미로 재해석하는 새로운 화풍을 수립한다. 특히 시골사람들과 해녀들을 단구로 표현, 향토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이미지가 함께 하는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현한다. 빛이 넘치는 풍부한 색채를 통해 자연과 함께 하는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 변형된 인상주의의 한 전형을 확립했다는 점은 특기할 일이다.

임직순(1919-199?)은 일본미술학교를 마치고 주로 대한민국미술대전을 중심으로 화단활동을 시작한 이래, 특선 다섯 차례와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실제보다 강조된 색채와 힘이 넘치는 간결한 형태해석을 통해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모색하였다. 특히 색채대비에 남다른 감각을 발휘 화려하면서도 명료한 색채이미지 및 형태미를 구축하는데 주력했다. 실내작업에서도 명쾌한 색채 및 명암대비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이미지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현했는데, 이는 인상파와 야수파 그리고 표현주의를 혼합한 듯한 인상이다. 후기에는 형태와 색채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풍경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대원(1921-)은 1945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그림을 시작한 이래 점차 인상주의의 점묘법을 도입, 서정성이 넘치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밝고 맑은 순색을 중심으로 색채분할 기법을 응용하여 환희로 넘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였다. 그의 점묘법에 활용되는 점은 선에 가깝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가 이룩한 조형적인 성과는 일조량이 풍부한 한국의 자연풍광을 원색적인 이미지로 풀어내는 가운데서도 전체적으로는 간결한 구성의 시적인 정취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쌍중(1944-)은 대학을 졸업한 후 파리에서 반년 정도 머물며 서구적인 감각을 익힌 뒤 귀국, 수려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선명한 색채와 명료한 명암, 힘이 넘치는 활달한 터치, 그리고 명확한 형태감각을 통해 시각적인 인상이 강렬한 화풍을 수립하였다. 특히 견실한 소묘에 기반을 둔 인물묘사를 중시하는 그의 풍경화는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했다. 동적인 존재로서의 인물이 함께 하는 풍경화는 어떤 상황을 묘사하더라도 시각적인 긴장감과 더불어 생동감으로 넘쳤다. 빛과 색채관계로 보아서는 후기인상파에 근접한다고 할 수 있다.

김일해(1954-)는 미적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서정성이 짙은 풍경화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세부묘사를 지양하는 가운데 전체적인 구도의 간결하게 처리하여 시적인 운치를 불러들이는데 남다른 감각을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되는 작업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중간색조의 미묘한 뉘앙스는 특유의 정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선명한 색채와 강렬한 명암대비와 더불어 감각적이고 세련된 터치를 구사, 생기발랄한 화면구조를 실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색채혼합에 능숙한 그는 컬러리스트로서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인상주의 화풍은 한국에서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인을 정점에 두고 줄기를 뻗어나가는 식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다. 인상주의 미학을 수용하되 한국적인 자연풍광에 응답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개별적인 해석을 주저치 않았다. 그러기에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분명 일본의 인상주의와는 차별화된 세계관을 보여준다. 초기 화단을 이끈 화가들 대다수가 일본에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정서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관념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태양이 작렬하는 자연과 함께 하면서 스스로 보고 느낀 사실에 솔직하게 반응한 결과이다. 한국의 자연은 일조량이 많고 건조하여 햇살이 유난히 강렬하다. 따라서 이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상황에서 색채가 밝고 화려하며 강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인상주의 미학을 수용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명확한 형태, 뚜렷한 명암, 강렬한 색채이미지이다. 하지만 이들 작업을 일별하고 보면 저마다 다른 미적 감각으로 개별적인 형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인 모더니즘과 사실주의>


