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펜보이 2009. 4. 28. 23:01

         

 

 

백성도의 작품세계


자유로운 선의 유희와 풍부한 수사법


신항섭(미술평론가)


회화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선, 즉 형태를 명확히 묘사하면서도 속도감이 느껴지는 선의 유희는 숙달된 인체소묘에서 비롯된다. 빠르면서도 경쾌하고 형태 묘사가 분명한 선은 시각적인 쾌감을 준다. 다시 말해 리듬을 촉발하는 자유로운 선의 유희는 잠재적인 미의식 및 미적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미적 감정을 고조시킨다. 이처럼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미적 감수성과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백성도의 그림에서는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선의 자유로움을 감지할 수 있다. 도무지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전개되는 선의 흐름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수반함과 동시에 세련된 형태미를 보여준다. 날렵하면서도 명료하게 형태에 반응하는 숙달된 손의 기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이렇듯이 형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전개되는 선의 흐름에는 기술의 숙달이 선결조건이다. 형태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기술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면 세련미가 깃들이게 되고 세련미는 곧바로 예술적인 가치를 불러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선이 기술의 완성도를 상징하는 세련미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선의 자유로움은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조형적인 골격이라고 할 수 있다. 숙달된 소묘력은  견고한 조형적인 기반이 되고, 자유로운 선은 형상의 골격으로 작용한다.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미적 쾌감은 숙달된 손의 기술이 불러들인 세련미, 즉 활달하고 미려한 선의 유희에 근거한다. 그의 선은 어느 경우에도 애매하고 모호하게 처리되는 일이 없다. 마치 드로잉 또는 문인화의 필선처럼 일회적인 속성을 지니는 한편, 형태를 형용하는데 도무지 주저함이 없고 명쾌하다. 마치 춤을 추듯 경쾌하면서도 명료하게 전개되는 선의 운용을 보면서 오랜 동안 축적된 손의 기술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실감할 수 있다.

과슈를 재료로 하는 작업에서는 유려한 선의 운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과슈작업은 재료의 특성상 신속성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색채의 순도를 높이고 염려한 발색을 얻기 위해서는 형태묘사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그의 경우 숙련된 필치에 속도감을 실어 물상을 형용함으로써 과슈화의 장점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일회적인 필선이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하면서도 우미한 곡선은 그의 작품세계를 지지하는 조형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꽃이나 과일 따위의 정물화에서 보여주는 유려한 선은 순도 높은 원색적인 색깔과 다시없는 궁합을 이룬다. 혼합을 하지 않은 순색 그대로의 순수한 색채이미지는 염려한 발색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활달하고 신속하게 물상을 형용하는 일회적인 필치는 표현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원숙한 필치에서 오는 호쾌한 붓 자국은 순색과 더불어 새삼 과슈화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처럼 미적 감정을 촉발하는 선의 유희는 인물화에서는 더욱 극적이다. 무엇보다도 인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윤곽선의 흐름을 보면 맺히는 데가 없다. 그 만큼 인물묘사에 익숙할뿐더러 선의 흐름이 매끄럽다. 이처럼 유연한 선의 흐름은 인체해부학에 대한 숙지를 통해 인물의 구조적인 이해가 명석해야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무르익은 손의 기능, 즉 지속적인 소묘 또는 드로잉작업을 통해 심상이 명확한 단계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일이다.

 

 

