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펜보이 2007. 9. 27. 10:32
 

  어느 밤의 누이

                                                             

  이수익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하게 잠들어 있다.


  밤 깊은 귀가길, 어둠 속에 전철은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 위로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넋을 잃고 잠이 들어 있다.


  깊숙한 땅 속 공간을 몸부림치듯 전철은 달리고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년만큼 아득한 세월의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전철은 심야의 들판을 달리는데.


  우리에게 가장 기쁜 일 중의 하나는 다른 이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 무슨 일로든지 다른 이에게 선물하는 일보다 기쁜 일이 따로 없는 듯싶다. 무엇을 선물하면 기뻐할지 궁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산을 짜고 준비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그저 즐겁기만 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상대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면 절로 흥겨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이가 아니고, 모르는 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모르는 이에게 무언가 도움이 될만한 것을 나누어주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소유욕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양에 관계없이 항시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까닭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선뜻 덜어내기가 힘든 것이다. 유형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마음마저도 나누는 일이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저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건만 나누어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일만해도 그렇다. 공공시설의 자리란 본시 내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함께 쓰는 공용이다. 그래서 소유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자리에 집착한다.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는 편안함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한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나면 비록 다리는 조금 아플지언정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다리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게된다. 다시 말해 그것이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나누어주는 데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 대가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치유의 영약과 같은 것이다. 나눔은 마음의 가벼움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아주 하찮은 것을 나눔으로써 맛보게 되는 기쁨을 어찌 물질적인 충족감과 비교할 수 있으랴.

  이수익 시인의 “어느 밤의 누이”는 나누는 일의 기쁨, 그 실체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이 시를 읽으면 나누는 일이란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상대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맛보게 되는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란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렇다. 나누어주는 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때 나눔의 값어치는 더욱 커지게 된다.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혼곤하게 잠들어 있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하게 잠든 이는 일상 속에서 그저 흔히 만날 수 있는 타인일 따름이다. 알지 못하는 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잠든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본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흔히 겪는 일이다. 버스나 전철을 타는 이라면 타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드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시의 화자인 ‘나’ 즉, 시인은 아주 담담히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한 고단한 삶’에 연민 어린 시선을 준다. 그로부터 자신을 포함한 서민들의 자화상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밤 깊은 귀가길, 어둠 속에 전철은 흔들리고’

  늦은 밤 ‘귀가길’ 전철 안에서 일어나는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한 에피소드가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전철을 타고 귀가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피곤한 잠과 그를 따스하게 받아들이는 이의 정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고단한 삶’의 주인공은 피곤한 삶에 지친 나머지 밀려드는 잠에 빠져 옆자리에 앉은 타인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정경은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서로 모르는 타인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얼굴이/어쩌면 중년의 내 누이만 같은데,/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내 어깨 위로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넋을 잃고 잠이 들어 있다.’

  시인은 ‘혼곤한’ 잠에 빠진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얼굴’을 차마 물리치지 못한다. 문득 낯모르는 여인의 모습에 ‘중년의 내 누이’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잠시 곁에 앉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여인을 차라리 동행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면서 여인의 모습에서 슬픔을 본다. 오죽 피곤하면 남모르는 남자의 어깨에 기댄 줄도 모르는 채 혼곤한 잠에 빠져들까, 생각하며 연민의 정을 건네는 것이다.

  ‘깊숙한 땅 속 공간을 몸부림치듯 전철은 달리고’

  이런 일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전철은 짐짓 깊숙한 땅 속을 달리는 일에만 열중한다. 깊숙한 땅 속 공간은 여인의 혼곤하게 빠져든 잠 속 공간과 다르지 않다. 그 깊숙한 땅 속 공간은 어쩌면 여인에게는 힘겨운 삶의 중압감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렇다. ‘몸부림치듯’ 달리는 전철은 힘겨운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여인의 희망을 상징한다. 또한 ‘땅 속 공간에서 몸부림치듯 달리는 전철’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여인의 존재에 대한 심리적인 갈등을 은닉한다.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천년만큼 아득한 세월의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이 낯선 여자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그런데 문득 하나의 해법, 즉 묘수가 떠오른다. 시인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여인에게서 연민의 정을 넘어 ‘천년만큼 아득한 세월의 인연’으로 간주한다. ‘인연’은 여인을 밀쳐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핑계를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잠든 여인을 자신의 어깨에서 무심히 떨쳐내면 그 뿐인데도 차마 여인의 잠을 깨우지 못한다. ‘천년만큼의 아득한 세월’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인연’을 끌어들이면서. 옷깃을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라 하거늘, 하마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 수 있는 일이야말로 아주 깊은 ‘인연’이 아니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자기다짐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흔쾌히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기로 한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아예 ‘오빠가 되어 있기로’ 작정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스스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마련한다. 오빠가 됨으로써 낯선 여인의 잠을 좀더 편안한 기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전철은 심야의 들판을 달리는데.’

  이제 전철은 ‘땅 속 공간’을 빠져 나와 ‘심야의 들판’을 달린다. 여기서는 평정심을 되찾고 주어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렇다. 마지막 연은 여인에 대한 일체의 갈등을 잠재우고 어깨를 빌려주는 데서 오는 마음의 가벼움만을 음미하고 있는 상황을 시사한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