어느 때나 한 세기를 마감하고 다음 세기를 기다리는 세기말에는 새로운 세기에 대한 막연한 기대 및 불안감이 교체하게 된다. 이런 시기에는 일부 전진적인 사고 및 행동을 전개하는 용감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게 된다. 어쩌면 인상주의가 엄격한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를 부정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세기말의 한 현상일 수도 있겠다. 그 세기말의 현상이 결국은 다음 세기를 선도하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예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인상주의 출현은 단순히 새로운 미술양식의 하나로 자리잡는데 그치지 않고, 20세기의 다채로운 모더니즘 미술양식을 선도했다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상주의를 기점으로 발아한 모더니즘은 후기인상파 상징주의 나비파 종합주의 앙티미즘 표현주의 큐비즘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미술양식의 출현을 부추겼다. 모더니즘 미술은 한마디로 재현성 또는 사실성, 즉 사실적인 형태묘사에 반대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형개념 및 그 기법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적인 형태묘사에 대한 강박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개별적인 조형세계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찾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인상주의 이후 출현한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미술양식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창의성의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모더니즘은 이렇듯이 기존의 질서에 대응하여 부단히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자기혁신의 정신이자 그 행동양식이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집단적인 미술양식의 성립은 물론 개별적인 형식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최초의 미술운동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독립적인 작풍의 작가들을 배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오늘 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현대미술사의 뛰어난 작품들은 모두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만큼 개성이 강한 작가들을 배출하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 모더니즘이 시작된 것은 서양미술을 도입하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 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세대들이 접하게 된 서양미술이라는 것이 대체로 인상주의와 야수파였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나 야수파의 화풍이 일본화단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어서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이 그 영향권 아래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20년대 말 구본웅의 작품에서는 이미 야수파에 감화된 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이후 많은 일본유학세대 작가들 중 상당수가 탈사실주의라는 방식으로 모더니즘의 경향권에 들어간다. 그리고 적지 않은 작가들이 점차 개별적인 조형세계로 방향을 잡는다.

여기에서는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서 한국적인 정서에 밀착하는 한편 서정적인 이미지로 기운 일련의 작가들에만 국한한다. 모더니즘의 조형적인 특징 가운데 거친 터치, 대담한 원색, 포름, 평면성, 단순성, 형태왜곡, 주관성 따위를 강조함으로써 구체적인 형태묘사와는 다른 조형세계를 실현하고 있는 작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소재는 물론이려니와 조형적인 해석 그리고 정서적인 면에서 한국적인 특징이 드러나고 있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인 소재 및 정서가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의 삶 속에만 존재하는 생활기물이나 행동양식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속성이 공통성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토속신앙 및 무속 또는 선비정신 따위와도 연관지을 수 있는 한국인의 정서적인 특징이 감지된다. 이와 함께 문학적인 정서로서의 서정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일이다.

이러한 일련의 모더니즘적인 서정미는 일부 작가군에서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미를 선도한 작가는 최영림이다. 물론 이전의 작가들 중에도 부분적으로 여기에 근접한 작업을 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영림(1916-1985)의 경우는 토속적인 정서를 매개로 한 조형적인 특징이 후반기 작품세계를 일관성 있게 지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일이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출신인 그는 선전과 국전을 무대로 활동한 초기에는 사실주의 경향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50년대에는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거칠고 어둡고 무거운 추상표현주의 작업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60년대 이후 민담이나 설화 무속 선 그리고 에로티시즘과 연계되는 제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전개한다. 그는 이 때부터 추상적인 이미지와 왜곡된 인물상을 중심으로 하는 토속적인 정취가 짙은 작업으로 일관한다. 특히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중시함으로써 문학적인 제재에 비중을 두었다. 그의 작품에서 설화 민담  무속 에로티시즘 따위의 제재는 문학적인 정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 제재는 단순히 꿈과 낭만과 사랑을 포괄하는 서정성으로 물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예술의 내적 가치는 종국적으로 문학성에 귀결한다는 점에서도 그의 작품세계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백영수(1922-)는 일본 대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공모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단체전과 개인전을 통해 활동해왔다. 그러나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장욱진 이규상 등과 함께 신사실파라는 추상 그룹을 결성, 진취적인 작가로서의 일면을 보였다. 그는 일찍이 가족을 제재로 하여 윤곽선에 한정하는 지극한 간명한 기법을 구사, 독자적인 형식을 완성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파리에서 생활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델란스 등지의 화랑 초대전을 통해 유럽화단에 입지를 구축했다. 그는 가정과 그 주변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를 소박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는데, 시적인 이미지와 여백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그림으로서의 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금욕적이라고 할만큼 간결한 구성은 수도자와 같은 품위가 깃들인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권옥연(1923-)은 동경제국미술학교를 나와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대전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1957년 프랑스로 유학 4년간 체재하면서 모더니즘에 개안하였다. 무엇보다도 서구적이면서 도회지적인 세련미를 느끼게 하는 특유의 미적 감각으로 인물상에서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다. 또한 전래의 생활기물 및 그 문양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형태의 단순화, 평면성의 도입, 자의적인 색채 따위의 모더니즘 미학으로 일신한다. 그는 전통문화 속에 깃들인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비구상적인 이미지로 구현하는 독특한 조형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여백개념에 합당한 공간 설정으로 환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화면구성과 회색조로 상징되는 색채이미지는 흉내낼 수 없는 개별적인 형식으로 평가된다. 더불어 회고적인 분위기와 시적인 정취에 빠져드는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향기가 짙다.

