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이야기

펜보이 2008. 6. 26. 06:58

오디오와 ‘음악성’

 

신항섭(미술평론가)


음악애호가에게 오디오는 최상의 선물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음악회를 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오디오야말로 꿈같은 존재인 것이다. 음악회를 가지 않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적인 교향악단 또는 명연주자들을 방안에 초대해 혼자만을 위한 음악회를 가질 수 있다는 일보다 더 환상적인 일이 어디 있으랴. 오디오는 이처럼 꿈에나 있을 법한 일을 아주 간단히 현실적인 사건으로 만들어놓는다. 오디오야말로  불가사의한 마법의 상자인 것이다.

만일 오디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음악회에 가야만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뿐이리라.  따라서 세계적인 교향악단 및 명연주자들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일생에 한 번이나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오디오가 있는 세상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음악애호가들에게 오디오는 한마디로 축복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여건만 뒷받침된다면 오디오를 통해 세계적인 악단 및 연주자들의 환상적인 연주를 싫증이 나도록 들을 수 있다. 단지 음악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아주 적은 돈으로도 황홀한 음악 감상이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사실, 단지 기십 만 원 정도의 스테레오 카세트나 포터블 시디플레이어만으로도 그 음질이 어떻다고 시비를 걸 수 없을 만큼 멋지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아주 간결한 현대의 오디오 기기만으로도 초기의 오디오인 납관이나 SP판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깨끗하고 정확한 재생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음악을 듣는다는 일 자체만을 생각하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싶은 것이다. 이처럼 초보적인 보급형 오디오일지라도 스펙뿐만 아니라 청각으로도 거의 흠 잡을 데 없는 수준의 기술적인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전자기계 기술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는 보다 더 훌륭한 재생음악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리하여 때로는 오디오가 재생하는 음악을 통해 실제의 음악회에서 듣는 것보다 더 큰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른 바 최신 기술이 반영된 하이엔드 시스템이 재생하는 음악은 실연보다 더 짜릿한 음악적인 쾌감을 제공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착각이 아니라, 실제의 연주보다 더 생생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오디오 시스템이 존재한다. 아무리 음악회에서 듣는 실연이라고 할지라도 음향조건이나 청취위치 및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따분하게도 들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최상의 조건을 갖추어 놓은 오디오시스템이 들려주는 음악적인 감동이 더 실제적일 수도 있다는 전제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오디오 재생음악이 실연보다 더 감동적이라는 표현은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으나, 현대 오디오 기술은 확실히 실연에 육박하는 수준에 이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냉정히 따져본다면 오디오는 실제의 연주에 비할 때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아날로그 또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실제의 연주를 녹음하여 저장매체에 담아 반영구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오디오는 그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연주와 자주 비교되는 것은 역시 여전히 기계적인 소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문제는 아무리 전자기술이 발달할지라도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차이임과 동시에 풀 수 없는 숙제인지 모른다. 설령 비디오나 DVD 오디오를 통해 실제의 연주상황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전자기기에서 만들어지는 재생음악은 아무래도 실연의 느낌 및 감동과는 다른 것이다. 연주자와 감상자가 콘서트홀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교감하는 것은 단순히 청각의 작용에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온 몸으로 반응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실연은 연주자와 함께 공기를 호흡하면서 실제의 악기 및 연주장의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현실적인 체험을 가능케 한다. 반면에 오디오는 어디까지나 녹음된 저장 매체의 음악을 재생하는 데 그치므로 실연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재생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체험과 결부시켜 실연의 분위기를 상상하는 것으로 족할 따름이다. 음악적인 상상이란 그것이 설령 체험과 결부된 것일지언정 끝내 가상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가상의 세계는 아무리 교묘히 실제를 방불케 한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허상일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꿈같은 오디오시스템을 갖추고도 왠지 만족스럽지 못하여 바꿈질을 계속하는 것인지 모른다. 실연과 오디오음악의 간극이란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디오마니아들은 끊임없이 실연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어쩌면 초고가의 하이엔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실연에 대한 욕망 탓인지도 모른다. 잘 조합된 하이엔드로 음악을 듣다보면 실연을 듣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눈을 감고 오디오음악에 집중하다 보면 연주공간의 공기를 표현하는 미세한 암소음조차 포착해 내는 극미한 묘사력으로 인해 실연으로 착각할 정도인 것이다.

