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펜보이 2007. 11. 13. 20:28
 

  다시, 학동


  일근

 


  이 바다에서 처음 시詩를 썼다, 푸른 스무 살

  나는 조국祖國으로 가는 전사戰士가 되고 싶었지만

  길은 끊어지고, 꺾어져 피 흘리는 상처를 감추며

  세상의 끝을 찾아 숨어 들어간 학동

  학동 바다는 사람 사는 마당이었다

  부르지 않아도 먼저 달려와 안기던 바다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바다였으니

  새벽이면 만선의 깃발로 돌아오던 갈치 배들

  갈매기 떼도 환호하며 날아들어

  내게 학동은 바다에 피어난 꽃밭이었다

  햇살은 바다 위에도 땅위에도

  동백나뭇잎 하나 하나에도 평등平等하게 빛나고

  바다가 수평水平이듯 함께 어깨를 대고 누운 집들은

  모두 가난하기에 모두 행복했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으니, 돌아가지 않으려고

  해안선을 잡고 있는 자갈밭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에

  내 열 손톱 밑으로 피멍이 들어

  나는 작별의 편지 대신 길고 긴 서정시를 썼다

  새로 난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다시 찾은 학동, 옛길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없다

  옛집들도, 그 안에 살던 사람들도 떠나고 없다

  사라지고 떠나버린 자리에 마당 없는 민박촌이 들어서고

  어업한계선 밖에까지 달아나 버린 학동바다는

  이제는 내가 먼저 불러도, 무슨 상처가 깊은지

  돌아보지도 안고 웅크리고 있다

  

  세상이 눈부시게 변하고 있다. 아니 정신차릴 수 없을 만큼 급변하고 있다. 지난 20세기는 그 변화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기원 이후 19세기 동안의 변화의 폭을 훨씬 능가했다고 한다. 19세기 동안을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된 기계문명으로 요약한다면, 1세기 동안에 불과한 20세기는 전자문명기라고 할 수 있다. 전자문명으로 상징되는 현대문명은 순차적인 변화가 아니라, 가속도에 의한 변화여서 불과 10년 후도 예측하기 힘들 정도이다. 현대문명은 자연에 기대어온 우리의 생활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있다. 생활의 편리함을 전제로 하는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행되는 자연환경 파괴야말로 20세기 이후 전자문명이 가져온 어두운 그림자이다. 현대문명은 자연환경은 물론 전통적인 미풍양속마저 뒷전으로 밀쳐냄으로써 전자기기가 지배하는 곳에서 인간은 그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대자연은 생물인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다. 그 고향을 인간 스스로가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모태로서의 자연이 망가지면 결과적으로 인간이 되돌아갈 곳을 잃게 되는 셈이다. 안식처로서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나면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미가 없다는, 감정이 메마른 현대인의 기질은 고향에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모른다.

  정일근 시인의 “다시, 학동”은 정신적인 안식처로서의 고향, 즉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데 대한 상실감의 깊이를 헤아리게 하는 시이다. 고향은 성장기에 피와 살을 붙여주고 정서의 텃밭이 된다. 마치 스펀지처럼 그저 가감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 시절의 예민한 감수성은 인격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고향이 지니고 있는 정서적인 특징이 인격 및 성격을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고향의 정서는 직업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그 일생 전반까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바다에서 처음 시를 썼다. 푸른 스무 살/나는 조국으로 가는 전사가 되고 싶었지만/길은 끊어지고, 꺾어져 피 흘리는 상처를 감추며/세상의 끝을 찾아 숨어 들어간 학동/학동 바다는 사람 사는 마당이었다’

