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현장

펜보이 2009. 9. 25. 21:38

 

 

 

김미경의 작품세계

 

자연미를 겨냥하는 순수한 색채포름

 

신항섭(미술평론가)

 

자연은 모든 예술의 모태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지적인 이해 및 고양된 감정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예술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영감을 행사한다.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인 영감에다 무엇을 가감하는 것은 어쩌면 예술가의 권리인지 모른다. 따라서 자신의 예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 자연으로부터 그 해결책을 얻으려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예술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연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자연을 깊이 통찰하면 예술의 길은 저절로 열리기 마련이다.

김미경은 처음부터 자연의 본질을 탐색하는데 열정을 바쳤다. 단순히 보여지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연을 형성하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조형적으로 풀이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현적인 작업방식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분석과 해체와 조합이라는 조형적인 원칙을 세우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그 자신의 표현감정 및 지적인 성찰에 작업을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작업은 마치 꽃나무가 자라면서 점차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듯이 변주와 변신을 거듭해 올 수 있었다.

 

 

자연은 그에게 일관된 형식논리를 제공하는 조형의 원본이다. ‘정지된 숲’ ‘계절의 끄트머리’(1991) ‘산 이야기’ ‘냇가를 흐르는 바람’(1992) ‘계곡의 늪’ ‘긴 장마’(1993) ‘푸른 계곡’ ‘노란 그림자’(1996) ‘secret thing'(2001) ‘자리-진달래’ ‘자리-모과’(2003) ‘푸른 잎’ ‘숨은 향기’(2005) 등 작품 명제가 시사하듯이 모든 작업은 자연과의 연관성을 가진다. 연관성 정도가 아니라, 자연의 심층에 잠입해 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이다. 보여지는 사실에 국한하지 않고 시각 이외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은 물론이려니와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까지 시야를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는 계절의 변화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포함하여 동식물의 생장 과정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변화까지도 대상이 된다.

자연은 우리가 시지각을 통해 이해하고 있듯이 온갖 물상을 거느리고 있다. 물상의 집합이 곧 자연인 것이다. 자연은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마다 고유의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러나 그는 그 하나 하나의 형태 또는 존재성을 중시하기보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특정의 소재 및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형태를 구체화시키지 않는다. 시지각으로 분별될 수 있는 물상의 구체적인 형태는 비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인 이미지 속에 내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미지 속에서 자연의 형상을 연상할 수 있는 작품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상징적으로 표현되거나 은유되는 일도 있다. 가령 과일이나 열매 또는 나뭇 잎 따위의 이미지를 연상하거나 역추적할 수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특정 형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이미지를 중시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자연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경우에는 화면상의 구성적인 아름다움, 또는 미적 감각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데 집중된다. 그렇다고 해서 시각적인 즐거움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세련된 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까.

이런 경우에는 아름다운 자연물상의 형태 또는 자연의 어떤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성적인 표현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물론 감성적인 부분만이 아닌,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결부된 지적인 해석의 결과로써 제시되기도 한다. 자신이 보고 느낀 자연은 현실의 중계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전의 시간 속에 축적된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기억이란 이미 생생한 현실감을 상실한 채 단지 어느 시점의 정황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형태는 현실적인 이미지로 복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령 객관적인 관찰에 의해 선명한 기억의 판 위에 각인된 상태라고 할지라도 캔버스 위에 나타날 때는 형태는 거의 소거된 채 단지 파편의 조합과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기억이 주관하는 이미지란 대체로 형태보다는 그 정황에 국한하는 것이기 마련이다. 이는 그의 작업이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으로 치닫고 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자연에 대한 그 어떤 형태의 인상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형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다. 분석과 해체와 조합이라는 조형적인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화면은 언제나 생기발랄하다. 적어도 자기복제는 피해야 한다는 조형적인 윤리성에 투철한 까닭일까, 유사한 이미지를 반복하는 일은 없다. 어쩌면 방법론에 심취하는 현대회화에서 자기복제는 달콤한 유혹일 수 있다. 하나의 조형적인 방법론을 고정익과 같이 부동의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마치 특허처럼 자기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이러한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조형적인 원리를 채택했던 것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고정된 이미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한 자연의 존재방식을 차용한 결과, 자기복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된 셈이다. 순환의 법칙을 따르는 모든 생명체는 유동한다. 고정되는 생명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순환한다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지되지 않는 생명의 순환, 그 법칙을 깨닫고 나면 그저 계절이 바뀌듯이 스스로를 그에 맡기면 된다. 즉, 그 자신의 조형적인 사고 또한 내외적인 자극에 의해 부단히 변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1990년대 초부터 오늘에 이르는 작업과정을 보면 일관된 형식논리를 따르는 가운데 부단히 변모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의 작업은 극렬한 보색대비는 물론, 무겁고 차갑고 침울한 기운이 감도는 색채와 현란한 동적인 이미지를 추구했다. 어쩌면 시시각각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는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에 매료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시각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격한 감정반응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형태의 이미지들이 난무하고 있기에 그렇다. 균형잡힌 공간의 구성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듯한 이미지들로 화면은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움이야말로 삶에 대한 열정, 또는 젊음의 열기를 배출하는 통로였는지 모른다.