이처럼 실제와 착각할 정도의 우수한 오디오시스템에 대해서도 마니아들은 이러쿵저러쿵 군말이 많다. 그 군말 가운데 ‘소리는 기가 막힌데, 음악성이 부족하다’ ‘소리가 너무 깨끗하고 차가워 온기가 없다’ ‘역시 기계적인 소리다’ 라는 푸념이 많다. 그렇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비싸고 우수한 성능의 오디오시스템일지라도 인간의 발성, 또는 땀을 흘리며 연주하는 실연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디오란 어차피 전자기계적인 재생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인에 따라서는 오디오를 통해 실연에서 느끼지 못한 음악적인 감동을 느끼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음악적인 감상 및 이해란 결과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음악이 만들어내는 청각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다. 음악이 지닌 아름다움은 인간의 심신을 편안하게 만드는가 하면, 미적 감정을 고조시켜 심리적인 포만감을 느끼게 한다. 심리적인 포만감이란 일종의 심적인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환상에 취해 마음이 평온해지고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상황이야말로 음악적인 카다르시스의 증표이다.

이처럼 ‘음악적인 감동’을 느끼는 데는 굳이 실연이 아닌 오디오 재생음악만으로도 가능하다.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오디오 기기를 잘 조합하면 ‘음악적인 감동’을 맛보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오디오는 지극히 사적인 취미여서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즉 심미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마니아에 따라서는 아주 값싼 기기로도 충분히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다. 다시 말해 하이엔드에 대한 선망이 없다면 중급 이하 수준의 오디오시스템만으로도 충분히 음악적인 열락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오디오 기술은 크게 탓할 수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은 재생음악을 들려주는 까닭이다.

실제로 하이엔드 경험이 많지 않은 음악애호가일수록 음악적인 만족감이 클 수 도 있다. 다시 말해 하이엔드를 듣지 않고, 하이엔드에 대한 환상이 없으면 그 자체로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불만이 없다. 실제로 1950년대 전후의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며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다. 오디오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 자체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엔드 오디오가 출현하면서 오디오마니아들은 음악 자체보다는 소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하이엔드는 궁극적으로 음악을 좀 더 아름답게 재생하기 위한 기술적인 진보를 목표로 한다. 그러기에 하이엔드는 실제의 연주에 필적하는 재생음악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분석적이고 섬세한 소리의 성향으로 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차가운 경향의 소리가 되었다.

오랜 동안 오디오로 음악을 즐겨온 경험이 많은 세대는 현대의 오디오는 너무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가다보니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성’이 결여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이엔드는 기계적인 완성도에만 의존하다 보니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이엔드는 확실히 실제의 연주로 착각하게 만들만큼 사실적인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분석적이어서 재미가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음악에 재미가 없다는 말은 차갑다는 느낌과 가까울 수 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음악은 때로는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분석적인 소리에 홀린 나머지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놓친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재미있는 음악, 즉 음악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음악성’이 있는 음악이란 무엇일까. 음악에서 말하는 ‘음악성’이란 달리 표현해 ‘음악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 음악은 ‘음악성’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연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곡일지라도 연주가 일정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해석의 차이에 의해 아름답지 않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음악성’, 즉 ‘음악적인 아름다움’이란 연주의 질적인 수준에 관한 문제임을 말해준다. 아름다운 연주에는 기술과 해석, 그리고 창의성이 요구된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으면 연주에 무리가 없어 자연스럽게 되고, 악곡에 대한 해석 및 창의성에 의해 음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결국 ‘음악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문제는 연주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연주는 음악의 고저장단의 조합 및 배치 그리고 감정표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순전히 연주자에게 달린 문제이다. 물론 작곡가는 악보에다 연주의 빠르기 및 감정표현을 지시하지만, 실제로 연주할 때의 템포와 강약 및 감정표현을 조절하는 것은 전적으로 연주자의 소관이다. 다시 말해 연주라는 것은 해석 또는 감정표현 및 창의적인 문제인 것이다. 감정표현을 제외한 템포가 어떤 빠르기로 진행되며, 또 어떻게 강약의 변화를 조절하느냐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음악이 되는 것이다.

