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펜보이 2008. 8. 14. 23:09


컴퓨터그래픽과 변형 및 왜곡의 미


신항섭(미술평론가)



시대는 예술가를 만들고 예술가는 시대를 변화시킨다. 인상주의 이전의 예술가는 스스로의 재능에 열정의 불꽃을 피웠다면, 그 이후에는 시대감각이 예술가의 재능을 일깨워 주는 상황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통의 발달로 인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세상에 대한 경험의 폭을 넓히면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의 미적 감수성으로 응답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 인해 미술가에게는 이전에 억제되었던 내적인 충동, 즉 세상에 반응하는 미적 감수성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무한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미술가에게 주어지는 표현의 자유란 자기혁명의 계시나 다름없다. 따라서 인상주의 이후 완성도 높은 완고한 손의 기술, 즉 숙달된 재능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감수성이 마침내 표현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조형적인 상상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었다.

재현의 울타리 안에서 풀려난 미술가들은 당연히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에 열광했다. 그 열광은 창작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외부적인 그 어떤 간섭이나 구속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미술가 개인의 감수성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 표현에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학습에 의해서든,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든 조형적인 요소를 조합하여 그 최적의 조건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구에 직면했다.

이는 심미와 결부된 조형방식이다. 추상은 물론이려니와 형태의 해체를 통한 재해석, 즉 변형이나 왜곡의 과정에서도 최상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최상의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닌데다가 창작의 윤리성, 즉 작품마다 새로워야할 뿐더러 최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는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창작의 자유를 얻은 대신에 그에 따른 창작의 고통은 더욱 커지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조형적인 변혁의 과정을 통해 20세기 미술의 지평은 무한히 확장되었다. 20세기 미술이 거둔 성과는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다.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감수성에 기반을 둔 조형적인 상상 및 감각의 결실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술은 과학과 만남으로써 보다 다채로운 얼굴로 놀라운 변신을 하게 되었다. 순수한 인간의 지적활동 및 신체적인 기능에 의존해온 미술의 개념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순수미로 요약되는 미술의 본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가 재고되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변화를 유도하고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미술가의 몫으로 여겼다.