우주에서 볼 때 지구에 존재하는 상하전후좌우라는 존재방식은 무의미하다. 이런 사실을 의식한 탓인지 화면은 어떤 규칙성에 지배되지 않는 듯한 자유로움으로 넘쳤다. 사뭇 거칠게 전개되는 다양한 표현기법이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자연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형국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미지는 어디에도 규정되지 않는 자발성을 토대로 싱그러운 동적인 공간을 연출했다. 물론 여기에서 자유롭게 흘러가는 유동적인 이미지는 방임된 상태가 아니라, 어떤 틀을 형성하는 내적인 형식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즉흥성이 강조되면서도 과격한 표현을 스스로 통제하는 조형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다가 199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체적인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형식논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자연에 대한 인상을 격정적인 언어로 표출했다면 이 시기에는 좀더 이지적인 접급방식으로 자연을 조응하게 된다. 자연은 이제 관조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행위성이 억제되면서 관념을 실어나르는 조형언어는 순화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색채도 현저히 절제되고 있다. 보색대비와 같은 강렬한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색상의 폭을 줄임으로써 분위기는 가라앉는다.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 찾아드는 정적과 같은 이미지가 화면에 안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색상의 폭이 좁아졌다는 점은 감정적이기보다는 이지적인 태도로 전환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이러한 조짐은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하여, 결코 감정의 과잉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구성으로 이행한다. 동적인 이미지와 정적인 이미지가 균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각적인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관조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인상이다. 전체적인 화면을 보면서 면과 선이 양립하는 구성적인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이 두드러진 변화이다.

 

 

특히 최근 1-2년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표현 가운데 수채화의 선염법과 같은 기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미지는 관념의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물감과 기름과 캔버스의 상호 작용에 의한 물리적인 변화를 주시하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캔버스를 움직여 전체적인 이미지를 주도하는 정도의 역할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이미지는 우연성에 맡기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세련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뿐더러 화면의 한 부분을 장악하면서 비표현적인 공간과의 관계를 주도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이미지는 꽃잎이나 과일 따위를 연상케 하는데, 그 가벼운 이미지 속에 침투하는 공간의 깊이는 시각적인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와 함께 이전의 작업과 맥을 같이 하는, 최근의 작업에서는 한층 견고한 조형적인 형식논리를 구축해가고 있다. 색면으로 처리되는 평면적인 이미지를 강화하면서 채색의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동일색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색을 겹쳐 칠해가는 동안 색채의 층이 형성되는데, 그 치밀함과 깊이 그리고 두터움은 조형적인 신뢰감을 한껏 부추긴다. 특히 평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몇 겹으로 이루어지는 색층은 단층과 같은 형상을 보여주는데 아름답기 그지없다. 색면과 색면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색채의 단층이 지어내는 형상은 세련미의 극치를 이룬다. 색면과 색면이 만나면서 형성되는 선은 일반적인 선묘방식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자연스러움과 깊이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와 같은 평면적인 이미지에 대응하는 동적인 선의 형태 또한 조화로운 이미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평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는 선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표현적인 순수성을 회복하고 있다. 밀도 높은 평면적인 이미지의 깊이와 무게를 해치지 않는 등가의 이미지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선의 움직임 또한 평면적인 색면의 이미지와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데 집중된다. 선묘형식의 동적인 선은 대체로 반복적인 행위의 연속을 지지하면서 때로는 색면의 경계점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나 결코 거칠지 않은 리듬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최근 작업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에 큰 변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감정을 가라앉히면서 지적인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설령 그것이 현재의 시간선상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과거의 시간에 구축한 기억의 편린에 의탁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사유의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시제를 극복할 수 있는 영원성을 획득하겠다는 의지로 이해되는 것이다.

자연은 이제 그에게 사유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자연에 반응하는 감정 및 미의식은 순도 높은 사유의 세계가 지어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이제 거기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연의 이미지와 결부시킬 필요도 없는지 모른다. 이미 자연의 이미지가 소거된 채로 제시되고 있는 세계는 지적인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