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펜보이 2010. 6. 15. 21:35

 

이지수 작 

 

작품의 양면성 - 형식과 내용

 

신항섭(미술평론가)

 

그림은 시각예술이다. 그림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물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이다. 또한 우리의 눈으로는 인지할 수 없을지라도 인간의 내면세계인 정신 및 감정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적활동과 관련한 상상이나 환상적인 세계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시각예술의 특징은 일단 그 표현방법이 어떻든 간에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심상의 세계를 추상적인 언어인 소리로 표현하는 것은 음악이다. 청각예술로서의 음악은 눈으로 인지할 수 없으나 현실적인 공간을 통해 그 존재성을 드러낸다. 물론 연주를 직접 보면서 듣는다는 점에서는 일부분 시각예술과의 연관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소리를 매개로 하는 음악 그 자체는 오직 청각에 의존해야만 하므로 시각예술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아무튼 시각예술로서의 그림은 오직 눈에 보이는 사실로 말할 따름이다. 즉 그림은 훈련된 기술 및 감각을 이용해 평면공간에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예술이다. 그러기에 그림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떠나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그 가치 또한 전적으로 시각적인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림에 담긴 모든 것은 우선 시각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추상화일지라도 일단 시각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그 추상적인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사실주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사실주의 회화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시각적인 이해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시각예술의 전형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물상을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는 까닭이다. 사실주의 회화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충실히 전하는 것만으로도 미학적인 요구를 충족시킨다. 거기에 무엇을 표현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완성도 높은 기술에 의해 재현되는 현실상이야말로 사실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시각적인 가치이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떨어져 눈에 보이는 사실을 실제처럼 재현하지 못하면 사실주의 미학을 충족시킬 수 없다. 사실주의 회화는 일단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력을 통해 성립된다. 소재 및 대상이 무엇이든지 실제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묘사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시각예술로서의 사실주의 회화가 지켜야 할 윤리성이다.

한편 추상회화는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인 형태가 존재하지 않기에 시각적인 이해가 용이하지 않다. 물론 기하학적인 추상은 직선이나 삼각형 사각형 원형 등 기하학에 합당한 도형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기하학적인 도형이라는 이미지를 읽을 수 있어 난해하지는 않다. 이에 반해 내면세계, 즉 감정이나 무의식 또는 상상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뜨거운 추상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기에 시각적인 이해가 쉽지 않다. 현상계에 실재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할 경우 현상계의 이미지로는 설명되지 않기 십상이어서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현상계의 무엇과 다른 인간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추상회화는 당연히 구체적인 형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색채와 다양한 표현기법에 의한 비사실적인 이미지가 존재하기는 한다. 점, 선, 면, 색채 그리고 이와 같은 이미지들이 다양한 표현기법에 의해 이합집산하면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즉, 칠하기, 긋기, 긁기, 뿌리기, 흘리기, 지우기, 덧칠하기, 붙이기, 뚫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표현한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강주영 작

 

추상회화는 그 이미지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감상자들 자신의 경험과 상상, 그리고 지적인 수준에 따라 감정 및 정신의 반응은 다르게 마련이다. 눈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추상적인 이미지에도 아름다운 조형미가 존재한다. 색채조합에 따라 또는 이미지의 조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사실적인 세계와는 또 다른 감동으로 정신 및 감정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추상적인 언어를 이용하는 화가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작업하는 일은 없다. 그 자신의 희로애락의 감적이라든가, 사상이나 이념 또는 철학 등 정신세계를 표현한다. 또한 누군가는 의식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 또는 잠재적인 의식세계나 환상적인 상상의 이미지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고양된 미적 감정을 아름다운 색채조합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보이는 현상계에 국한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인간의 내면세계로 시선을 돌려 그를 시각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인 회화는 감상자와의 소통이 용이하지 않다. 구체적인 형태가 없어 시각적인 이해가 어렵거니와 감정이입 또한 쉽지 않은 까닭이다. 화가의 경험과 화가의 사고와 화가의 미적 감수성을 공유할 수 없기에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는 추상회화가 안고 있는 어려움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추상회화는 일정한 패턴을 제시하게 된다. 즉,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가를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사한 이미지를 반복으로 보여줌으로써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납득시키고자 한다. 이는 방법론의 문제로서 표현방법이 다르면 그 이미지 또한 다르기 십상이어서 새로운 표현방법을 강구하면 그를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각적인 이해를 돕고 동시에 개별적인 조형성을 확립하게 된다.

유사한 이미지의 반복은 다름 아닌 일정한 패턴, 즉 이미지의 통일성에 의한 형식미를 산출해내기 위한 방식이다. 그래야만 화가가 의도하는 바, 즉 작의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관성 있는 조형적인 논리 및 방법의 전개야말로 개별적인 형식미의 전제조건이다. 그림에서 형식은 화가가 해결해야만 하는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개별적인 조형세계는 다름 아닌 독자적인 형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개별적인 형식의 중요성은 인상파의 출현과 때를 같이한다. 인상파에서 개별적인 형식을 완성한 화가들이 집단적인 형태로 쏟아져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통이라는 과거의 습속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정신을 구가했기 때문이다. 세잔느, 고호, 고갱, 르노아르, 드가, 마네, 모네 등 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화가들이 모두 인상주의 미학에 열광했고, 개별적인 형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물론 그 이전의 표현양식에서도 형식이 간과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상을 보고 재현하는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또는 사실주의에서도 개별적인 형식을 갖춤으로써 창조적인 화가로서 미술사를 장식할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렘브란트, 루벤스, 엘 그레코, 고야, 밀레, 쿠르베 등 인물을 대상으로 한 위대한 화가들 모두 독자적인 시각으로 개별적인 형식을 완성함으로써 미술사에 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소재 및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더라도 독자적인 사상 및 철학 그리고 미적 감각을 가미해 독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한 자기주장을 명확히 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또 재현적인 묘사기법을 그대로 수용하는 가운데서도 남과 다른 창의적인 시각으로 독자적인 해석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그림은 형식을 통해 내용을 담는다는 얘기다. 아무리 사실적인 묘사에 의탁하는 재현적인 그림이라고 할지언정, 무념한 상태로 작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엄윤숙 작

