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련 논문

펜보이 2007. 9. 17. 07:44
 

 문인화의 현대적 해석과 발전 방향


  신항섭(미술평론가)

 

 

  하나, 한국문인화의 현주소

 

  서구미술이 도입된 이후 전통미술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오늘의 미술현장에서 전통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낮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  그 만큼 전통 미술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문화의 흐름이 서구 중심으로 가고 있는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계적인 문화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서구이다.  발전된 과학문명, 특히 전자문명으로 상징되는 서구문명은 인간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명분 아래 오직 새로운 가치만을 추구하였다.  새로운 가치란 합리적인 이성주의에 바탕을 둔 과학문명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는 과학문명을 통해 얻은 막강한 경제력이 뒷받침되고 있다.  거꾸로 보자면 서구의 현대과학문명은 경제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경제력은 새로운 과학문명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과학문명은 또 다른 경제력을 창출한다.  한마디로 경제와 과학의 합작품이 다름 아닌 서구문명이고 서구문화인 셈이다.

  서구문화가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은 이후 전통 문화는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점차 소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전통 미술의 하나인 수묵화만 하더라도 그렇다.  각 미술대학에서 한국화과가 폐지되거나 회화과라는 새로운 명칭의 학과가 신설되면서 한국화는 대학과정에서조차 사라지는 운명에 처해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각 장르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재료와 형식을 공유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유화, 한국화 따위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만을 놓고 본다면 그럴싸하게 들린다.  이런 주장은 한마디로 표현영역을 무한히 확대함으로써 다양하게 존재하는 각기 다른 민족의 전통 미술조차 서구미학으로 통합하려는 전략적인 발상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통 미술이 위협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상황을 보면 이와 같은 시각이 반드시 피해의식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서구미학의 맹신자들은 서구문화가 추구하는 새로움에만 현혹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가치는 하잘 것 없는 것으로 간단히 치부한다.  오늘 수묵화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미술대학에서 한국화과가 폐지되는 상황은 서구미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미술인들과 사회적인 분위기가 연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한국화의 내부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그 또한 문제가 없지 않다는 사실과 직면한다.  한국화의 현대화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서구미학 일변도의 분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어차피 서구문명을 좇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무조건 전통적인 가치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도 반드시 현명한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문화는 마치 생물과 같은 것이어서 내부적인 환경변화 및 외부적인  조건의 변화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또한 문화란 그 속성상 시대의 흐름 그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화 분야에서 서구문화가 중심세력에 놓여 있는 현실을 너무 안이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시각에서 볼 때 한국화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는 문인화도 예외일 수 없다.  어쩌면 문인화야말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쩐 일인지 한국화단에서 문인화는 사군자 정도의 화목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한 경향이어서 그렇다는 뜻이다.  더구나 사군자의 화법 자체가 변모한다거나 전혀 개선되는 기미가 없이 전래의 기법만을 답습하고 있다.  조형적인 실험이 미미한 것이다.  더러는 서구의 현대미학을 접목시키는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도 있으나 그 성과는 크지 않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면에서 문인화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저하도 한 원인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미술애호가들로부터 외면 당하니 새로운 실험이나 도전이 미약할 수밖에 없는 지 모른다.