그런데 비디오아트의 등장은 예견된 상황과는 달리 형태의 재해석이란 문제와 관련해 인간의 지적활동, 즉 상상력을 둔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전자기술의 조작만으로 전혀 예기치 못한 형태의 변형 왜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과 직면한 것이다. 전통미학에 충실해온 이제까지의 관점과는 사뭇 다른 아주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과학이 미술이 되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전통적인 미학개념을 부정하는 일이었기에 그렇다. 과학에 종속되는 미술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렇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과 미술의 만남은 미술의 지평을 확대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미술가들은 머지않아 이러한 전자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기술을 익힘으로써 형태의 재해석, 즉 왜곡 및 변형에 따른 주도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전자기술의 도입과 응용은 인간의 지적능력 및 상상력을 초월하는, 새로운 표현이라는 신대륙의 꿈을 가능케 해주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전자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게 되었다. 조형과 관련된 인간의 지적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 것이다. 형태를 보고 그를 재해석하는 방법에서도 보다 새로운 감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즉, 개인의 타고난 미적 감수성이나 또는 교육적인 효과로서의 조형감각과는 다른 시각이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인간의 조형감각이란 손의 기능과 보조를 맞추는 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를 아날로그 사고방식 및 조형어법이라고 한다면, 전자기술의 개입으로 유도되는 새로운 조형적인 가치체계를 디지털적인 사고방식 및 조형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젊은 미술가들은 디지털문화와 동숙한다. 젊은 미술가들은 아날로그적인 사고체계보다 디지털적인 사고체계에 더 능숙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은 물론이려니와 창작활동과 관련해 디지털적인 사고를 작동하는 데 능숙하다. 반면에 손의 기능에 충실한 아날로그적인 입장을 경원하게 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디지털적인 사고에 더 익숙해져 있다. 젊은 미술가들의 삶과 창작활동은 어느새 디지털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하여 젊은 미술가들의 작업 가운데 이미 적지 않은 부분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인 디지털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작업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회화 및 조각의 영역에서도 간접적인 디지털의 영향을 의심할 수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우리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증대된 디지털의 영향력은 전통적인 아날로그 영역마저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상황에서 아날로그가 더 우월하다거나 디지털이 가볍다는 식의 논쟁 또한 의미가 없다. 디지털은 바로 현대인의 생활이자 삶의 도구이며 수단이기 때문이다. 삶과 유리된 미술 또는 예술은 결코 감동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디지털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인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비디오 아트는 논외하고라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미술은 아주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디지털페인팅은 그 상징적인 예에 불과하고, 전자기술을 이용하는 매체 작업과 영상작업,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미디어 아트는 모두 디지털의 영역이다. 오늘날 전자기술 또는 디지털과 관련된 미술을 빼고 나면 현대미술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 새삼 놀랄 정도이다. 알게 모르게 디지털 관련 미술이 현대미술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평면회화에서도 디지털 기술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적극적인 표현수단이 되고 있다. 디지털 사진을 확대하여 그 위에 묘사를 첨가하는 형식의 일부 극사실적인 회화는 가장 빈번하게 응용되는 디지털 표현방식이다. 사진보다 더 극명한 사실성을 통해 충격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이런 유형의 평면회화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상은 역시 디지털문화의 소산이다. 디지털사진을 확대하여 별다른 가공 없이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작품을 보면서 예술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투정에 불과하다. 시대감각이 그렇게 만들었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그랬듯이 캔버스 위에 프린트된 디지털 이미지의 직접적인 제시를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은 시대감각을 애써 외면하는 소치이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기술이 만능이어서 미술 전반을 지배하리라 예측하는 것은 무리다. 다시 말해 디지털은 미술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의 미술표현이 이전보다 덜 중요시되고 있다는 느낌이긴 해도, 그 본래적인 가치가 퇴색하거나 존재가치 자체를 의심받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기술이 현대미술 전반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을 너무 절망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시대감각이라는 것은 변덕스러운 것이어서 어느 한 가지 현상(표현양식)에 오래 경도되는 일은 없기에 그렇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디지털기술이 만능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머지않아 싫증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에 마치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이 불현듯 아날로그로 회귀하면서 디지털을 미련 없이 내팽개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아니 이런 예상은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반동과 자기부정의 연속이었던 20세기 현대미술이 걸어온 자취를 보면 보다 명백해진다. 아무리 열렬한 지지를 받은 표현양식일지라도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면 곧바로 자리를 물려주었듯이 미술에서 영원한 제국은 있을 수 없다. 모름지기 창작의 윤리성 또는 미술의 역사란 반동과 자기부정 또는 자기변신의 연속일 따름이다.

최근 미술계 내부를 들여다보는 가운데 한 가지 새로운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디지털미술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실에서 한편으로는 아주 조용히 아날로그기술이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개념의 아날로그기술, 즉 숙달된 기능적인 손의 기능에만 의탁하는 형태는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로이 손의 기능성을 회복하는 데는 공교롭게도 디지털기술이 적용되고 있기에 그렇다. 어찌 보면 이를 두고 진정한 의미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화합 및 조화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날로그 영역을 부지불식간에 점유해 들어온 디지털이 돌연 아날로그에게 화해의 손짓을 하며 보다 광활한 조형의 세계를 암시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아날로그에 화해의 손짓을 건네는 것은 디지털 기술을 상징하는 컴퓨터그래픽이다.

컴퓨터그래픽은 디지털 기술의 총합체이다. 수만 년 전에 죽은 공룡을 되살려내는가 하면, 전설 속의 용을 현실로 데려오고, 공상과학을 현실로 착각하도록 만든다. 이는 순전히 컴퓨터그래픽의 개가이다. 상상으로서나 가능했던 일들이 삼차원의 현실적인 공간감을 통해 우리들 생활 속으로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컴퓨터그래픽은 가상의 세계일 따름이다. 오락물로서의 재미를 겨냥한 공상과학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미술에 응용되는 컴퓨터그래픽은 그 이미지가 아주 온건할 뿐더러 시지각을 자극하여 말초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오락거리와는 다른 심미 가치를 추구한다. 미술에서 응용되고 있는 컴퓨터그래픽은 전통적인 미의식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면서 조용한 혁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화려한 시각적인 이미지로 미술애호가들의 시선을 현혹하는 비디오아트 또는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아트 역시 디지털의 영역에 속한다.

