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펜보이 2007. 10. 22. 06:32
 

 살구나무꽃 그늘 아래에서


  송찬호


  아아 그 꽃 그늘 아래서 그댈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다시 보세 다시 만나세 그땐 재 넘어 꽃가마 타고 오겠다더니

  이게 웬일인가 늙은 나무 아래 구부리고 앉아 살구꽃등(燈) 몇 점 팔고 있으니


  그 옛날 우린 꽃 꺾어 술잔 세어가며 놀았지

  꽃이 질 땐 금개구리가 밤을 새워 울었고

  뒤돌아 헤아려보니 내 시업(詩業)은 겨우 백근의 무게도 지나지 않네

  그 중에서도 깨알처럼 가려낸 검은 것이

  겨우 몇 근의 문자이고 그 나머지도 흰 종이의 무게라네

  그대가 건너온 세상은 어떤가, 거긴 아직도 연화지옥인가

  오늘은 내가 걷겠네 그대는 내 어깨에 앉아 꽃가지나 쳐드시게


  어떤가, 살구꽃 내려앉으니 내 어깨도 노닐만 하잖은가


  나는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귀신을 오른쪽 어깨 위로 옮겨 앉혔다

  

  세상살이 중에서 몹쓸 것 중의 하나는 가장 친한 친구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일이겠다. 절친한 친구는 내 몸과 같은 것이어서 읽고 나면 팔 하나쯤은 없어진 듯한 고통이 따르게 된다. 친구는 피붙이나 가족과는 또 다른, 힘겨운 세상살이를 견디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친구가 곁을 떠나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세상 밖으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 그 허전함을 어찌 형언할 수 있으랴. 하지만 절친했던 친구는 설령 세상을 떠난 뒤라도 그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를 기억함으로써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누구에게나 기억되는 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누군가와 더불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추억은 꿈의 빛을 잃지 않는 한 내 가슴속에서 오롯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존재한다. 그러기에 함께 하는 추억 속의 친구는 기억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불현듯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송찬호 시인의 “살구나무꽃 그늘 아래에서”는 친구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에게 건네는 얘기처럼 다정다감한 구어체로 펼쳐지는 시상의 전개가 물 흐르듯 매끄럽다. 기교적인 언어로 꾸며지는 시적인 긴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서정적인 이미지를 흠씬 풍기는 것이다. 언어의 함축 대신에 아름다운 서정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순도 높은 시적인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아아 그 꽃 그늘 아래에서 그댈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꽃 그늘 아래’의 ‘그대’라는 첫 구절로 보아서는 님을 만나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하니, 연애시 쯤 될성싶다. 전혀 뜻밖에 만난 님을 보며 기쁨을 주체치 못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다시 보세 다시 만나세 그땐 재 넘어 꽃가마 타고 오겠다더니 이게 웬일인가 늙은 나무 아래 구부리고 앉아 살구꽃등(燈) 몇 점 팔고 있으니’

  하지만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만나서 기뻐하게 된 대상은 연인이 아니라 절친한 친구이다. ‘꽃가마’가 상징하는 것은 성공한 젊은 날이다. 젊은 나이에 성공해서 다시 돌아오겠다던 친구가 ‘늙은 나무 아래 구부리고 앉아 살구꽃등을 팔고’ 있는 신세가 되어서 만났으니 기뻐하기에 앞서 무상한 세월을 한탄할 수밖에.

  ‘그 옛날 우린 꽃 꺾어 술잔 세어가며 놀았지/꽃이 질 땐 금개구리가 밤을 새워 울었고/뒤돌아 헤아려보니 내 시업(詩業)은 겨우 백근의 무게도 지나지 않네’

  ‘그 옛날 우린 꽃 꺾어 술잔 세어가며 놀았지’라는 구절은 정철의 <장진주사>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꽃 꺾어 술잔 세어가며’라는 구절이 던져주는 이미지는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아무런 근심 없이 꽃 그늘 아래에서 벗과 술잔을 나누며 아름다운 세상을 희희낙락하는 정경은 그대로 낙원인 것이다. 그러나 ‘꽃이 질 땐’ 꿈같이 아름다운 한 시절이 끝나가고 있음을 슬퍼하듯이 ‘금개구리가 밤을 새워 울고’만다.