  한국화단에서 볼 수 있는 문인화 관련 전시회의 대다수가 사군자를 그 중심에 넣고 있다.  화훼 절지 영모 인물 따위의 제재를 보는 일이 흔치 않다.  물론 산수도 당연히 문인화의 화목에 들어가지만 현실적으로 한국화단에서 산수화는 별도의 장르로 독립한 형편이다.  그러기에 딱히 문인화의 화목이라고만 할 수 없다고 치더라도 문인화 속에 산수화를 넣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처럼 사군자 이외에 다양한 화목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문인화이건만 한국화단에서는 사군자=문인화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한국화가 퇴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유독 문인화 인구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모른다.  각종 문인화 공모전에 출품작이 쇄도하고 있을뿐더러 최근 한국미술협회에서 문인화 분과가 신설되는 현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어쩐 일인지 문인화 인구가 급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문인화 공모전이라든가 다양한 형태의 문인화 전시회를 보면 사군자 정도의 제재가 대세를 이룬다.  아니, 8-9할 정도가 사군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대체로 문인화 공부를 시작하면서 사군자를 통해 기본적인 화법을 익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기본적인 화법만 익혔다고 치면 곧바로 공모전이나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고자 하는 풍조가 화단을 휩쓸고 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정작 실력 있는 작가들은 되레 사군자를 회피하는 실정이다.  사군자로 전시회를 열면 아마추어 정도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군자라는 화목이 반드시 기본적인 화법을 익히는 데만 이용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문인화 인구의 태반이 사군자를 익히는 정도만으로도 작가로 행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문인화 인구가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면서도 시대적인 감각을 선도하거나 최소한 뒤따르는 분위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문인화가 구시대의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변화 및 자기혁신을 모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의 습속에만 안주하는 안일한 태도로 인해 과학문명 시대가 요구하는 현대적인 조형성과는 점차 멀어지면서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생물과 같은 것이어서 유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문인화는 무기질처럼 고형화되어 있다.  자기진화는 물론이요,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수용하지 못한 채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수묵을 사용하는 전통 미술이라고 해서 반드시 전통적인 기법 및 형식만을 고수하는 것은 창작의 원칙에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변화하게 마련인 문화의 흐름조차 역행하는 일이다. 

  서구미학 자체가 반드시 최선의 선택이 아닐지언정 오늘 우리 미술계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현실상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통적인 가치로서의 고유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  오늘의 미술이 서구 현대미학을 수용하는 상황임을 전제로 할 때 문인화 또한 서구적인 현대미학을 부분적으로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추상언어가 대세를 이루어온 20세기의 미학을 문인화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구의 현대적인 미적 감각에 익숙해져 가는 미술애호가들의 눈을 따라갈 수 없다. 

 

  둘, 문인화의 현대적인 해석

 

  예술의 윤리성은 창작에 있다.  창작이란 다름 아닌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예술적인 가치 하나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새롭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새로움이 창작의 조건의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그 새로움이란 예술적인 가치를 내포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적인 가치는 어쩌면 ‘고상한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는지 모른다.  ‘고상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뜻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서구미학의 개념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게 되면서 ‘고상한 아름다움’이 예술의 전부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상한 아름다움’이라는 전통적인 미적 가치의 기준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미술에서는 여전히 ‘고상한 아름다움’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문인화만 해도 그렇다.  문인화는 동양 고유의 회화양식으로 그 전래의 가치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문인화는 과거 문인 사대부들, 즉 지식인들의 여묵, 또는 묵희로 그 명맥을 이어 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문인화는 본격적인 화가들의 그림이었다기보다는 아마추어들의 그림으로 인식돼 왔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적인 가치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술적인 면을 억제하는 가운데 예술적인 가치로서의 정신성이 강조되는 형편이었다.  그렇다.  여기에 바로 문인화가 시대의 변화를 외면한 채 과거의 미학에만 안주해온 원인이 있다.  정신적인 가치만을 중시한 나머지 형식을 가볍게 여긴 탓이다.  새로운 조형적인 모색을 통한 다양한 형식의 창출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부단한 자기부정의 논리를 통해 변화해온 서양회화에 비해 형식면에서 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란 어떤 경우에도 조형적인 면이 우선된다.  다시 말해 아무리 이론이 출중하더라도 조형적인 해석을 통해 구체화하지 않으면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에서 내용보다는 형식이 앞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은 어디까지나 시각예술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식의 새로움은 회화의 시작이자 궁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른 미술양식은 시대적인 감각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고 있으나 유독 문인화 만큼은 과거의 습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만큼 보수적이다.  아마도 문인화가 시대의 변화에 피동적인 것은 동양적인 회화양식이라는 지역적인 한계 그리고 한정된 인구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에 외부적인 도전이 미약한 데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변화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요구 및 도전이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보편적인 회화양식이 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하지 않아도 고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이 전래의 기법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무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문인화가 그 존재성을 지속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보편적인 회화양식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시대변화에 따른 조형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전통적인 소재는 물론이려니와 기법 그리고 형식을 깨뜨리는 과감한 자기혁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혁신이란 미의식의 변화를 뜻한다.  문인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함으로써 이제까지의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보다 넓은 조형세계로 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시대감각에 부응하는 새로운 회화양식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 및 실험적인 작업을 통해 보편적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추상성을 도입하는 것도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추상회화가 서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전통적인 동양회화가 이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차피 재료가 다르기에 동일한 형태의 조형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기법 및 형식만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울러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생략, 또는 변형 왜곡하는 따위의 서구의 현대적인 조형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문인화의 형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서구의 추상미학 개념 및 그 방법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인화가 서구미술양식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표현영역의 확장을 통해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한편 세상과의 폭넓은 만남을 획책하기 위한 방법일 따름이다.