  스무 살이면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과 육체가 온전해졌음을 의미하는 성인이 된다. 성인이 되면 비로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도 함께 한다. 또한 남자는 스무 살이 되면 군대에 가야 된다. 그런 나이에 ‘세상의 끝’ 학동을 찾아 들어가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선택했다. ‘길은 끊어지고, 꺾어져 피 흘리는 상처를 감추며’라는 구절은 어두운 역사적인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듯 ‘숨어 들어간 학동’에서 자의로 시인의 길을 선택을 한 것이다. 세상과 절연된 순결한 ‘학동’ 바다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 사는 마당’으로서, 시를 쓸 수 있는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부르지 않아도 먼저 달려와 안기던 바다/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바다였으니/새벽이면 만선의 깃발로 돌아오던 갈치 배들/갈매기 떼도 환호하며 날아들어/내게 학동은 바다에 피어난 꽃밭이었다’

  바다는 그 자체가 이미 순정한 자연이다. ‘먼저 달려와 안기는 바다’는 내가 거기에 일체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바다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경계, 그것은 곧 자연에의 동화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단순히 생명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삶이야말로 학동의 진면목이다. ‘먼저 달려와 안기는 바다’와 ‘한 몸’이 되는 그 시간이야말로 자연적인 삶의 환희를 일깨우는 순간이다. 그러한 눈으로 보면 ‘만선의 깃발’과 ‘갈매기 떼의 환호’는 마치 형형색색의 꽃밭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학동’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갈매기 떼와 어부들의 삶이 한데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정경을 가리킨다.

  ‘햇살은 바다 위에도 땅 위에도/동백나뭇잎 하나 하나에도 평등하게 빛나고/바다가 수평이듯 함께 어깨를 대고 누운 집들은/모두 가난하기에 모두 행복했다’

  ‘학동’ 바다에 비치는 햇살은 어느 것에나 균등하게 나누어진다. 더도 덜도 없이 ‘평등하게’ 비추는 ‘햇살’은 자연의 혜택이어서 누구에게나 골고루 돌아간다. 따라서 낮게 드리운 집들 또한 ‘수평’의 바다처럼 나직이, 그리고 균등하게 어깨를 맞대고 누워 있다. 거기에는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가난하지만 모두가 높고 낮음이 없으니 다툼이 없어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가난한 삶이라는 것도 비교대상이 없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으니, 돌아가지 않으려고/해안선을 잡고 있는 자갈밭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에/내 열 손톱 밑으로 피멍이 들어/나는 작별의 편지 대신 길고 긴 서정시를 썼다’

  ‘학동’에서 떠날 때가 오자 마치 해안선의 자갈밭이 파도에 쓸려나가지 않으려고 모진 애를 쓰는 듯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 피눈물 나는 아픔을 이기며 ‘작별의 편지’를 대신하여 ‘길고 긴 서정시’를 썼다는 것이다. 

  ‘새로 난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다시 찾은 학동, 옛길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없다/옛집들도, 그 안에 살던 사람들도 떠나고 없다’

  세월이 흘러 다시 ‘학동’을 찾았을 때 ‘아스팔트 포장길’이 나고 ‘옛길은 지도에서’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이랴. 옛집은 물론이려니와 거기에서 살던 사람들 모두가 떠나고 없다. 세상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사라지고 떠나버린 자리에 마당 없는 민박촌이 들어서고/어업한계선 밖에까지 달아나 버린 학동바다는/이제는 내가 먼저 불러도, 무슨 상처가 깊은지/돌아보지도 않고 웅크리고 있다’

  가난하게 그러나 행복하게 살던 ‘학동바다’는 개발에 밀려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학동바다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외지 사람들이 장악하여 돈 버는 마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업한계선 밖까지 달아나 버렸다는’ 표현은 연근해의 어업자원이 고갈된 상황을 시사한다. 그러니 고깃배들이 만선의 깃발을 날리며 돌아오던 정경이 되풀이 될 수 없다. 멀리 달아나 버린 ‘학동바다’는 ‘상처가 깊어’ 다시 찾은 시인을 ‘돌아보지도 않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학동바다’를 버렸듯이 ‘학동바다’ 또한 시인을 외면하고 있다. 이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아니던가. 망가진 자연, 아름다운 ‘학동바다’의 지울 수 없는 상처는 비수가 되어 시인의 가슴에 꽂히는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