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펜보이 2007. 10. 13. 11:38
 

  통도사 땡감 하나


   최영철


  노스님 한 분 석가와 같은 날로 입적 잡아놓고

  그날 아침저녁 공양 잘 하시고

  절마당도 두어 번 말끔하게 쓸어놓으시고

  서산 해 넘어가자 문턱 하나 넘어

  이승에서 저승으로 자리를 옮기신다


  고무줄 하나 당기고 있다가 탁 놓아버리듯

  훌쩍 떨어져 내린 못난 땡감 하나

  뭇 새들이 그냥 지나가도록 그 땡감 떫고 떫어

  참 다행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헛물만 켜고 간 배고픈 새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었다고 땡감은 생각하고

 

  노스님을 떨구어낸 감나무

  이제 좀 홀가분해 팔기지개를 켜기 시작하고


  성직자의 삶이란 시작부터 보통 일이 아니다. 세속적인 온갖 개인의 욕망을 끊어버린 채 신에 의탁하는 삶으로 일생을 바치는가 하면, 남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체의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절연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이다. 인간은 애당초 욕망의 덩어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불길을 재우는 일 자체가 수행이다. 속된 욕망으로 얼룩진 심신을 닦아내 말갛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수행의 참모습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투명해야 한다. 심신에 티가 보이지 않는 얼음처럼 냉철하게 자신의 속내까지도 환히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를 따르는 이들 또한 거기에 온전히 감전될 수 있다.

  우리가 산에 가는 것은 청정한 공기와 맑은 물 그리고 푸른 빛깔이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산에 사는 것은 이러한 자연의 순수성으로 심신을 맑게 씻어내기 위해서이다. 세속적인 욕망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게 되면 사람 또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욕망의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수행이란 모름지기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계속되는지 모른다.

  최영철 시인의 “통도사 땡감 하나”는 선승이 세상과 결별하는 모양을 마치 곁에서 목격하고 있는 듯 눈에 선하게 그려낸다. 그만큼 그 묘사법은 극히 사실적이다.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으면서 맛깔스럽게 풀어나가는 시상의 전개가 일품이다. 거기에는 선문답으로 일관해온 선승의 생경한 모습도, 삶의 참뜻을 깨우친 선지식으로서의 고상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심 없이 살아온 촌부나 다름없는 평범한 산승의 일상이 담백하게 그려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는 일은 엄숙한 일이건만 산승의 마지막 하루는 도무지 긴장감이 없어 맥빠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노스님 한 분 석가와 같은 날로 입적 잡아놓고/그날 아침저녁 공양 잘 하시고/절마당도 두어 번 말끔하게 쓸어놓으시고/서산 해 넘어가자 문턱 하나 넘어/이승에서 저승으로 자리를 옮기신다’

  여기에서 ‘석가와 같은 날로 입적 잡아놓고’라는 구절이 끌어안고 있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세상에 오고 가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진리이다. 그럼에도 노스님은 세상 떠나는 날을 받아놓고 있으니 이 어찌 범상한 일이랴. ‘석가와 같은 날’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거니와 게다가 입적 날을 잡아놓았다니, 이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자로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노스님은 일찍이 한 소식을 얻은 자임을 시사한다. 석가가 그랬듯이 노스님 또한 그런 깨달음의 경지에 든 것이다. 따라서 노스님은 석가와 동격이 된다.

  그럼에도 노스님은 깃털처럼 아주 가볍고 살가운 모습으로 마지막 하루를 보낸다. ‘공양’도 잘하시고 ‘절마당’도 쓸고, 서산에 해가 지듯 뒤따라서 단지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세상에 하직한다. 산다는 것이나 죽는다는 것이나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단지 다른 세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고무줄 하나 당기고 있다가 탁 놓아버리듯/훌쩍 떨어져 내린 못난 땡감 하나/뭇 새들이 그냥 지나가도록 그 땡감 떫고 떨어/참 다행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헛물만 켜고 간 배고픈 새들에게/참 미안한 일이었다고 땡감은 생각하고’

  여기에서 노스님은 돌연 감나무에 매달린 ‘땡감’에 비유된다. 삶의 이치를 깨우친 수행자로서가 아니라 세속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것도 떫어 먹지 못하는 ‘땡감’으로 비유됨으로써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하여 친숙한 우리의 이웃 할아버지가 된다. 그런데다가 ‘못난 땡감’이니,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친숙성을 통해 우리는 노스님이 지향해온 삶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노스님은 당기고 있던 고무줄을 장난삼아 ‘탁 놓아버리듯’ 제 스스로 ‘떨어져 내린 못난 땡감’이 되는 것이다. 성직자로서의 금욕적인 삶 이면에는 이렇듯이 저잣거리 촌노와 매한가지인 진솔한 인간적인 체취가 풍기고 있음을 은연중에 시사하는 멋진 비유이다.

  ‘뭇 새들이 그냥 지나’갈 만큼 떫고 떫은 땡감이었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의 참뜻은 꼭꼭 숨겨져 있다. 아무런 가치도 없고 줄 것 없는 그저 한낱 ‘땡감’일 뿐이어서 다행이라는 말은 득도하였습네, 하고 중생을 현혹하는 그런 땡초가 아니라는 뜻의 반어법이다. ‘헛물만 켜고 간 배고픈 새들’(중생)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땡감’(노스님)의 생각도 역시 반어법이다. 무언가 한 소식 얻어듣겠다고 노스님을 따르던 이들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이 ‘헛물’만 켜도록 ‘땡감’으로 일관했으니, ‘참 미안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역설적으로 노스님 자신으로부터 진정한 깨달음을 얻어내지 못한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노스님을 떨구어낸 감나무/이제 좀 홀가분해 팔기지개를 켜기 시작하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자리를 옮기신’ 노스님을 떨쳐낸 ‘감나무’는 사뭇 홀가분해진 기분이다. 여기에서 팔기지개를 켜는 ‘감나무’는 노스님이 지향한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번뇌로 가득 찬 이승에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존재로서 변하지 않는 불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불성은 우리 모두의 지향점이다. 새 먹이조차 되지 못하는 ‘땡감’을 떨구어냄으로써 한 시름 놓게 되는 것이라는 표현은 노스님을 떠나 보낸 허전함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다. 노스님-땡감-감나무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반전은 선문답과 다르지 않다. ‘노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자를 의미하고, 땡감은 속세의 대중을, 그리고 감나무는 불성, 즉 관념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깊은 종교적인 의미를 상큼한 비유로 갈무리해내는 시인의 미적인 심미안이 빛을 발하고 있는 시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