‘음악성’이 있는 연주냐의 여부는 다름 아닌 연주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연주자는 연주를 하기 전에 악곡에 대한 해석을 통해 어떤 식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결정하지만, 실제의 연주에서는 감정의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동일한 곡일지라도 연주자에 따라 연주 시간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은 몇 사람의 연주를 비교해 들으면 금세 알 수 있다. 연주 시간의 길이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이 연주자의 해석 및 감정의 흐름에 따라 ‘음악성’ 즉, ‘음악적인 아름다움’ 여부가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회화에서 말하는 ‘회화성’ 또는 ‘작품성’이라는 용어도 ‘음악성’과 다르지 않다. 회화의 ‘회화성’ 또는 ‘작품성’이란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여부를 의미한다. 달리 말해 예술작품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일단 창의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독자적인 조형성 여부가 중요한 문제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일지라도 거기에 독자적인 조형성, 즉 개별적인 형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별적인 형식은 창의성의 소산이다. 창의성이란 전인미답의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조형적인 요소를 어떻게 조합하고 배열하느냐의 문제가 다름 아닌 조형적인 해석이다. 그 조형적인 해석은 일단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통한 미적 감동을 야기할 것을 목표로 한다. 감동이야말로 예술로서의 순기능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렇다. 감동은 아름다움에 대한 전적인 동의이자 굴복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회화의 ‘회화성’이나 음악의 ‘음악성’이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순전히 화가나 연주자의 창의적인 해석의 문제이자 그 결과이기에 그렇다. 여기에서 창의적인 해석은 타고난 미적 감수성과 더불어 기술적인 완성도 그리고 심미적인 깊이와 연관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림그리기나 음악연주의 창의성은 예술성을 담보로 한 주관적인 해석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 ‘회화적인 아름다움’ 또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개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감동이란 달리 표현하면 예술작품과의 소통이자 교감이며 감정이입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 없으면 감동이 있을 수 없다. 소통에는 감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음악성’은 감상자와의 소통에 의해 성립되는 감동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음악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승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디오가 만들어내는 재생음악에도 ‘음악성’의 문제를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인 답은 일본 오디오평론가 스가노 오키히코가 제안한 ‘레코드 연주’라는 함축적인 용어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레코드’를 ‘연주한다’는 말은 어법상 맞는 말이 아니다. ‘연주한다’는 것은 악기를 직접 다루어 음악을 들려주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실연을 저장한 레코드를 통해 재생음악을 듣는 행위는 단지 ‘레코드를 듣는’ 것일 뿐, 연주는 아니다. 그러므로 ‘레코드’를 ‘연주한다’는 말은 올바른 언어 사용이 아니다. 그런데 스가노는 왜 ‘레코드 연주가’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실연에서 연주자의 개성에 따라 음악적인 감동이 다르듯이 오디오 음악 또한 오디오 기기의 조합에 따라 서로 다른 분위기의 음악이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분위기’란 실제의 연주에서 해석의 차이, 기술의 차이, 표현감정의 차이가 생기듯이 오디오 재생음악도 오디오 기기를 조합하고 조작하는 마니아의 감각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연주자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의 음악이 만들어지듯이 오디오를 통한 재생음악 또한 다양한 표정이 만들어진다.

무엇보다도 오디오는 소스에서부터 앰프 스피커는 물론이려니와 전기를 공급하는 전원을 포함하여 파워케이블, 인터케이블, 스피커케이블 등의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소리의 성향을 좌우하는 변수가 무수히 존재한다. 이들 기기 및 액세서리를 어떻게 선택하고 조합하며 조작하느냐에 따라 소리의 성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는 레코드를 듣는 과정 자체를 연주자의 연주행위에 비유하여 ‘레코드 연주가’라는 용어를 만들어 부르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디오마니아라면 누구나 기기의 조합 및 조작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순전히 음악을 듣는다는 취미생활의 일환이지만 소리에 심취하다보면 점차 좀 더 나은 수준의 소리를 원하게 된다. 좀 더 나은 수준이란 하이엔드를 의미한다. 하이엔드는 언급했듯이 ‘깨끗하고 차가운’ 경향의 음질 성향을 나타낸다. ‘깨끗하고 차가운’ 하이엔드의 음질은 재생음악 자체를 그러한 성향으로 들려준다. ‘깨끗하고 차가운’ 음질 성향은 보다 분석적이면서도 해상력이 높은 소리를 뜻한다. 분석적이고 해상력이 높은 소리는 사실적인 경향의 음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적인 경향의 음질은 다름 아닌 실연에 육박하는 소리일 수 있다. 실제로 잘 조합된 하이엔드를 들으면 실연을 듣고 있는 듯싶은 착각에 빠져들 때도 없지 않다.

하이엔드 오디오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하이엔드는 콤팩트디스크의 시판과 때를 같이한다. 콤팩트디스크, 즉 CD는 LP에서 발생하는 잡음과 음의 왜곡 등 청각을 피로하게 만드는 문제점을 해결한 디지털 기술의 결정체다. 따라서 LP와 비교해 CD는 한층 섬세하고 깨끗한 재생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LP를 재생하던 기존의 오디오 기기 자체의 결함이 드러나는 상황이 되었다. 소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재생장치인 오디오 자체의 결함이 더 큰 문제임을 알게 된 셈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공관 오디오를 포함하여 트랜지스터 오디오에 대한 보다 깨끗한 재생음악을 위한 기술적인 진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하이엔드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하이엔드 이전의 재생음악, 즉 LP는 잡음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음악애호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단지 듣고 싶은 음악을 아주 간편하게 그리고 횟수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열광했다. 그러므로 오디오기기의 품질 수준을 따지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 어떤 재생장치로도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의 오디오는 진공관 앰프와 페이퍼 콘지의 스피커가 전부였다. 아주 낮은 출력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비록 실제의 연주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좋아하는 음악을 무한정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이때의 대다수 오디오 기기가 재생하는 주파수는 15,000 헤르쯔 정도가 상한선이었다. 이는 지금의 상황에서 볼 때 중역 중심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목소리가 중역대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오디오의 소리는 가장 편안하게 들렸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하이엔드는 20,000헤르쯔를 훌쩍 넘는 광대역으로 음역을 확장하게 된다.