  최근 중국의 문인화에서는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역시 개방 이후 시대감각에 부응해야 한다는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40-50대 작가가 중심이 되고 있는 중국의 현대적인 문인화는 추상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전혀 새로운 관점의 조형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형태를 거의 파괴하거나 극한적으로 생략하는 한편, 여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문인화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는 이미 난초 잎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단출한 선 몇 개만으로 난초를 표현한다.  묵의 표현에서도 농묵이 아닌 담묵으로만 시종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문인화로서의 격조를 잃지 않고 있다.  어딘가 허전해서 무엇인가를 채워 넣어야 할 듯 싶지만 비어 있다는 것이 되레 시각적인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과거의 기법만을 답습하는 형태의 전통적인 문인화 양식에서 맛볼 수 없는 시각적인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현대라는 시제개념에 합당한, 열린 시각의 소산이다. 

  뿐만 아니라 여백에 대한 이해방식 또한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팔대산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범한 여백개념을 현대적인 공간 구성에 적용하는 따위의 새로운 조형적인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문인화가 더 이상 중국회화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시대적인 요구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문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조차 이처럼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사군자 따위의 전통적인 화목에다 전래의 기법만을 되풀이하는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  소수이긴 하지만 현대적인 문인화를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도 그 존재가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보수적인 화단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부 기득권을 지닌 작가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변화 자체를 자기부정으로 생각하기에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문명은 곧 과학문명이다.  따라서 예술표현에서도 과학문명에 대한 이해와 그 응용이 필요하다.  예술이란 인간 삶이 승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우리의 현재의 삶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한 가운데서 우리 시대 우리 삶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학문명이 가져온 현재의 삶의 양태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내용은 물론이요, 조형적인 면에서도 현재가 반영되어야 한다.  기계문명 전자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 및 이해를 통한 조형적인 모색이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계문명이 가져온 생활양식의 변화 또한 조형적인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이미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버린 전통적인 조형개념에만 머물어서는 안 된다.  생생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바로 그 시대와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다.

                                                                

 . 문인화의 정신과 현대적인 조형성

 