풍경화에서도 남다른 조형미를 구현한다. 역시 날렵하면서도 두텁고 힘찬 붓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선이 형태를 장악한다. 소재 및 대상을 명료하게 부각시키는 윤곽선은 신체적인 힘을 기반으로 하기에 타협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면서도 강직한 인상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선은 오히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정감이 넘친다. 선 자체에는 힘이 실리지만 붓의 터치를 부드럽게 처리함으로써 온건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부를 생략하거나 단순화시킴으로써 시각적인 이미지는 간명하다. 이렇듯이 풍경화는 강건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겸비함으로써 묘사중심 또는 인상표현을 중시하는 경향의 풍경화와는 다른 차원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독자적인 조형감각이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선묘 중심, 즉 강렬한 윤곽선이 주도하는 그의 풍경화는 수묵산수화 또는 문인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이와 같이 견고한 소묘력과 숙달된 손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기에 표현양식 및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조형적인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기교적인 표현이 요구되는 작업일지라도 망설임이 없이 즉자적으로 대응한다. 어쩌면 사실주의를 비롯해 인상주의, 야수파, 구성주의, 입체파 따위의 다양한 표현양식에 대한 섭렵이 가능했던 것도 자유분방한 필선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최근 그가 주력하고 있는 그리스신화를 제재로 한 일련의 작품은 인물화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형상화한 낯익은 그리스조각이 인물을 대체하는 작업인데, 다양한 이미지의 복합적인 구성을 통해 신화의 신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인물의 형상, 즉 신들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신화와 관련된 이미지들, 그리고 연속무늬 및 추상적인 이미지 따위를 혼용함으로써 보다 현대적인 조형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단순히 신화에 등장하는 조각상 및 장식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징과 은유, 우의적인 이미지로 신화세계의 신비 및 환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부분적으로 덧붙여지는 물감의 두터운 질감표현은 평면회화로서의 도식에서 벗어난 보다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위해 기능한다. 질감표현은 때로 시간의 더께 같은 깊이 및 공간적인 심도를 보조한다. 두터운 질감표현은 오랜 시간의 축적에서 비롯되는 시간의 층, 또는 유채화로서의 밀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질감은 신화를 제재로 하는 작업에서 그 효용가치는 한층 증대된다. 그의 작업에서 고대라는 시공간을 표현하는데 질감의 강조는 아주 적절한 표현기법인 것이다.  

신화의 세계라는 비현실적인 시공간을 뛰어넘어 설득력 있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신화를 현실적인 공간으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그의 예술가적인 상상력은 단순한 신화적인 이미지의 차용에 그치지 않는, 자유정신을 발휘한다. 기존의 신화를 제재로 하는 그림의 대다수가 사실적인 접근 또는 초현실적이거나 환상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에 그쳤던데 비해, 그는 보다 자유롭고 순수한 조형공간을 지향한다. 신화의 내용을 전달하기보다는 신화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보다 확장된 조형공간을 연출하는데 의미를 둔다. 다시 말해 현대적인 미학개념에 합당한 새로운 해석으로 보다 다채로운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의 변주를 체험하게 된다.

 

 

어쩌면 신화적인 소재는 인간이 선망하는 이상적인 공간, 즉 신들의 세계에 편입하고 싶은 욕망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형상은 이상적인 미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스신화나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형상은 어쩌면 이상적인 인물화의 모범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여신들의 형상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의 감정을 고무시키고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비록 구체적인 묘사가 아닐지언정, 여신들의 수려한 용모는 시각적인 즐거움과 감정을 고조시키기에 부족하지 않다. 이는 그의 뛰어난 묘사력에 의해 형용되는 여신들의 형상에는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아름다움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필경 경직된 사고 및 획일적인 일상생활에 갇힌 현대인의 의식세계를 해방시키는데 기능한다. 

어느 면에서 신화를 제재로 하는 그의 작품은 다양한 표현기법을 구사함으로써 단순한 형태묘사 중심의 그림과는 다른 시각적인 체험 및 조형적인 상상의 단서를 제공한다. 수려한 선을 중심으로 하여 두텁게 쌓아 올리는 물감의 중첩효과에 따른 색조의 깊이와 함께 집적된 시간의 층이 감지된다. 따라서 현실적인 시공간을 초월한 신화적인 세계에 잇닿을 만한 시간의 층, 즉 고태가 자리한다.

 

 

그의 작품은 회화성이란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는지 모른다. 형태미를 여전히 미학적인 가치의 중심에 두고 있는 태도가 그러하다.  다시 말해 순수한 손의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확장된 개념의 조형언어 및 어법으로 풍부한 수식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기에 그렇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시각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문학적인 수사 및 상징적인 내용, 그리고 생을 통찰하는 철학적인 사유의 세계를 내포한다. 그러기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포괄적이다.  


<"백성도작품전"은 2009년 6월3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인상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