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이야기

펜보이 2008. 12. 26. 07:03

심야에 만나는 베토벤

 

신항섭(미술평론가)

 

음악을 즐기는 이에게 오디오와의 만남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음악회 위주의 실연을 즐기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오디오에 대한 관심은 결코 외면할 없는 일이다. 오디오는 시공을 초월하여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까닭이다. 그렇다.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데 오디오만큼 확실한 방법은 달리 없다. 음악 애호가들에게 혼자만을 위한 콘서트를 가능케 해주는 오디오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다.

오디오는 기기의 조합에 따라 천차만별의 재생음악을 들려준다. 그러기에 일단 오디오에 발을 들여놓으면 보다 더 아름다운 재생음악, 보다 더 짜릿한 소리를 찾아다니는 흥미진진한 고행(?)의 길이 시작된다.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만을 듣는데 만족한다면 소형 스테레오 시스템으로도 부족하지 않다. 전자과학의 눈부신 발달은 오디오로 하여금 인간의 귀로는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왜곡 없는 재생음악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디오마니아들은 그 정도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는다. 자신의 음악실에서 실제의 연주를 듣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콘서트홀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오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실연과 재생음악은 근본적으로 동일시할 없는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실제로 일정한 수준에 이른 오디오 시스템으로 음악을 듣다보면 너무도 선명한 음질은 물론이거니와 악기의 위치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공간적인 표현에 깜짝 놀라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런 정도의 재생음악을 듣게 되면 비록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에 불과할지언정 능히 혼자만의 콘서트홀에 대한 욕망을 해소시켜줄만 하다고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오디오마니아는 대다수가 그 정도의 오디오시스템을 갖추고도 만족하지 못한다. 좀 더 나은 소리가 있으리라는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되는 오디오 편력의 여정에 몸을 싣게 된다.

귀로 듣는 소리에 대한 기억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명연주라도 듣는 순간뿐이다. 물론 감동의 여운이 긴 경우 정서적인 만족감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음악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여 점점 더 가물거릴 따름이다. 음악은 듣고 있는 순간이 지나면 홀로그램처럼 말짱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디오를 통한 재생음악에 집착하게 되는지 모른다.

지난 반년 동안은 일도 바빴지만, 오랜만에 오디오와 소원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집안 분위기 때문에 큰 음량으로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여러 날 오디오에 불 지피는 것도 잊고 지내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오디오에 대한 관심저하가 음악에 대한 관심저하로 이어졌던 셈이다. 생각해 보니 음악을 듣지 않아도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열중했던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음악 이외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은 또 다른 형태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어서 음악이 잠시 귀에서 멀어져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래도 음악 듣는 일로부터 완전히 절연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디오와 멀어짐으로써 음악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한다는 습관적인 태도에서 진일보, 심미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음악에 빠지다 보면 그 아름다움에 황홀해한 일이 적지 않다. 도대체 그처럼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낸 이는 누구며, 그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이는 누구인가 라며 감탄하고 감격했다. 정신 및 감정을 몰입하도록 이끄는 음악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 즉 예술적인 가치가 아닐까.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자연히 몰입적일 수밖에 없다. 주변에 신경 쓸 일 없이 오직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몸과 마음이 음악에 반응하는데 필요한 음량은 옆방에 있는 사람을 방해할 정도가 된다. 그 정도가 돼야만 실제의 연주장에서 느끼는 감흥에 근접할 수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을 부유하는 미세한 기척이나 공기의 움직임, 즉 암소음까지도 감지할 수 있어야 흥이 나는 까닭이다.

현주회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정도의 하이엔드 시스템을 갖추게 되면, 음악에만 몰입할 수 있다. 하이엔드 시스템에서는 때로 연주회장에서 듣는 것보다 더 짜릿한 음악적 쾌감을 맛보는 일도 없지 않은 것이다. 정확한 음악의 전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디오음악은 실제연주보다 더 사실적으로 들리는 경우도 흔하다.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음반의 경우 마치 연주현장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사실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관현악이나 재즈의 경우에도 악기의 분류에 따른 연주자의 위치 파악이 가능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마니아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막연하게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춘 오디오시스템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오디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지난 몇 개월 동안 작은 음량으로 듣는 방법을 배웠다. 잘 아는 마니아로부터 ‘한 밤중에 음악을 들어보라’는 권유를 받고 시작된 일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뭐 새로울 것도 없는 말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라면 심야에 음악을 듣는 일은 흔히 있기에 그렇다. 그 오디오마니아가 말하는 의미는 ‘한 밤중에 음악을 들으면’ 들리지 않던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고, 평소 부족하다고 느꼈던 음질이 의외로 생생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소음이 우리의 청각으로부터 미세한 음의 표현을 차단하는데, 심야의 음악 감상은 그런 외적인 방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뿐만 아니라 심야에는 전기사정이 좋아지므로 충실한 전원에 의해 오디오의 성능이 향상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지 큰 음량으로 듣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보니, 그 말에 솔깃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그냥 늦게까지 습관적으로 듣는 것과 의식적으로 심야에 듣는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리라 싶었다. 그래서 모두가 잠든 심야에 음악을 듣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보니 생활의 리듬이 깨져 낮잠을 자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으나, 진정 음악에 대한 심미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기대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독주곡은 그렇다 치고 삼중주나 사중주 따위의 실내악을 들으면서 비로소 악기 하나하나에 대한 보다 명석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특히 현악삼중주의 경우 서로 다른 세 개의 악기가 저마다 고유의 음역에서 자기만의 발성법을 통해 화음을 이루는 과정이 얼마나 극적인 재미를 주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듯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절묘한 화음에 혀를 찬 일이 적지 않았다.