  문인화는 그 명칭이 시사하듯이 직업적인 화가보다는 문인, 즉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선비 및 사대부들이 여묵의 형태로 그린 그림을 총칭한다.  전문적인 화가들이 아닌, 문인들의 그림이다보니 형식에서는 자연히 아마추어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다시 말해 전문적인 그림의 기초기술을 익히지 않음으로써 기교적인 수준은 직업적인 화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면이 부족한 반면에 격조 또는 내용에서는 오히려 직업화가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 문인화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익힌 다양한 지식 및 교양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그림의 격조, 즉 화격을 높이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인화는 대체로 그림의 형식미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경향이다.  내용이란 그림의 내적인 세계를 말하는데, 작가가 그림이라는 조형언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는 개인적인 감정 및 정신적인 세계가 이에 해당한다.  여묵의 일환으로 그려진 그림이 문인화의 단초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에 대한 개인적인 심회를 비롯하여 자신의 처지 및 그 심경 또는 유미주의로 기울기도 했다.  그림이라는 조형적인 형식을 통해 자신의 정신세계 및 속내를 표출하거나 아름다움 자체를 탐닉하고 찬미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문인화라는 형식은 정신 및 감정세계를 포함하여 인간 삶 자체를 탐구하는 철학과 사상 그리고 대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팔대산인(주답)은 직업적인 화가가 아니면서도 높은 화격에 도달한 문인화가로서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명나라 황실 후예인 그는 나라를 잃고 수도승이 되어 세상에 초연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은 화조화를 비롯하여 산수화로 경계를 넓히면서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망국의 슬픔과 울분이라는 개인적인 심회를 그림 속에 담아내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인 어법, 즉 여백활용이라든가 자유롭고 활달하며 호방한 필치 또는 제재를 통해 세상에 대한 견해를 표출하는 형태였다.  달리 말하면 바뀐 세상에 대한 통한의 상념과 함께 개인적인 사상 및 철학을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서 그림에 반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림으로서의 조형적인 격식인 형식미를 관철하는 가운데서도 내용적인 깊이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문인화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형식미에 앞서 정신적인 가치를 높이는 것이 제일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인화가 내용에만 치우친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형적인 요소를 의식하는 가운데 내용을 통해 예술적인 이상에 도달하고자 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격조를 결정하는 정신적인 깊이를 통해 기술적인 부족함을 메우고자 했던 것이다.  격조란 일테면 고상함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상한 아름다움은 기교적인 완성미와는 또 다른 것이다.  물론 기교가 극에 달하면 거기에도 필연적으로 고상함이 들어선다.  하지만 기교적인 완성에서 만들어지는 고상함과 정신적인 깊이에서 만들어지는 고상함에는 차이가 있다.  기교적인 완성에서 오는 고상함은 신체적인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라면 정신적인 깊이에서 오는 고상함은 그 신체를 감싸고 있는 품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문인화는 정신성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현대적인 문인화에서도 여전히 정신성이 문제가 되는가.  물론이다.  아무리 표현양식 및 형식이 다양화되고 형태가 파기되는 상황일지라도 예술적인 가치로서의 정신성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에서 정신적인 가치를 빼면 단순한 기능이나 기술로서 그칠 따름이다. 

  예술에서 말하는 정신적인 가치 즉 고상한 품격이란 단순히 높은 지식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높은 이상을 지향하는 고상한 정신 및 감정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고상한 사고 및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무리 학식과 교양이 높을지라도 정신 및 생활태도가 맑지 못하면 거기에 고상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무리 학식이 높을지라도 교만하면 천한 기운이 스며들게 된다.  반면에 설혹 학식이 부족할지라도 교양 있는 삶의 태도와 정신성이 곧고 바르다면 고상함이 들어서게 된다.  이처럼 예술에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삶에 대한 진정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정신적인 가치는 변할 수 없는 예술적인 가치를 생산해내는 중요한 인자인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표현양식 및 형식은 변할지언정 그 본질로서의 고상한 정신적인 가치인 예술성은 불변이다.  물론 거꾸로 아무리 정신적인 가치가 높은 곳에 이르렀다고 해도 형식이 부실하면 그 역시 예술적인 이상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정신성과 형식은 등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상의 흐름이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 양반들처럼 음풍농월하면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태도만이 고상한 삶의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바쁜 가운데서도 스스로 고상해지려고 하는 마음가짐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이해하며 마음을 맑게 닦는 가운데 사색이 깊어지며 이로써 고상한 예술적인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고상한 예술적인 가치란 미적인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고 질서가 있으며 순연하고 세련된 형태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난삽하고 거칠며 투박한 것에도 아름다움은 깃들인다.  그러기에 거칠고 힘차며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현대적인 조형언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고상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  문인화에서 쓰이는 파묵 및 발묵이 이에 해당한다.  자유로운 필의를 받아내는 그처럼 파괴적인 필법에서도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부작란’이나 ‘세한도’ 따위에서 보여지는 거칠고 투박한 필치는 확실히 단아한 선을 선호해온 문인화의 격식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 작품이 고상한 아름다움을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창작이란 기존의 형식을 타파하는 것으로써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언어가 돼서는 곤란하다.  파괴를 위한 파괴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파괴와 부정적인 파괴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예술에서 말하는 창작이란 긍정적인 파괴를 뜻하는 것이다.