컴퓨터그래픽은 전적으로 디지털기술에 의존한다. 물론 그 기술을 조종하는 것은 아날로그의 사유체계를 지닌 인간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손의 기술은 이지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지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손의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그 신체적인 리듬을 제어하는 정신 및 감정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감정은 신체의 리듬을 타고 작품 속으로 부지불식간에 스며드는 까닭이다. 반면에 디지털기술을 적용한 컴퓨터그래픽은 명령어가 지시하는 이미지만을 만들어낼 수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까지의 디지털 기술로는 인간의 감정을 정확히 받아쓰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컴퓨터그래픽의 운영체계에서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개발로 말미암아 인간의 조형감각을 초월하는 새로운 개념의 조형적인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형태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형 및 왜곡의 경우 컴퓨터기술의 응용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그래픽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형태에 관한 변형 및 왜곡의 경우 전적으로 미술가의 개별적인 비례감각에 맡겼다. 그러기에 개별적인 형식은 대체로 독자적인 비례를 통해 성립되기 마련이었다. 가령 신체를 비정상적으로 늘이거나 특정 부위를 강조함으로써 실제의 형태를 벗어나면서도 아름다운 인물을 창조할 수 있었던 모딜리아니의 경우, 순전히 개인적인 비례감각의 소산이다. 이는 여지없이 아날로그 감각 및 기술의 산물이다.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소수의 작가들은 이와 같은 독자적인 비례를 찾아내는데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응용하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컴퓨터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심증이다. 다시 말해 형태를 변형하거나 왜곡하는 과정에서 ‘늘이기’ 또는 ‘줄이기’ 따위의 컴퓨터그래픽의 소프트웨어 기술을 적용함으로써 기괴한 형상을 얻고 있다. 또한 입체작업의 경우에는 물체의 형태를 특정 방향으로 찌그러뜨림으로써 변형 및 왜곡하는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확실히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형태의 변형 및 왜곡의 방법이다.