세상이 정적 속에 빠져들고 내 자신의 숨소리까지도 의식하게 되는 시간에 작은 음량으로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느낌의 음악적인 황홀경이었다. 악기 하나하나가 분리되어 들린다는 것은 집중의 효과이기에 새로운 체험은 아니다. 그런데 작은 음량으로 집중해서 듣는 과정에서 음악이란 새삼 연주자에 의해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악기 자체의 능동적인 울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물론 연주자 없이 악기 스스로 음악을 들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악기 자체의 능동적인 울림이란 연주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이끄는 상황, 즉 연주자를 의식하지 못한 채 오직 음악 자체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을 뜻한다. 연주자가 존재하지 않는 음악, 그것은 확실히 새로운 체험이었다.

임장감이 뚜렷한 하이엔드 시스템, 즉 핀 포인트를 맞춘 정교한 세팅을 하게 되면, 스피커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럴 경우 눈을 감으면 마치 실제의 연주회장에 와 있는 듯싶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스피커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음악에만 빠져들 수 있다. 더불어 비로소 음 하나하나 또는 선율의 아름다움에 희열을 맛보게 된다. 스피커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과, 연주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마디로 연주자를 의식하지 못함으로써 곧바로 작곡가와 교감할 수 있었다.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재생음악이라는 사실조차도 잊은 채 음악적인 아름다움에 감전되는 황홀한 체험이었다. 그러면서 그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조합해낸 작곡가의 존재에 대해 새삼 경외심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음악을 예술의 대열 속에 자리매김한 작곡가, 혹은 음악을 만든 이는 범상한 존재가 아니다. 아름다움에 감응하려는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자극하고 감동케 하는 음악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것인데, 그 중심에는 음악을 만든 이들이 존재한다. 심야에 듣는 음악을 통해 비로소 작곡가의 존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음악, 또는 소리 그 자체에만 열광한 나머지 작곡가의 존재를 심각하게 의식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의 조합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오직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개화하는 작곡가의 악상에 기인한다. 과연 작곡가, 또는 음악을 만든 이는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아니면 소리의 연금술사든지. 우리가 듣고 있는 아름다운 음악은 인간의 지적사고 및 감수성 그 정점의 산물이다. 그러고 보면 음악은 우리 스스로가 인간임을 확인케 되는 가장 위대한 예술이 아닌가싶다.

심야에 음악을 들으면서 LP를 듣는 일이 잦아졌다. CD에 비해 음이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잡음이 신경을 거슬리게 할지언정 음악적인 표현에서 좀 더 풍요롭게 들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복고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따스함이 있기에 LP를 선택하게 된다. LP를 선택하는 데는 작곡가의 존재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그의 영혼과 미적 감수성에 좀 더 깊이 감응하고 싶다는 욕망이 함께 작용한다.

20여 년 전에 그토록 탐닉했던 베토벤 후기현악사중주(아마데우스현악사중주단, 1963년 폴리도르)가 전혀 새로운 음악으로 다가왔다. 눈물 흘리며 듣던 그 시절의 감동과는 또 다른 희열이 온 몸을 휘감았다. 비록 녹음기술이나 음질에서는 1980년대 이후에 녹음된 여러 사중주단의 연주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베토벤이 구현하고자 했던 음악의 본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전혀 미흡하지 않다. 오히려 기교적인 완성도에 치우치기보다는 베토벤의 음악적인 영혼에 밀착해 들어가는데 집중함으로써 현대적인 해석의 연주와는 다른 뜨거운 느낌을 전한다.

베토벤의 후기현악사중주는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이전의 음악형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과 유연한 흐름이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곡들을 쓸 당시 베토벤은 이미 청각을 완전히 상실, 단지 그 자신의 영혼 깊은 속에서 피어오르는 악상을 받아쓰는 행위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오히려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음으로써 내면의 소리와 만날 수 있었다. 내면의 소리는 저 깊은 쪽에서 들려오는 신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절박함을 통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셈이다.

후기현악사중주의 리듬과 화성은 유장한 강물처럼 막히고 맺히는데 없이 흐른다. 따라서 거기에 몸과 마음을 싣다보면 인간의 미적 감성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 그 밖의 세계를 유영하는 베토벤의 영혼과 조우하게 된다. 정신 및 신체를 억압하는 일체의 외적인 조건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예술가의 영적인 세계는 이미 신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베토벤이 성취한 음악은 절대적인 고독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오직 신과 만날 수 있는 길만이 주어졌을 때 선택의 여지없이 신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모른다.

후기현악사중주는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인 성찰을 유도하는 음악이다. 그 유연한 악상의 전개는 그 어느 작곡가와도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개별적인 세계이다. 기존의 형식적인 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유로움 속에서 호흡의 단절 없이 이어지는 악상은 기교를 초월한 전혀 새로운 형식이다. 귀가 닫힌 세상 그 심연에서 절대적인 고독과 맞서 음악적인 영혼의 불꽃을 피운 베토벤은 후기현악사중주를 통해 마침내 위대한 예술적인 성취라는 장엄한 음악적인 여정을 완결한다. 후기현악사중주를 다시 들으면서 탐미의 즐거움과 함께 베토벤이라는 위대한 음악가의 깊은 영혼의 세계를 탐조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 또한 이전에 미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적인 체험이었다.

이렇듯 심야의 음악 감상은 오디오적인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