  현대미술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표현언어에서도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조형언어일지라도 그 최종적인 표현에서는 비례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점이다.  점 하나 선 하나일지라도 전체적인 화면 공간 또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비례가 아름다워야 한다.  황금비례와 같은 식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형태의 자기만의 비례를 찾아내야 한다.  자기만의 비례는 독자적인 형식으로 가기 위한 기반인 것이다.  자기만의 비례를 찾아내면 그 이후에는 어떠한 조형언어 및 어법을 받아들이더라도 독자적인 형식에 이를 수 있다.

  비례라는 것이 반드시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인 언어 및 어법에서도 비례가 적용된다.  형상과 무관한 독단적인 선 하나일 뿐인 추상작품의 경우에도 전체화면에서 차지하는 크기, 놓이는 위치 그리고 선 자체의 형태에 따라 시각적인 인상이 달라진다.  여기에서도 비례미가 적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문인화는 정신적인 가치로서의 고상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운데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현대미학과의 접촉을 통해 얼마든지 다양한 조형세계를 전개하고 관철할 수 있다.  정신적인 깊이보다는 감각적인 쪽으로 기우는 듯한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고상한 정신적인 가치로서의 예술의 필요성은 증가한다. 

                                                                                                                                                      

 넷, 한국적인 문인화로 가는 길

 

  문화 예술은 다양한 삶의 양태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그 흔적이다.  다시 말해 지적인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삶의 경계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지적인 인간이란 넓은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고 학문적인 소양이 두터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요건에 합당한 보편적인 가치에 순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문화 예술이란 이와 같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삶의 양태 속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문화 예술은 특정 지역에서 오랜 동안 공동체적인 삶을 지탱해온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필요성에 의해 또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강구되는 생활방식이 문화예술을 촉발시키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집단적인 공통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 문화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생활의 필요성에 따른다고는 하지만 단순한 필요성을 뛰어넘는 미적인 감각이 반영된다.  이러한 결과는 역시 인간은 이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그리고 현실에서 구하지 못하는 것을 얻으려는 심리적인 보상개념으로서의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새로운 문물의 출현에는 언제나 이와 같은 이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한국문인화가 가야 할 길은 여기로부터 멀지 않다.  즉, 한국인으로서의 현재의 삶의 방식을 작업에 반영하는 것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그러자면 먼저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명확히 알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문화적인 속성 또는 특징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을 모르고서야 어찌 한국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으랴.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조상 대대로 문화적인 전통 및 가풍을 따르면서 생활해온 것으로써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즉, 한국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써 문화적인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간단히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한 세기 이상 새로운 서구적인 문화가 유입되고 있는 현실에서 현재의 우리의 삶 자체가 고스란히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생활양식보다도 의식 자체가 먼저 서구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한국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온전한 우리 것인지도 검증해 보아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그리고 예술이 독자적인 양식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활 속에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해 가는 서구문화에 동화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그러면서도 적지 않은 부분은 서구문화에 침식당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상당부분 서구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생활양식으로 보아 고유의 민족적인 정서 및 전통적인 가치가 예술에 반영될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독자적인 양식이라는 것은 대체로 그 민족 특유의 생활양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 민족 고유의 삶의 정서가 담김으로써 독자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인 정서 및 전통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얘기하면 일부에서는 서구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사회현상 자체도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우리는 자생적인 고유의 문화 예술을 생산하기보다는 외래문화에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고유의 문화예술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니, 오늘 우리의 생활양식이 서구화되어 가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어차피 고유의 문화예술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세상이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인들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문화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국제화 시대에 따른  환경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안일하고 소박한 생각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국제화 또는 세계화란 다름 아닌 국가 및 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가치를 버린 채 끝내는 서구문화에 통합되거나 동화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세계화를 경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세계화라는 새로운 세계질서에 편입된다고 해서 온전한 서구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설령 세계화가 진행되어 서구문화가 보편화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단적으로 말해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 자체만 서구화될 수 있을 뿐, 외적인 형태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한국인으로서 생김새로 인해 서구인과 동등한 지위에는 오를 수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가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일본은 명치시대부터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편입되겠다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러나 일세기도 훨씬 지난 현시점에서 일본은 서구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갈등에 휩싸이고 있다.  생김새를 바꿀 수도 없거니와 생활양식 및 사고방식조차도 결코 서구화될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 및 생활관습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서적인 차이는 어떤 식으로든지 좁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수긍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은 서구화의 과정에서 부딪쳐온 서구문명과의 이질감으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 경향으로 흐르는 듯한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이에 덧붙여 서구문화가 반드시 우월하고 양질의 것이냐를 따지게 된 것이다.  인간 삶의 질적인 향상이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도 일본이 서구화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하나의 원인이다. 