  늙은 나무와 다르지 않은 구부린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꽃등이나 팔고 있는 옛 친구를 만나니 문득, 꽃처럼 아름다운 젊은 날이 되살아나면서 유수 같은 세월의 흔적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 친구에 비교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친구의 행색이 초라하듯이 자신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시 쓰는 일로 일관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니, ‘겨우 백근의 무게도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이다. 친구나 자신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조인 셈이다. 시인은 친구의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 깨알처럼 개려낸 검은 것이/겨우 몇 근의 문자이고 그 나머지도 흰 종이의 무게라네’ 

  그토록 많이 써낸 글 가운데 힘겹게 ‘가려낸 검은 것’ 정도가 그저 쓸만하고 그 나머지는 종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백근의 무게 가운데 종이의 무게를 제하고 나면 그나마 쓸만한 시가 몇 수 되겠느냐는 비유이다. 그러니 농사로 쳐도 반타작이 안 된다는 계산이다. 이러면 헛농사인 셈이다. 심혈을 기울여 온 시인 자신의 시업이란 것도 따지고 보니 ‘늙은 나무 아래 구부리고 앉아 살구꽃등’을 파는 친구와 다를 바 없다는 자조이다.

  ‘그대가 건너온 세상은 어떤가, 거긴 아직도 연화지옥인가/오늘은 내가 걷겠네 그대는 내 어깨에 앉아 꽃가지나 쳐드시게’

  ‘살구꽃등’을 팔고 있는 친구는 여기에서 이 세상의 친구가 아님이 드러난다. 연화지옥이란 저승을 의미한다. 그 저승에서 이승으로 건너온 친구는 실체가 없는 영혼이다. 즉 귀신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무색케 하는 친구와의 정이야말로 현실을 초월하는 힘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떠난 너나 이승에 남아 있는 내가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잊고 그저 그 옛날 함께 꽃 그늘 아래서 인생을 즐겼듯이 모처럼 회포나 풀자는 것이다. 내가 걷고 ‘그대는 내 어깨에 앉아 꽃가지나 쳐들고 흥겹게 노닐자는 얘기다.

  ‘어떤가, 살구꽃 내려앉으니 내 어깨도 노닐만 하잖은가’

  비록 친구의 어깨에 앉아 꽃가지를 쳐드는 정도이지만 살구꽃이 이를 거드니 그래도 예나 다름없는 즐거움이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이제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전처럼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눌 수는 없되 친구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흥겹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귀신을 오른쪽 어깨 위로 옮겨 앉혔다’

  친구는 깃털보다도 가벼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체적이 없는 존재로서의 이미지는 귀신이다. 이 세상의 경계를 훌쩍 넘어버림으로써 몸을 버리고 떠난 존재는 어깨 위에 앉힐 만큼 가볍다. 물론 실체가 없기에 무게 따위에 대한 육체적인 감각이 반응할 수 없으나 시인은 저승의 친구를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상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비록 몸은 잃었을망정 친구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그 존재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살아있음과 다르지 않다.

  ‘살구나무꽃 그늘 아래서’ 노닐던 친구와의 아름다운 옛 추억을 되새겨보는 정경이 옅은 연분홍 빛깔의 살구꽃처럼 화사하게 펼쳐지고 있는 시다. 결코 두려운 존재가 아닌 친숙한 이미지로서의 귀신의 존재를 들추어내는 절묘한 반전은 분노가 아닌, 까맣게 속았다는 데 대한 짤막한 쾌감마저 선사한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