물론 이와 같이 새로운 개념의 조형어법을 구사하는 미술가들은 직접적으로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적용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직접적으로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특정 방향이나 특정 부위에 규칙적인 조형어법에 의한 변형 및 왜곡의 조형적인 질서를 만들어냈다면 이는 결코 아날로그 사고의 결과는 아니다. 왜냐하면 컴퓨터그래픽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이와 같은 규칙적인 형태의 변형 및 왜곡의 조형어법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조형의 질서는 명령어에 따르는 컴퓨터그래픽의 충실한 기능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적어도 예상되는 형태의 변형 및 왜곡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작가의 미적 감각에 의해 도출된, 예상되는 또는 의도적인 변형 및 왜곡의 공식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딜리아니의 경우는 비록 정확한 치수를 기반으로 하지 않을지라도 나름대로의 조형적인 질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통일성일 따름일 뿐 정확한 치수개념의 규칙성과는 다르다. 이에 비해 컴퓨터그래픽은 동일한 명령어를 반복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써 일정한 조형적인 질서가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정확한 치수를 만족시키는 규칙적인 변형 및 왜곡의 공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컴퓨터그래픽 기술에 의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되는 작품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마디로 형태의 재해석과 관련한 아날로그적인 변형 및 왜곡의 미학과는 다른 미적 쾌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태를 어느 한쪽 방향으로 길게 늘이거나 줄이는 방식의 평면작업은 물론이요, 특정 부위에 압력을 가해 납작하게 누른다거나, 늘이고 비트는 따위의 입체작업은 확실히 기존의 조형적인 해석과는 다른 시각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거기에는 예상하지 못한 비정형 또는 기형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어찌 보면 기괴한 형상인데도 심미와 관련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그 새로운 변형 및 왜곡의 방식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조형적인 질서가 만들어지고 시각적인 즐거움 또는 쾌감이 자리한다. 순연한 미적 질서는 아닐지언정 정형을 깨는 데서 오는 미묘한 미적 감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개념의 변형 및 왜곡의 미를 수반한 창의적인 제안은 최근 한국미술계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경향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아직 이러한 조형어법을 구사하는 작가들이 소수에 불과해 새로운 경향, 또는 표현양식으로 안착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컴퓨터그래픽이 우리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현실을 볼 때, 의식적으로 이를 배제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하나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신세대의 미술가들은 컴퓨터그래픽에 대한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그래픽이 미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더구나 이처럼 컴퓨터그래픽의 조형어법을 구사하는 작가들의 작품 자체에서 디지털적인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비록 표현수단으로서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응용하기는 하되, 그 결과물로서의 작업은 전적으로 손의 기술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통제는 작가의 조형적인 상상력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조형적인 상상은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통해 예상되는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손의 기술은 그를 실제의 작업에 반영한다. 그러고 보면 컴퓨터그래픽의 기술이 직접적으로 응용되는 과정은 어디까지나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 머물 따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가상의 세계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발동된 의도적인 형상을 구체화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말한다. 일단 평면이든 입체든 작업으로 구체화되면 가상의 세계가 돌연 현실세계로 변환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컴퓨터그래픽은 작업으로 현실화되기 직전까지의 과정에만 관여할 따름이다. 그 나머지 실제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작업과정은 손의 기능에 의탁하게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일은 컴퓨터그래픽이 제공하는 변형 및 왜곡의 이미지가 아주 정교하다는 점이다. 명령어를 정확히 수행하는 컴퓨터그래픽의 특성을 그대로 닮은 것인지, 평면이든 입체든 작업은 대단히 정교한 손의 기술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비록 형태의 변형 및 왜곡이라는 방법을 구사하지만, 그 변형 및 왜곡의 이미지는 정확한 치수개념을 충족시키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대체로 사실적인 묘사방식을 따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이지적이다. 일단 나름대로의 논리적이고 이지적인 조형의 규칙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규칙성이 적용되는 사실적인 이미지임에도 결코 따분하다거나 지루하지 않음은 물론 구태의연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세련된 미적 감각이 구사되고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아날로그 시대의 변형 및 왜곡은 작가에 따라 조형적인 미의 편차가 컸다. 고도의 미적 감각을 구사하는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극적인 세련미를 보여주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에는 미적 가치에 대한 평가 자체를 논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 컴퓨터그래픽의 기술을 응용하거나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손의 기술이 미숙하거나 세련된 미적 감각을 갖추지 못하면 결코 기대하는 변형 및 왜곡의 미를 실현할 수 없다. 컴퓨터그래픽이 만들어내는 왜곡 및 변형된 형태해석 그 자체가 곧바로 미적 가치, 즉 예술성으로 변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적 가치란 작가 개인의 미적 감수성과 손의 기술, 그리고 미추를 분별하는 미적 안목에 의해 결정되는 까닭이다. 설령 새롭고 기발한 변형 및 왜곡의 조형적인 질서를 찾아냈다고 할지라도 그를 세련된 조형미로 변환할 수 있는 재능 및 미적 감각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만능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효율적이고 또 예술적인 가치에 부응하는 작업으로 변환하는가의 문제는 작가의 타고난 감수성 및 재능 그리고 남다른 미적 안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최근의 소수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일련의 컴퓨터그래픽에 기초한 새로운 방식의 조형어법은 시대감각에 부합한다. 그러기에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거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미 몇 작가는 미술계 및 미술애호가들로부터 주목받으며 미술시장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물론 미술시장의 진입이 단순히 상업적인 판단에 그친다면, 이런 식의 논의 자체가 일과성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그래픽과 연관성을 가진 새로운 경향의 작업은 충분히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미학적인 성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더구나 그것은 현대라는 시제에 합당한 새로운 조형개념으로서, 디지털문화의 한 속성으로 파악되고 있기에 그렇다.

          

<이 글은 2008년 9월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한국국제아트페어' 세미나 (22일<월> 오후 5시, )원고입니다>


김경렬 작품

 



         

 

 



이환권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