문학진(1924-)은 서울대학교 회화과 출신으로 국내파인 셈이다. 1950년대에는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추상작업에 심취했으나 70년대 이후 정물과 인물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해석의 반추상화 형식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마치 오랜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유물이 서서히 드러나는 형국의 고분 발굴현장과 같은 이미지의 소재 배치 및 구성으로 새로운 형식미를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는 소재의 분산 배치 및 색채 포름 그리고 마티엘 효과 등을 살리고 있는데, 그 전체적인 이미지는 서정성이 농후하다. 또한 최근에는 꼴라주 형식의 종이작업을 통해 보다 세련되고 감각적이면서도 지적인 이미지의 구성적인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가위로 절단된 다양한 색채의 종이를 구성하여 인물이나 정물의 형태에 도달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김 한(1931-)은 함경도 명천에서 태어나 전쟁 중에 홀연히 월남한 이산가족의 일원이다. 이렇듯 슬픈 개인사 때문인지 그의 그림 전반에서는 짙은 향수가 배어 나온다. 고향의 푸른 바닷물 색깔이 그림의 기조색이 되었고 소재 및 제재는 모두 고향의 추억과 결부되어 있다. 그처럼 줄기차게 고향에 천착하는 작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싶으리 만치 고향의 얘기들 일색이다. 초기에는 구체적인 형태를 통해 고향을 노래하다가 후기로 오면서 형태를 해체하여 평면적으로 해석, 재구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현실적인 공간을 무시한 자유로운 공간설정과 비구상적인 이미지로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언제나 고향얘기가 그 중심을 이룬다. 문학적인 이해를 통해 조합해 가는 고향정경은 제삼자에게는 낭만적인 정조가 되지만 그 자신에게는 애조가 된다.

장순업(1947-)은 모더니즘의 영향 속에서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제재와의 접맥을 통해 화면의 구조를 물질로 변환하는 방식을 모색해 왔다. 따라서 그의 화면은 대체로 여백을 거의 두지 않은 채 형태(소재)와 추상적인 이미지가 뒤엉키는 독특한 구조를 지향한다. 단순히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기법 자체를 물질적으로 환원함으로써 묘사적인 이미지와는 완연히 다른 풍부한 감성적인 세계를 드러내 놓는다. 더불어 석물 토기 목기 목안 따위의 민속기물을 등장시켜 설화적인 문어체의 어법으로 완결 짓는다. 때로는 형태를 분간키 어려울 만큼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서정적인 향기를 잃지 않는 그의 균형감각은 압축된 모더니즘의 한 징후로 이해할 수 있다.

전준엽(1953-)은 벽화를 연상시키는 화면 구조 및 질감을 중시함으로써 세월의 흔적을 표현적인 가치로 제시한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동일선상에 놓고 그 정신사적인 맥을 짚어내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통적인 가치의 하나인 선비정신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재해석하려는 것이다. 고대벽화나 민화 또는 문인화적인 형식미를 도입하는 것도 선비정신의 구체화 및 한국성의 구현이라는 조형어법과 연관성이 있다. 지극히 간결한 구성 및 구도를 통해 만나는 열린 공간, 즉 여백은 때로는 신비주의적인 냄새가 짙다. 더불어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타파하는 환상적인 경개는 시적인 긴장과 낭만적인 감정을 유발하며 정적인 세계로 유인한다.

이렇듯이 한국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은 한국인의 정신세계 및 정서와 만나 형식의 자유로움과 더불어 서정적인 꽃을 피운다. 동양적인 자연주의 및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토속신앙이나 무속 유교정신(선비정신)에 근거하는 문화적인 배경은 전통적인 생활양식 및 기물 그리고 행동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적인 정서적인 특징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에 모더니즘 미학이 결합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형식미를 산출해내는 한편 문학적인 이해를 통한 서정성이 곁들여지면서 꿈과 사랑과 낭만과 환상이 어우러진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이는 순전히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몇 사람들의 개별적인 성과이면서도 그 가운데 특정의 경향으로 결집할 수 있는 공통성을 내포함으로써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 및 인상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계보의 미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조형적인 건강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월간 "아트프라이스" 2004년 6-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