 

실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표현양식으로는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지만 위에 열거한 위대한 화가들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얼마든지 다른 시각, 다른 조형성,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조형이란 단지 형태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색채나 빛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화가들은 사실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형태를 포함하여 색채 및 빛 그리고 사상 및 철학을 덧붙여 저마다 개별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형식의 문제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패턴의 반복이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루벤스처럼 풍부한 색채와 살찐 인물을 그린다든가, 렘브란트처럼 빛과 음영의 극단적인 대비를 강조하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반복해 그리다보면 개별성이 드러나고 그를 통해 독자적인 형식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그림은 일차적으로 형식미를 갖추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는 창의성을 중시하는 예술창작의 필수조건이자 윤리성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형식미를 완성한다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역사 이래 수많은 화가들이 존재해왔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해 왔기에 전인미답의 새로운 조형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사실주의만 하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묘사방식으로 독자적인 조형미, 즉 개별적인 형식미를 완성하는 예가 심심찮게 나오는 까닭이다. 개별적인 형식미의 창안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의 문제이다. 세상을 남과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필경 무언가 다른 시각적인 이미지와 조우할 수 있다. 창의성이란 남과 다른 관점의 산물이기에 그렇다.

회화에서는 형식과 더불어 내용을 간과할 수 없다. 즉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그 안에 은닉된 화가의 의도, 즉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그림이란 화가 자신의 총체적인 인생관의 표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단지 손의 기술이나 미적 감각에 의존하는데 그치는 화가는 없겠기에 말이다. 여기에서 내용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림에서 내용이란 형식과 등가의 위치에 선다. 형식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고 내용은 그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말한다. 아무런 감동 없이 단지 기계적이고 상투적으로 묘사하는, 상업적인 그림이 아니라면 이 두 가지가 양립하기 마련이다.

시각적인 이미지는 조형의 문제이고 내용은 사상 및 철학의 문제로 요약된다. 굳이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더라도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내적인 욕망의 표출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작업하는 과정에서 정신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화가에 따라서는 사상이나 철학 등 거창한 의미를 담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단지 그림 그리는 그 행위에 빠져들어 몰입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림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화가의 내면세계가 투영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없겠기에 말이다.

 

 

                            이경조 작 

 

따라서 화가가 의식적으로 그림 속에 의미를 담으려는 경우는 형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림의 형식은 눈으로 읽혀지는, 즉 시각적인 이해를 전제로 한다. 형식미는 일차적으로는 조형에 국한된 문제이다. 다시 말해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확연히 구별될 수 있는 조형적인 특징이 바로 형식이다. 화가는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형식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도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조형적인 특징, 즉 개별적인 형식미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자각에 기인한다. 여기에서 형식미란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 하면,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형식과 양립하는 내용은 어떻게 자리하게 되는 것일까. 일테면 내용은 그림 속에 담는, 세상을 향한 화가의 개인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나 시도 그에 합당한 일정한 형식적인 틀을 갖추게 된다는 점에서는 그림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림이 조형언어로 표현된다면 소설이나 시는 문자언어로 표현된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문자언어는 의미가 정해져 있는 단어를 조합함으로써 내용을 선명히 부각시킬 수 있다. 문자언어가 가지고 있는 규정된 뜻의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문학도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며 암시적인 방법을 구사함으로써 그 의미도출이 쉽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더라도 약속된 일정한 의미를 담은 단어의 조합을 통해 상징이나 은유 또는 암시적인 표현방법으로 은닉한 속뜻, 즉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반면에 회화에서의 형식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라고는 하지만, 문자언어와 같은 명백히 약속된 뜻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표현된 이미지를 통해 그 안에 담긴 의미, 즉 내용을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그림 속의 담긴 내용을 파악한다는 것은 이처럼 난해한 일이다. 그러나 그림에서도 형식보다 내용을 우선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사회계몽이나 이념적인 투쟁의 수단으로 제작되는 그림은 내용이 형식을 이끄는 식이 된다.

그림의 내용이란 이처럼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감상자의 감정을 촉발하거나 의식의 변화를 유도하게 된다. 그러기에 어느 면에서 예술로서의 순수성 및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할지라도 예술은 인간의 순수한 영혼과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 기능하는 것이어야겠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없는 그림은 왠지 싱겁고 허전하기 마련이다. 조형적인 형식이 우선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림이 단순한 신체적인 기능의 산물이 아닌 바에는 이미지를 주도하는 화가의 내면을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다. 그림이 시각적인 이해를 전제로 한다고 해도 화가의 개인적인 고뇌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시각적인 이해와는 또 다른 차원의 감상태도인 것이다.

그림의 내용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분명 무언가가 존재한다. 인간의 신체적인 행위는 분명 신체기능의 소산이지만 그를 제어하는 것은 정신 및 감정이라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 그림은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세상에 대한 화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이자 감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말해 그림 속에 담긴 속뜻에 대한 관심을 통해 보다 차원 높은 예술적인 가치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시각적인 이해를 딛고 그 안쪽에 자리하는 화가의 내면세계를 투시함으로써 한층 깊은 예술의 가치를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같은 무게로 병립하는 것이 이상적일 수 있다.

 

<'서울아트코리아' 5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