  이처럼 일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질적인 문화도 받아들여야 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문화예술이란 특정 공동체의 삶의 정서의 총체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형태의 외래문화이든 그 공동체의 삶의 정서와 만나 용해되어 재생산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서구문화 중에서도 우수하고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민족적인 정서를 파괴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민족적인 정서가 파괴되는 곳에서는 문화적인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문인화가 전래의 습속에 갇혀 시대감각을 반영하는데 무관심한 것은 문화적인 속성에 역행하는 일이다.  외래문화라 할지라도 가치가 있고 시대감각에 맞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태도가 바로 이상주의 실현을 기대하는 자연스러운 인간 삶의 방식기 때문이다.  한국문인화가 전래의 조형개념을 벗어나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면서 그 생명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적인 삶의 양식에 맞는 미적 감각, 즉 조형감각을 가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미적 감각에 사로잡힌다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현시대를 이끌어 가는 기계전자문명의 상징적인 언어는 다름 아닌 추상이다.  자연에 없는 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추상일 수밖에 없다.  인위적인 조형물로 넘치는 오늘의 세상은 바야흐로 추상세계인 셈이다.  온갖 과학적인 생산물들은 모두가 추상세계인 것이다.  과학적인 생산물은 모두 기하학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  기하학적인 이미지가 바로 추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국문인화는 추상성에 대한 관심 및 이해 그리고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왜곡 또는 변형하는 일 자체가 추상성과의 제휴인 것이다.

  현대적인 문인화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추상성과의 제휴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추상성과의 제휴는 형태적인 재해석을 의미한다.  추상으로 형상을 대체한다는 뜻은 아니다.  추상과 형상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창작이란 모름지기 새로운 세계와의 화해이기에 그렇다.  문인화의 재해석 또는 현대화란 이 지점에서 성립된다.

  더불어 창작의 중요한 요건의 하나인 자유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란 일체의 고정관념 및 선입관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독자적인 창의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정신적인 해방을 뜻한다.  열린 세상을 향한 자유정신이야말로 창작의 제일의 조건인지 모른다.  이전까지 나를 지배해온 일체의 지식으로부터도 홀가분한 독립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유정신을 세워야 한다.  전통적인 문인화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자유정신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나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고고한 정신적인 자유만이 새로운 세계, 이상세계에 이를 수 있는 첩경이다. 

                                                                                    

<2001년월간지 "문인화와 서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