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펜보이 2010. 4. 27. 00:16

 

 

 

나윤찬 작품세계

 

꿈과 사랑과 행복을 담은 서정적인 풍경

 

신항섭(미술평론가)

 

예술은 타고난 미적 감수성의 몫이다. 미적 감각이 극도로 예민할 때 불현듯 새로운 예술적인 표현과 조우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감각은 훈련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선험적인 인식, 또는 직관적인 인식의 형태로 주어지는 예민한 미적 감각이야말로 예술창작의 본질인지 모른다. 그 본질을 장악하는 예술가만이 개별적인 세계를 경영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진정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예술이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윤찬의 작업을 보면서 그림이란 철저히 개인적인 작업이고, 결과적으로는 개별성 여부로 결판이 난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따라서 전문적인 미술교육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 오직 타고난 미적 감수성에 의탁해온 그의 경우를 보면서 어쩌면 미술교육이 되레 명민한 미적 감수성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작품은 타고난 미적 감수성과 심미의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기에 그렇다.

 

 

적어도 그림의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어느 특정 미술양식이나 형식을 따랐다는 의심을 받을 이유가 없을 듯싶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특정 작가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는 그 자신만의 개별적인 미적 감수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형태를 단순화하고 재해석하여 평면적인 이미지로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은 정연한 조형적인 논리를 보여준다. 특히 색채 및 형태를 조합하여 통일된 시각적인 이미지에 도달하는 구성적인 화면은 견고하다.

이와 같은 조형감각은 타고난 감수성과 범상치 않은 미적 안목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10여년 남짓 사생회를 따라다니며 그림을 그린 경력이 전부라고는 믿을 수 없기에 그렇다. 이미 사생회 초기부터 남다른 조형감각을 발휘, 일반적인 자연주의 경향과 다른 야수파적인 강렬한 인상의 작업을 했다. 이는 주의 깊은 관찰에 의한 기술적인 완성도보다는 자연에서 보고 느낀 인상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결과이다. 강하고 힘차며 둔탁한 윤곽선으로 표현되는 풍경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는 인상이지만 시각적인 쾌감이 적지 않았다. 그 안에 잠재된 예민한 미적 감수성을 훔쳐보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이미 풍경을 압축하고 함축할 수 있는 조형감각을 터득하고 있었다. 1,2회 개인전 작품이 말해주듯이 눈에 보이는 사실 대부분을 생략하거나 함축한 채 그 전체적인 인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점차 보이는 사실에 얽매이지 않고 심상을 표현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따라서 생략하고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화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현실성, 즉 사실성을 소거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조형적인 모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어쩌면 강렬한 선과 평면적인 색채이미지로 요약되는, 그의 작품세계를 견지하는 조형적인 특징은 순수미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보이는 사실의 재현과는 다른 형태의 재해석 및 공간해석을 통해 선과 면과 색채의 아름다운 조화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재 및 제재가 간결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구와 직면하게 된다. 복잡한 소재 및 구성보다는 간단명료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호소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서 풍경을 제재로 하되 시각적인 이해가 빠른 조형적인 최대공약수를 찾아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선택된 소재가 꽃과 나무와 집이다. 풍경화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이들 소재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존재로서 시각적인 이해 및 아름다움을 위해 충실히 기능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이렇듯이 자신의 조형세계를 전개하는데 필요한 이들 소재는 조형적인 변주를 통해 다양한 이미지로 거듭나게 된다.

나무가 인간과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꽃과 잎으로 무성한 형태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집을 짓는 목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인간과 닮은 형태, 즉 인간과 마찬가지로 직립한 채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모양이 유사한 것이다. 그러기에 나무는 그림 속에서 의인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과 닮은 나무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에 따라 나무는 단순히 자연풍경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시적인가 하면 때로는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나무의 형상은 아주 간결하다. 줄기와 가지 그리고 꽃과 이파리를 아우르는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지극히 단순하게 보인다. 줄기와 가지는 굵고 힘찬 선으로 압축시키고 꽃이나 이파리는 점 또는 짧은 선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처럼 함축적인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하나의 나무형상을 하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는 화면을 가득 채우다 못해 화면 밖으로 확장된다. 즉 캔버스를 통해 보자면 나뭇가지가 밖으로 잘려나가는 형국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각적인 압박감을 줌과 동시에 나무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분을 유발한다.

일반적인 나무그림이 그 전체적인 형상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반면, 그는 나무의 구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줄기와 가지가 중심이 되고 꽃과 이파리는 구성요소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나무의 아름다움에 대한 심층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뭇가지가 가지고 있는 형태적인 특징은 거의 직선에 가까운 이미지로 요약되기 마련이다. 여기에다 점이나 짧은 선으로 표현되는 꽃과 이파리는 줄기와 가지, 그 나머지 부분을 채운다. 어쩌면 아주 복잡한 구성인데도 거의 반복적인 패턴의 연속이어서 결코 산만하지 않고 오히려 규칙적인 리듬감이 느껴진다.

 

 

한편 나무와 함께 그림의 중심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집은 나무보다도 더 간략하게 압축된다. 직선적인 굵고 단순한 윤곽선으로 압축되는 집의 형태는 마치 기하학적인 얼개구조처럼 보인다. 다수의 집들이 집단을 이루는 촌락의 형태로 자리하는 집은 더 이상 압축할 수 없을 만큼 간명하다. 작품에 따라서는 창문조차 생략한 채 벽과 지붕만으로 이루어진 집의 형상은 나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요약과 함축이라는 조형어법의 산물이다.

아이들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소박파적인 순수함으로 요약되는 집의 형상은 거의 기학학적인 추상에 가깝다. 단지 직선적인 선만으로 형용하는 조형적인 요약은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지는 집에 대한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 집들은 독립적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기묘한 형상을 이룬 채 서로 붙어있다.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가정과 가정을 결속하는 상징적인 메시지로 이해된다. 즉,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집단의식을 그처럼 덩어리를 이루는 집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 작품에 드러나는 집의 모양은 이전과 달리 창문이 강조되고 있다. 더구나 창문에서는 따스한 불빛이 비친다. 실제 집의 크기보다 더 큰 비례를 보여주는 창문에서 불빛이 비친다는 것은 화목한 가정을 암시한다. 비록 그림 속에서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지만 따스한 불빛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듯이 그는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창문을 통해 꿈과 사랑과 행복의 원천인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의 작품세계 근저에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헌사가 담겨 있다. 꽃과 나무 그리고 가옥이라는 제한된 몇 가지 소재를 구성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작품 하나하나가 발산하는 색채의 광휘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긍정의 표현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간소한 몇 가지 색채를 기본으로 하는 색채의 화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의 색채감각은 감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지적인 세련미를 보여준다.

 

 

여기에다가 간소하게 전개되는 형상을 덧붙임으로써 한 편의 서정시와 같은 풍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회 작품은 아름다운 자연을 상징하는 꽃과 나무가 화면을 지배하는 가운데 가옥을 화면 구석으로 모아놓음으로써 시야를 한껏 넓혀놓고 있다. 이처럼 공간의 확장을 통해 그는 서정적인 이미지를 불러들이고 있다. 꽃과 나무 그리고 촌락이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촌락을 화면 구석으로 몰아놓음으로써 서정적인 공간이 열리게 된다. 시야를 넓혀주는 공간 배분, 즉 소실점이 없는 데도 원근이 존재함으로써 한 수의 서정시를 읽고 있는 듯싶은 감정에 이끌리는 것이다.

 

<나윤찬 작품전은 2010년 5월29일부터 6월6일까지 서울 양재동 한전프라자갤러리(02-2105-8190)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