이처럼 광대역의 하이엔드는 중역에 밀집된 소리를 엿가락 늘이듯 늘여 전체적인 음의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중역 중심으로 들어온 기존의 감각으로는 다소 살집이 빠진 듯싶은 소리를 들려주게 된다. 즉, 평탄한 주파수 특성을 갖게 된 하이엔드는 전체적인 음역의 밸런스 또한 좋아지게 만든 것이다.

오디오에 대한 연륜이 많은 분들은 대체로 중역에 익숙해진 청취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현대의 하이엔드 소리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마니아들 가운데는 중역을 중심으로 한 재생음악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초광대역의 시스템을 들으면서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투정도 중역에 익숙해진 감각 탓일 수 있다. 문제는 이들 광대역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마니아들 가운데 일부는 하이엔드가 재생하는 음악에는 ‘음악성’이 없다는 시각에 동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주관적인 이해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광대역에 익숙해 있는 마니아들이 느끼는 ‘음악성’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점을 말해준다.

물론 저출력 진공관 앰프에 능률 좋은 풀 레인지로 듣는 지난 날 오디오 음악에는 확실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포근함이 있다. 비록 해상력이 무디고 왜곡이 많은 소리일지라도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 때 오디오 청취 여건이 그랬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이엔드와 직접적으로 비교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얘기일 뿐이다. 극명한 해상력과 분석적인 성향의 소리에다가 연주자의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포착하는 사실적인 표현의 하이엔드 재생음악이 품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음악성’, 즉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음악성’이란 용어는 개념적인 것임과 동시에 실제적인 것이다. 어떤 특정의 소스를 놓고 마니아에 따라 ‘음악성’이 있는 연주라고 느끼는 반면, ‘음악성’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특정의 하이엔드 시스템이 재생하는 음악을 들으며 ‘음악성’이 있다고 느끼는 마니아가 있는데 비해 ‘음악성’이 없다고 느끼는 마니아가 있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음악성’에 대한 평가란 실연이든 재생음악이든 감상자의 몫일 따름이다. 동일한 음악, 동일한 청취환경에서도 듣는 음악일지라도 음악에 대한 지식 및 이해 그리고 미적 감각 및 심미적인 깊이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성’이 뛰어난 명연주라는 평가를 받은 소스일지라도 오디오시스템에 따라 ‘음악성’이 결여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여러 가지 특성이 다른 오디오 기기의 조합에 따른 변수 때문이다. 결국 오디오에서는 명연주를 담은 음원이든 그렇지 못한 음원이든 다만 충실히 재현하는, 즉 최초의 연주상황을 왜곡 없이 들려줄 수 있는 기기의 조합이 이상적이다. 실연에 육박하는 사실성으로 무장한 오디오시스템이야말로 객관적인 평가기준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오디오 음악에서 ‘음악성’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어느 정도 음악적인 소양 및 이해 그리고 경험이 있는 감상자라면 연주에 따라 ‘음악성’ 여부는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오디오 재생음악에 관한 한 절대다수가 지지하는 객관적인 평가일지라도 오디오마니아 개개인의 취향에는 별다른 구속력을 행사할 수 없다. 아무리 고가의 하이엔드 시스템일지라도 그 소리 성향이 너무 차가워 음악에 빠져들 수 없어 교감하기 어렵다는 마니아라면 ‘음악성’이 없다고 치부할 것이다. 반면에 그처럼 차가운 성향의 재생음악에 오히려 흔쾌히 빠져들면서 행복해 하는 마니아가 있다고 한들 ‘음악성’이 없는 시스템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절대다수의 마니아가 싫어하는 소리인데도 그 소리를 좋아하는 마니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오디오 재생음악에서 말하는 ‘음악성’은 개인적인 취향을 포함하여 음악적인 소양 및 이해 그리고 미적 감수성에 의해 평가될 수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오디오의 ‘음악성’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기준은 있을 수 없는지 모른다. 오디오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사적인 취미의 영역이기에 그렇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