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현장

펜보이 2009. 12. 30. 10:46

 

 

 

김규리 작품세계

 

개인 및 사회문제에 대한 예리한 비평적 은유

 

신항섭(미술평론가)

 

서양회화에서 인물은 가장 중요한 표현대상이다. 서양화의 역사는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은 이지적이면서도 감정적인 풍부한 자기표현이 가능하기에 회화의 중심적인 제재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화가 자신과 닮은 인간은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최적의 대상이다. 따라서 인간을 제재로 하는 모든 형태의 인물화는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내재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인물화에는 스토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김규리의 작품은 인물이 그 대상이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인물은 표면상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평범한 현대인들이다. 이들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통해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가 하면, 예민한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그림 속의 인물은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한 조형적인 설정임을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인물 형상이 기이하게도 가구, 즉 가재도구의 형태를 하고 있기에 그렇다.

사람이 탁자와 의자가 되고, 침대와 소파가 되는가 하면 세면기, 욕조, 변기가 되는 허구의 세계가 전개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재도구가 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변전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그 기막힌 발상에 놀라기 전에 허구를 현실적인 상황에 밀착시키는 그 풍부한 조형적인 상상력은 아주 매혹적이다. 의인화된 가재도구가 아니라, 가재도구화한 인간의 형상이라는 설정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두기에 충분하다.

 

 

이렇듯이 가재도구의 형태로 물질화하는 인간의 형상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를 표방하면서 스토리(내용)의 중심적 역할을 한다.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전제는 어쩌면 현실과는 다른 이상적인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강력한 희망인지 모른다. 적지 않은 현대인의 가정은 현실적으로 대화와 소통의 단절, 즉 소외와 무관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심적인 고통 속에 빠져들고 있기에 그렇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무기력한 존재’로서의 ‘무생물’인 가재도구의 형태로 변환하는 인물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인간이 ‘무기력한 존재’인 가재도구로 변환하고 있음에도 실제의 가정을 보고 있는 듯싶은 사실성에 사로잡힌다. 이는 다름 아닌 ‘무생물’이면서 ‘생물’일 수밖에 없는 양면성 혹은 이중적인 상황을 통해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오가고 있는데 기인한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은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은유적인 형식으로 표현한다.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가정 그리고 사회 및 국가적인 문제까지 포괄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기에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표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현실에 입각한 실재하는 문제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의 개진임에도 불구하고 은유법을 구사함으로써 공격적이지 않다. 세상에 대한 주관적인 관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의미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까닭이다.

 

 

그림 속의 인물은 대체로 복수로 등장하는데, 이는 인물들 사이에 놓이는 관계 및 그로 인한 갈등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복수의 인물들은 사회적인 문제를 제재(내용)로 내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장치일 수 있다. 복수의 인물들 사이에 놓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이야말로 작품 속에 담긴 숨겨진 메시지인지 모른다. 물론 작품에 따라서는 가재도구라는 설정과는 다른 실제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에도 화면구성은 사실적인 공간을 초월한다.

어쩌면 그의 작업에서 인물은 개체로서의 존재성보다는 스토리를 구성하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다. 하나하나의 인물에 주어지는 특정의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개체는 그림의 내용을 구성하는 구성요소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인물들은 내용에 관여하는 즉,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한다. 스토리 전개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초상화 형식에서 탈피하게 되는 것이다. 인물을 가재도구로 설정하는 방식은 비인간적인 존재로 전락한 인간의 내적 갈등과 긴장을 주시한다는 의도가 있다.

 

 

그가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긴장 및 갈등을 조형적인 구조식으로 설정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시각으로 인간 삶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이는 개인에 대한 ‘소외’ 및 ‘구속’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절대 권력에 의한 무기력한 집단에 가해지는 ‘억압’의 문제일수도 있다. 실제로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가장이라든가, 북한 권력자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하는 북한주민들을 제재로 하는 일련의 작품은 사회성이 강하다. 소외, 고립, 단절, 억압, 제재가 가해지는 개인 또는 집단의 존재성을 상기시키면서 그 이면에 숨겨진 저항과 자유의지 그리고 해방을 은유하는 것이다.

인물을 가구로 대체하는 특이한 발상은 고립과 소외 그리고 단절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을 은유한다. 무생물인 가재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고독과 권태, 소외, 고립, 단절 그리고 절망감으로 가득 찬 현실적인 삶을 성찰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과 상관없이 무생물이라는 존재로서의 가재도구가 되는 무기력한 인간상을 통해 차가운 현대인간사회의 단면을 적시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생명력 및 주체성을 상실한 채 가재도구로 전락한 인간상에서도 저항과 독립과 해방에의 꿈을 보게 된다. 본연의 인간으로의 환원을 꿈꾸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들 사이, 그리고 계층 간의 갈등과 긴장은 결과적으로 인간 본연의 존재로 환원하기를 희망하는, 즉 진정한 개체의 독립 및 해방을 위한 에너지인 것이다. 비록 가재도구로 규정되는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보일지언정 탄력적인 용수철처럼 내부에 비축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갈망은 팽배하다. 여기에서 부풀려진 인물의 형태는 다름 아닌 내부에 축적된 자유 및 해방에의 염원을 은유함과 동시에 개별적인 형식미를 지지한다.

그의 작품에서 부풀려진 인물의 형태는 형식미를 주도한다. 골력이 드러나지 않는 팽팽한 살집과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부드러운 명암처리에 의한 단순한 형태묘사는 사실성에서 벗어나 있다. 세부적인 수식을 억제한 간결한 형태감각은 그림의 내용을 선명히 부각시키는데 효과적이다. 부드러운 채색기법으로 시각적인 통일감을 조성함으로써 의미전달이 명쾌하다. 뿐만 아니라 점진적인 색조의 변화, 강렬한 색채대비 그리고 색조의 강약에 따른 미묘한 변화는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이끌어가는 요인이다. 구성적으로는 복잡한 듯싶으나 전체적인 이미지는 결코 산만하지 않다. 오히려 단순한 형태감각은 빠른 시각적인 이해를 유도한다.

 

 

전체적으로는 단순한데도 그림은 어떤 경우에도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명암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단순한 조형적인 구조를 입체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리하여 허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지우는 시각적인 효과를 얻는다. 그에 따라 인간이 가재도구가 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실제의 가정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의 작품과 마주했을 때 가구와 인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상황설정이 교묘하여 마치 실제의 가정을 들여다보는 듯이 반응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형상을 한 가재도구와 가재도구화한 인간의 형상 사이에는 차이는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까닭이다. 작품 가운데는 가재도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일상의 가정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는데, 가재도구가 인간형상을 하고 있는 작품과의 차이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개념의 조형언어 및 어법의 창의성은 여기에 있다.  

 

 

이렇듯이 그의 그림은 형식적인 아름다움 및 개별성을 성취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조형적인 완성도가 높다. 더불어 내용의 전달이라는 면에서도 선명하고 명쾌하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의미심장한 스토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수의 인물들이 조성하는 긴장은 화면공간을 압박하면서 일시적으로 감상자의 탐미적인 시선을 제압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미적 감성을 흔드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흔쾌히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우울한 정서가 지배하는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 및 세련된 형태미가 눈부신 빛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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